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휴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1_오랜만에 등장한 '본격' 노동 드라마
 
한국사회에서 노동은 그 경제-사회적 기반을 이루는 핵심 요소이자 부의 원천임에도 늘 정치적으로 소외당해온 존재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선 사람이 유일한 자원'이라 했건만, 그들이 행하는 노동은 언제나 의도적으로 무시당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와 함께 잠깐 봄이 오긴 했지만 그 시절에도 절차적 민주주의 요구가 전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던 데 비해 노동자들의 권리투쟁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 일쑤였다.
 
1995년 민주노총 건설과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에 대항한 총파업 투쟁을 그 절정으로 고양되던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위상은 곧 추락하기 시작한다. 1997년 구제금융 이후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권리는 지난한 패배와 침체의 시간을 현재까지 거듭 되풀이하는 중이다. 강성노동조합 때문에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타령이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서 공공연히 나오는 요즘 시국이지만 정작 노동현장에선 여전히 기초적인 권리 보장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이 널려 있는 실정이다.
 
정규교육 체계에서 주식투자는 가르쳐도 기초적 노동법 교육은 부재한 게 엄연한 현실이며 모두가 CEO를 꿈꾸며 기업가 정신을 추앙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노동이 천대받고 설 자리가 없는 건 당연한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실체로 존재하는 것을 없는 셈 치부한다 해도 그 존재 자체를 지울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21세기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사회 내에서 투명인간 취급받는 노동과 노동자는 종종 우리가 위치한 자본주의 매트릭스에서 버그처럼 출몰하곤 한다.
 
이란희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휴가>는 무척 오랜만에 등장한 본격 노동주제 극영화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2014년 부지영 감독의 <카트> 이후 참 반가운 등장인 셈이다. 장편 독립영화들 중에서도 노동 문제는 대개 다큐멘터리의 역할로 떠넘겨지곤 해왔던 요즘 상황에 이 영화는 반가운 동시에 안쓰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왜 반갑냐 하면,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취하는 접근법과 표현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고민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현실 노동 의제를 다루느라 애써온 것과는 별개로, 창작 경향이 편중된다는 우려에 숨통을 트여준 셈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안쓰럽다 표현한 이유도 분명히 있다. 극영화는 아무래도 다큐멘터리에 비해 애로가 많을 수밖에 없다. 창작자 자신이 감내하며 버텨야 하는 고된 육체적/정신적 조건을 별도로 한다면 작업의 자율성을 상대적으로 획득하기 그나마 용이한 다큐멘터리 작업에 비해, 보다 대규모 인원과 예산이 필요한 극영화 제작여건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현장성을 다른 측면에서 상쇄하기 위한 안정된 여건이 절실한데 그런 조건을 갖추기 힘든 극영화 제작환경 때문에 아쉬운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도 종종 봐왔었다. 그렇기에 <휴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고심했을 무게감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감히 넘겨짚어 본다.
 
"휴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휴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2_현실 투쟁과 이면의 일상을 충실히 재현하다
 
영화는 여러 인터뷰와 보도 자료에서 공인해왔듯,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세계 유수의 기타 제조업체인 이 기업은 2007년 정리해고를 단행하면서 해외 공장 이전을 시작했다. 인천의 콜트 공장과 충남의 콜텍 공장, 양쪽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 투쟁을 시작하고 콜텍 해고노동자는 13년 째(4,464일) 만인 2019년 4월 회사와 합의했지만 콜트 해고노동자들은 2021년 10월 24일 기준 5,377일 째 복직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투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콜트·콜텍 복직투쟁을 다룬 관련 다큐멘터리들은 꽤 여러 편이 나와 있다. 그 영화들에서 종종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던 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 씨의 사연을 기반으로 형상화한 게 <휴가>의 극중 주인공인 셈이다.(임재춘 씨는 조만간 극장에서 선보일 이수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재춘언니>에서도 주역을 맡은 바 있다) 영화를 만든 이란희 감독은 2012년에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 '콜밴'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후 2016년에 해고노동자 본인들이 직접 출연한 단편 극영화 <천막>을 제작한 바 있다. 그런 준비된 기반 하에서 <휴가>는 장편으로 완성된다.
 
노동영화라고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은 투쟁조끼와 붉은 머리띠를 한 우락부락한 남성 노동자들의 시위와 구호를 자연스레 떠올릴 테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은 솔직히 우리가 노동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시인 셈이다. 우리는 대개 당사자들이 악다구니를 쓰는 찰나가 단신으로 보도되거나, 파업과 투쟁이 일상에 (주로 '차가 막히는 것 같은' 부정적 결과로) 영향을 미칠 때에만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그 외에는 과연 얼마나 관심을 가져봤던가?
 
