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길"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아버지의 길"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1_'아버지'의 길이 시작되기까지
 
#1.
영화가 시작된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아들과 딸 두 자녀를 데리고 가동을 멈춘 공장 문을 들어선다. 경비가 출입을 제지하자 여성은 남편이 2년 전에 해고를 당했고 그전 임금체불은 물론 지급받기로 한 해고수당도 받지 못해 가족이 굶주림에 시달린다며 호소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다. 모두가 묵묵히 시선을 피할 뿐. 급기야 그녀는 극단적인 저항을 시도한다. 공장 안에 서성거리던 직원들도, 영화를 보던 관객들도 화들짝 놀랄 순간이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화면 암전.
 
#2.
장면이 바뀐다. 벌목작업에 투입된 일용직 노동자들. 지친 표정으로 아름드리나무를 톱질하고 가지를 정리하는 현장. 누군가 급히 오토바이로 달려와 사람을 찾는다. 소식을 전해들은 당사자는 오토바이를 태워주겠다는 지인의 만류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야산을 가로질러 미친 듯 달린다.
 
#3.
다음 장면. 마을에 도착한 남자는 아내와 아이들은 정작 만나지 못한 채 경찰 조사 중이다. 그런데 낌새가 좀 이상하다. 경찰관은 상황설명은 대충대충, 아내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위로나 돌봄 대신 마치 그들 부부가 본래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투로 취조하듯 분위기가 흘러간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도 끼니를 거른 남자의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4.
남자는 어머니의 극단적 시도를 목격하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았을 두 자녀를 찾지만, 경찰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임시보호중인 지역 복지센터에서도 남자는 뭔가 문제가 있는 존재로 취급된다. 그는 제대로 된 정규직 일자리도 없이 일용직을 전전하고→그 때문에 아내를 우울증에 걸리도록 방치했으며→아이들을 빈곤 속에서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센터장이 수차례 강조하는 "아동 최선의 원리"에 따르면 그런 남자는 자녀들과 함께 살 자격이 없는 존재다. 이제 그는 아이들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5.
복지센터의 장은 그를 동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센터 직원들의 심사 전 갖춰야할 기준들을 제시한다. 남자는 이웃에 사정해 끊긴 전기를 되살리고 직접 DIY로 수도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며, 집 안에 (비록 든 내용물은 없지만) 냉장고도 준비한다. 하지만 현장심사 당일에 위원들은 그가 듣지 못한 까다로운 추가조건을 들먹이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컴퓨터가 필수라는 둥, 아이들 옷가지나 인형이 모자라다는 둥. 결국 그들은 아이들이 안정된 환경을 위해 위탁가정에 맡겨져야 한다고 판정한다. 남자는 졸지에 자녀들과 생이별하게 된다.
 
#6.
남자는 센터를 찾아가 거세게 항의하지만 기관장은 그를 비웃으며 단식이건 시위건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조롱한다. 텅 빈 건물에 남겨진 그에게 남자의 처지를 동정한 경비원이 작은 호의와 함께 남자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재 그가 처한 상황을 알려준다. 결국 남자는 아이들을 찾기 위한 이의신청을 '답‧정‧너'인 지역복지센터가 아니라 수도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복지부 장관에게 직접 접수할 것을 결심한다.
 
#7.
이제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길'이 시작된다. 그가 사는 시골에서 수도 베오그라드까지는 300km. 서울에서 광주 혹은 대구에 이르는 거리다. 남자는 묵묵히 보잘 것 없는 짐을 싼 뒤 이른 아침에 집 대문을 열쇠로 잠그고 여정을 출발한다.
 
