요즘 나의 유일한 낙이라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배불리 먹고 잡다한 집안일을 대충 정리한 후, 허리가 망가지기 딱 좋다는 45도 각도로 침대에 기대어 유튜브를 보는 것이다. 인생의 걱정거리를 베개 밑에 꾹꾹 욱여넣고 낄낄거리며 시간을 때우는 건,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구독하는 채널의 영상들을 재빠르게 둘러본 후 방앗간의 참새처럼 들르는 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영상을 모아놓은 '인기 급상승 동영상' 부분이다. 사람들은 오늘 뭐를 많이 봤나? 나도 대세 대열에 끼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열었는데, 동영상 목록 맨 위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섬네일이 눈에 띈다. 단 이틀 만에 200만 뷰를 가뿐히 넘긴 인기 동영상의 섬네일에는 굉장히 눈에 익은 얼굴의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JTBC <싱어게인2>의 한 장면.

JTBC <싱어게인2>의 한 장면. ⓒ JTBC

 
'어, 나 이 사람 아는데, 누구지?'
 
친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닌 선배를 본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이 날 듯 말 듯, 가물가물한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온몸의 총기를 되살려본다.
 
'아, 헤븐!!'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 발라드 노래로 한창 사랑을 받았던 가수 김현성이었다. 'Heaven(헤븐)'이라는 노래는 내가 꽤나 좋아하던 노래여서 노래방에서 빼놓지 않았던 애창곡이었고, 문득문득 옛 노래가 그리워지는 날에 가끔씩 찾아 듣던 노래였다. 내 기억 속의 풋풋했던 20대 가수는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중년의 모습이었다. 낯설지만 낯익은 이 느낌,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어색함마저 든다.
 
언젠가부터 그는 잊혀진 가수 중에 한 명이었다. 부침 많은 연예계에서 어느 순간 사라지는 가수들이 한둘도 아니고, 내 앞가림 하는 것도 벅차 이리 저리 날뛰던 시절이었기에 김현성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20여 년 만에 모습을 나타낸 그는 JTBC <싱어게인2>의 출연자였다. 잊혀진 가수들이 대중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돕는 리부팅 오디션 프로그램, 거기에 그가 나왔다. 한때는 내로라하는 인기가수였는데, 어쩐지 세월이 야속하다.
 
그는 '비운의 가수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어 나왔다'고 했다. 그저 사라진 가수인 줄만 알았는데, 뭔가 사연이 있나 보다. 내가 좋아하던 그 노래, 'Heaven'의 전주가 시작됐다. 노래의 첫 소절을 시작한 그의 목소리는 내가 즐겨들던 그 노랫소리가 아니었다. 감미로운 미성의 목소리로 파워풀하게 고음을 쏟아내던 그의 목소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은 불안하게, 하지만 한 음, 한 음 그는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마음에 한줄기 찬바람이 휘잉 자국을 남기며 지나간다. 왜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거지? 이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던 지난날의 가수였을 뿐인데, 왜 이리 마음이 짠한 걸까.
 
높은 음역대의 노래를 부르던 그는 무리하게 가수 활동을 하다 성대결절을 앓았고, 끝내 그가 가지고 있던 미성의 소리를 잃고 말았다고 한다. 무리한 활동으로 목소리를 잃은 비운의 가수, 그에게 새겨져 있던 꼬리표였다.
 
노래를 끝낸 그는 담담해 보였다. 오랜 시간 본인을 담금질해 단단해지려 한 게 느껴져서일까, 담담한 그가 오히려 더 마음이 쓰인다. 내가 그의 노래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건, 예전과 다른 창법과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노래에 담겨있었고, 쉽지 않았을 인생의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흔을 넘은 지금도 인생의 험난한 파고를 견뎌내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나이든 인생의 고비를 넘기기엔 누구든 어리다. 마흔을 살아내는 나에겐 적어도 그랬다.
 
가수가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일을 20대에 겪고 지금껏 버텨냈을 그가 안쓰러워 그렇게 마음이 아팠나보다. 잃어버린 목소리가 아니라, 그 시기를 겪어내고 지금의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그의 시간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가수 컨디션을 관리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정을 진행한 소속사를 나무랐고, 그때는 하라면 그저 하는 그런 시절이었다며 시절을 탓했다. 그는 아마 본인을 스스로 돌보지 않은 그 자신을 가장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 시간을 견뎌내고, 노래를 다시 부를 용기를 낸 그가 대단해보였다.
 
하지만 누군가의 댓글처럼 가슴 아파하는 건 그를 보고 있던 우리들이었을 뿐, 그는 오히려 후련해보였다. 목소리를 잃은 비운의 가수라는 짐을 그는 이제야 벗어던진 듯 편안해보였다. 처음엔 예전과 너무 다른 그의 노래에 놀랐지만 몇 번이고 다시 들어보니 미성의 목소리는 변했어도, 가창력만은 여전했다. 깊어진 감성은 오히려 더 진한 감동을 전해주었고, 실패한 가수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내어 노래하는 모습은 도리어 나를 위로해줬다. 
 
지금까지는 미성의 목소리로 고음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됐다면, 이제는 조금 더 깊은 목소리로 그만의 매력이 담긴 노래를 만들어갈 그를 기대해본다. 그는 실패한 가수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진심을 담은 노래로 감동을 주는 가수이다.
김현성 HEAVEN 싱어게인 아직도 가사를 줄줄 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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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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