그렇게 스쳐 지나보내던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휴가>는 영화 속에서 재구성한다. 하지만 구체적 투쟁 경과나 쟁점을 소개하려 하진 않는다. 그 대신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들 역시 우리 주변의 '이웃'이자 동료 시민이라는 엄연한 사실의 확인이다. '시민'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투쟁현장의 노동자들의 일상을 조명하려는 기획인 셈이다.
 
영화의 내용은 퍽 간소하다. 해고노동자 '재복'은 5년 넘게 복직을 위해 농성하며 싸워왔지만 해고무효소송에서 그와 동료들은 결국 최종 패소한다. 함께한 동료들도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누군가 열흘간의 '휴가'를 제안한다. 재복은 오랜만에 강남 역 농성장에서 인천의 '집'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그에게 집은 이제 낯선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 장면은 마치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 일리야 레핀의 유명한 역사화 배경 같은 순간이다. 유배되었던 정치범이 시베리아에서 돌아왔지만 가족 중 누구도 그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그림 속 묘사와 딱 판박이 느낌이다.
 
'휴가'를 왔다지만 재복은 그동안 제쳐뒀던 문제들과 씨름해야 한다. 복직투쟁을 시작할 당시 초3과 중1이던 두 딸은 이제 중2와 예비대학생이 되었다. 딸들은 지난 5년간 방치되다시피 커 왔다. 관계가 서먹하지 않을 수 없다. 재복은 막힌 지 오래인 개수대를 뚫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자식들에게 밥을 차린다. 하지만 5년간 쌓인 장벽은 넘기가 쉽지 않다.
 
재복은 휴가 기간 중에 큰딸의 대학 입학금 선납 예치금을 마련해야 한다. 친구의 목공소에서 일주일 알바를 하게 된 재복은 갓 스무 살인 '사수' 준영을 만난다. 5년간 사회 속에 있으면서도 평범한 이웃들과 단절된 섬처럼 존재해온 재복은 이제 '일상'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준영의 처지가 안쓰러워 이것저것 챙겨주고 목공일도 우직하게 작업한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지난 시간 굳게 믿어온 노동의 가치와 인간으로서의 오기가 바깥세상에선 여전히 통하지 않음에 흔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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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3_주인공이 목격하는 21세기 소외된 노동의 풍경
 
재복은 자신의 투쟁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만, 내심은 한참 흔들리는 중이다. 법정투쟁에 졌고, 동지들끼리도 지친 나머지 언쟁이 일어나곤 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동안 외면하고 방치해뒀던 집안사정은 최악이다. 참다못한 큰딸은 '아빠, 이제 서울가지마!'라며 재복에게 양자택일 선택을 요구한다. 장기화된 복직투쟁은 노동자의 가정을 초토화시켜버린다. 예전에 보험회사 담당자가 보험가입을 설득하면서 내놓은 교육 자료가 기억난다. 불의의 사고로 직장을 잃은 평범한 회사원 가정이 재정파탄에 내몰리는 데 3개월에서 6개월이면 충분하다고. 그런데 5년을 해고자 상태로 별다른 생계대책 없이 농성장을 지켜 왔다면 상황은 안 봐도 뻔하다.(영화 속에서 농성장 천막에 3명만 남은 이유다. 다른 조합원들은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하거나 다른 직장에 취업한 상태)
 
어릴 적 친구 우진은 재복에게 알바를 알선해준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그 자신 또한 공장 중간관리자인 우진 입장에서 친구에 대한 호의와 별개로, 재복이 쟁취하려는 노동권에 동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재복의 '사수'였던 준영이 작업 중 사고를 당하자 재복은 준영에게 산재 신청을 했냐고 묻지만, (한국의 대부분 중소기업 현장이 실제 지금도 그렇듯) 치료비를 공장에서 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답을 듣게 될 뿐이다. 재복은 준영을 부추기듯 산재처리를 돕겠다고 설득하지만 준영은 일을 키우기 싫다며 거부한다. 그리고 산재처리를 해줘야 되지 않느냐며 친구에게 따지지만 우진은 핀잔을 줄 뿐이다.
 
그런 준영의 빈자리를 대신해 목공소에 새로 실습생이 들어온다. 실업계 고교 재학생이다. 영화에서 준영과 새 실습생은 의도적으로 동일한 패턴의 행위를 반복한다. 과거에 많은 인원이 협업하며 활기차게 일하던 노동현장은 21세기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은 수많은 개인들의 노동이 존재할 뿐이다. 일도 혼자 알아서, 밥도 혼자 적당히 먹는 게 몸에 배인 새로운 세대의 극도로 개별화된 노동자들을 보면서 재복은 그 21세기 노동의 풍경 앞에 그저 무력한 존재다.
 