2_켄 로치가 세르비아의 현실과 만나다
 
슬로단 고르보비치 감독의 <아버지의 길>은 켄 로치의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Ladybird Ladybird, 1994>가 동구권 사회주의 쇠락과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참화를 겪은 남동유럽의 소국 세르비아 현실과 만난 것 같은 영화다. 켄 로치의 영화는 주인공 여성이 서로 아버지가 다른 네 명의 아이들을 어렵게 키우던 중, 그녀가 외출한 틈에 집에 불이 나 한 아이가 다치는 상황을 설정한다. 사건을 조사한 사회복지부는 미혼모에 일자리도 불안한 그녀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다며 부적격 판정을 내리고 어머니와 아이를 떼어놓는다. 그리고 주인공의 자식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켄 로치의 많은 영화가 영국 내 노동계급의 몰락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복지제도를 다루지만, 특히 <아버지의 길>과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는 함께 논할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남자-아버지-니콜라'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실직 상태에서도 일용직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헌신적으로 살아왔다. 그의 과묵한 표정과 깊게 패인 주름은 굳이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더라도 그의 과거를 추측하게 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전쟁과 경제난으로 무너진 나라에서 그가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길은 요원해 보인다. 영화는 남자와 그의 가족이 처한 빈곤의 멍에를 설명조로 해설하기보다는 그가 300km 여정을 마치 스토아학파의 수도사처럼 묵묵히 걷는 가운데 길 주변의 풍경들과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짓는 표정으로 형상화해낸다.
 
2_1. 포스트 아포칼립스: 길 위의 풍경
 
"아버지의 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아버지의 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한때 제3세계의 지도국이자 범 사회주의권에서도 양호한 경제를 자랑했던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은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 티토 사후 다민족 국가는 갈가리 찢겨졌고, 연방을 구성하던 개별 공화국 내 정치지도자들은 양보와 대화를 통한 통합보다는 오래 묵은 원한을 끄집어내 자신들의 집권에 활용했다. 그 결과가 1990년대 내내 벌어진, 그리고 현재도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봉합된 유고 내전이다.
 
당시 국면은 연방의 중심국이던 세르비아가 타 구성국의 분리 독립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인종청소를 자행한 사례로 기억된다.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벌인 전쟁범죄는 역시 근래 개봉했던 야스밀라 즈바닉 감독의 <쿠오바디스, 아이다 Quo vadis, Aida , 2020> 등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의 민족과 종교 갈등은 오스만 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복잡다단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모두가 원치 않았던 전쟁의 결과로 세르비아는 파괴되고 경제는 무너졌다. 극단적 민족주의에 경도된 과거에서 어렵게 빠져나와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중이지만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다. 그렇게 한 세대 전체가 여전히 전쟁 후유증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
 
길 주변의 집들은 폐가가 되어 있거나 쓰러지기 직전으로 무너지고 녹슬어 있다.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전후의 혼란으로 복구와 재건은 시늉만 벌어졌을 따름. 도로는 곳곳이 패어 있고 임시로 땜질했을 뿐, 움푹 팬 자국투성이다. 어른들의 눈빛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고 아이들의 표정은 공허할 뿐이다. 이 영화는 가상현실 SF가 아니지만 그 스산한 풍경은 문명이 몰락한 후 묵시록적 이미지를 담은 디스토피아로 손색이 없다.
 
지역복지센터가 아이들을 아버지에게서 합법적으로 빼앗아갈 수 있게 해주는 관료주의 시스템의 허점과 부정부패 카르텔이 30년째 세르비아를 병들대로 병들게 망쳐놓은 것을 굳이 정치사회적 상황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약간의 상식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셈이다. 남자가 걷는 로드무비의 여정은 그렇게 회복되지 못한 채 이 나라를 뒤덮은 암울한 정서와, 피로와 환멸만 가득한 상황을 잿빛과 회색의 무미건조한 색채를 띠지만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장대한 풍경화처럼 화면 가득 펼쳐 보인다.
 
2_2. '노동계급의 죽음'을 상징하는 장면들
 
남자는 여정을 출발하기 직전과 돌아온 직후에 반복적으로 고향마을의 시장을 방문한다. 컨테이너와 노점들이 얼기설기 모인 시장의 중앙에는 과거 사회주의 노력영웅의 동상이 별 의미 없이 세워져 있다. 과거 사회주의 진영에서 잘 나가던 시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잔존물이다. '노동자가 주인이던 나라'에서 역사위인 대신에 권장되던 건축과 예술양식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에 따라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와 확고한 전망으로 전진하는 노동자의 굳센 표정과 힘찬 근육은 시장 한복판에서 공허하지만 여전히 위압적으로 서 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노동자가 주인이던 나라에서 현실의 성실한 노동자인 주인공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정리해고로 쫓겨났다. 나고 자란 동네에서도 제대로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한 채 가족과 굶주린다. 수도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 가운데 어디에서도 그는 하다못해 중앙으로 당당히 걷지 못한 채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피거나, 야산을 방황하기를 거듭한다. 화려한 베오그라드의 정부청사에 천신만고 끝에 당도하지만, 늘 구석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켄 로치와 다르덴 형제가 형상화해낸, '긍지와 존엄을 잃어버린 노동자계급'의 동구권 비전 그 자체인 셈이다.
 