재복은 영화 속에서 수차례 '이건 아니잖아!'라고 뇌까리지만 해결되는 일은 없다. 그의 머릿속에 맴도는 무수한 질문과 어찌할 수 없는 울분을 뒤로 한 채 재복이 부당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방식은 그가 5년간 농성장에서 수행해왔던 역할의 변주다. 자식들에게, 그리고 준영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려 애쓰는 행위다. 이는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재복은 아침잠 한숨 더 잘 시간에 손수 도시락을 싸서 끼니를 해결한다. 그리고 열심히 밥을 먹는다.
 
그는 '죽은 노동'을 거부하고 '산 노동'을 추구하다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 오랜 기간 일했던 직장을 잃었다. 그 정당함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자신의 딸들이나 준영이 한 끼 요기를 위해 먹는 컵라면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 대신에 국과 찬이 조촐하게나마 갖춰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을 먹고 주위에도 먹이려 애쓴다. 마치 자신의 노동은 일회용이 아니라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것처럼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재복의 철학은 확고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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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4_휴가가 끝난 주인공의 선택은?
 
그런 재복에게 열흘간 주어진 휴가는 위기인 동시에 정돈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실 재복은 그 앞에 닥친 산적한 현안들 중 제대로는 실제 아무 것도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한다. 단 열흘 동안 지난 5년이 누적된 문제들을 온전히 풀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작 큰딸에게 등록금 총액의 1할 남짓한 예치금을 건네주고, 작은딸에게 오리털 파카 한 벌 사준 게 그가 감당 가능한 현재 상황이다.
 
결국 재복은 자식들과의 불화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그가 1주일간 시간을 보냈던 알바 현장의 부당한 노동현실도 바로잡지 못했다. 이제 다시 막막한 투쟁현장으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할지 휴가복귀를 앞둔 재복은 고뇌에 빠진다. 그런 와중에 문득 뭔가를 결심한 듯 그는 열심히 반찬을 만든다. 소시지를 볶는다. 그렇게 이것저것 챙겨서 따뜻한 도시락 보따리를 꾸린다.
 
그 도시락에 담긴 제대로 된 '한 끼 밥'은 아버지의 관심과 역할이 절실한 딸들에게도, 제대로 된 울타리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목공소 청년들에게도, 한 명의 동료가 있고 없고 좌지우지되는 천막의 '동지'들에게도, 무엇보다 그 자신에게도 생명 줄에 다름 아닌 존재다. 과연 재복이 열심히 새벽잠을 설쳐가며 만든 도시락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휴가>는 그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다보니 평범한 인간이 감내하기 쉽지 않은 고난에 내몰린 노동자의 인간으로 살고픈 의지가 담긴 일상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이 영화에는 복잡한 쟁점 해설이나 구호의 강요는 없다. 하지만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재복의 갈등과 결단의 과정을 통해 예리하게 벼려져 명확하게 드러난다.
 
억지로 승리하는 투쟁의 환상을 보여주려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사는 세상에서 정당한 노동의 몫을 단호히 요구하는 <휴가>의 주제의식은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호출한다. 자연스런 묘사를 위해 가능한 연기자 티가 안 나는 배우들의 기용이나 실제 농성현장의 배경활용, 스펙터클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윤리적 고민과 심리 묘사에 집중하는 미니멀한 연출 등의 요소에서 유사점이 많다.

하지만 굳이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세계적 거장들의 이름에 의지하는 건 조금 선후가 뒤바뀐 느낌이다. 그저 영화를 통해 노동 문제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 세상의 모순을 엄밀히 깨닫게 만들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 - '노동자'의 의지를 응원하는 태도에서 연결고리를 찾으면 족할 일이다. 근래 한국 영화들 중 <휴가>가 그 거장들의 작품세계에 꽤나 근접한 풍경을 보여준다는 사실 또한 엄연한 'FACT'다.
 
작품 정보

제목 휴가 A Leave
2020|한국|드라마
2021.10.21. 개봉|81분|12세 관람가
감독 이란희
주연 이봉하(재복 역), 김아석(준영 역), 신운섭(우진 역)
출연 김정연(현희 역), 이승주(현빈 역), 서광택(영석 역), 황정용(만용 역),
이승원(상필 역), 박재형(민제 역), 복운석(인력소개소 직원 역)
제작 신운섭, 이란희
조감독 안용해
각본 이란희
촬영 노신웅
조명 변상진
편집 이연정
미술 김소희
배급 (주)인디스토리
 
 
2020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대상, 독불장군상, 독립스타상(이봉하)
2021 정동진독립영화제 땡그랑동전상
2021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금문상-신인감독상 특별언급

 
"휴가"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휴가"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휴가 콜트콜텍 이란희 감독 노동 정리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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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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