그나마 켄 로치와 다르덴이 다루는 영국과 프랑스, 서유럽의 노동계급은 형식적으로나마 국가가 복지제도를 유지하고, 경기가 안 좋다지만 여력이 있는 경제상황 때문에 (그 내용은 차치하고)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지탱하는 중이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경제가 붕괴된 세르비아의 상황에서는 이조차 기대할 수 없다. 자본과 시장 중심으로 유럽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상위 층과 남유럽의 하위 층 국가 간 격차는 더욱 심화되는 모순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물론 세르비아는 전범국가로 EU 가입을 거부당하고 있다). 고립된 채 전후 혼란과 부정부패가 횡행하던 작은 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룩하기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노릇이다.
 
그런 몰락의 과정은 마치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에도 자립하기 힘든 3세계 전반의 사정과 흡사하다. 오히려 구 사회주의권에서도 상위 계층은 혼란을 틈타 국유재산을 사유화하고, 부패 카르텔을 형성해 '나라를 통째로 훔치는' 결과로 거부가 되었다. 남자가 내내 걷는 황량한 세르비아 시골의 풍경과 마침내 도착한 수도의 세련된 건물 풍경의 대비는 그런 현대사를 표현주의로 묘사한 듯하다.
 
2_3. 현대판 '시지프스의 신화'
 
"아버지의 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아버지의 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몇 개의 상징과 암시를 장치로 활용해 현대의 '시지프스' 신화처럼 단순한 원형질의 이야기를 극한의 감상이 가능하게끔 가공해낸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변덕스런 신들에게 불손하게 저항하던 인간 자유의지의 표상으로 후대에 전해진다. 하지만 이 현대의 시지프스는 관료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거대한 카르텔에 승산 없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저항자의 모델이다. 마치 시지프스에 더해 프로메테우스가 결합된 모양새다.
 
남자의 의지는 하지만 시지프스 신화의 결말이 그랬듯,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억지 해피엔딩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불러오지는 못한다. 영화를 지켜본 관객들이라면 실망스럽고 먹먹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선의와 연민들이 그의 여정이 위기에 봉착하는 순간마다 호출되는 풍경은 여럿 된다. 이중에서 특히 무정한 인간들에 대비되는 동물들과의 조우는 영화에 환상적인 순간들로 자리매김한다.
 
처음 남자가 만나는 떠돌이 개는 남자를 시험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남자는 제대로 여행 살림을 꾸리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우비조차 없어 비가 오면 나무 둥치건 폐가건 찾아들어 비를 피해야 할 신세다. 그런 그가 문 닫은 주유소에서 떠돌이 개에게 작은 자선을 베풀고, 개의 비극을 슬퍼하는 시간은 마치 변장한 신의 시험처럼 그에게 부족하나마 필요할 때 다가오는 자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인간들이 덧씌운 부당한 누명과는 다르게 가족애가 투철한) 남자가 야산에서 피할 틈 없이 마주치던 아찔한 순간, 늑대 무리는 길을 비켜주고 물러서는 작은 기적을 선보인다. 남자의 처지를 동정해서일까, 혹은 자신들과 같이 굶주려도 가족을 챙기는 동류라는 걸 인정해준 것일까? 감독의 설정은 알 수 없지만 환상성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손꼽을 만 하다.
 
2_4. '분노의 포도'와 '기생충' 사이에서
 
또한 니콜라에게 소박한 도움을 주는 (인간)존재들이 누구인지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정말 조금 뿐이지만) 필수적인 도움이나 조언을 행하는 이들은 같은 해고노동자이거나 편의점 직원, 이름 모를 시민들이다. 모두 형편이 넉넉하지 않거나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 그렇기에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간직해 약소하나마 도움을 베푸는 것일 테다. 존 스타인벡의 고전 <분노의 포도>에서 인상 깊게 묘사되던 순간들, 빈자가 빈자를 돕는 희생과 자선의 기운이 <아버지의 길>에서 드문드문하지만 정말 절박한 순간에 재현되곤 한다. 이들만이 정말 대가 없이 남자를 도우려는 유일한 집단들에 속한다.
 
그리고 공적 체계에서 그의 사정을 그나마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최단거리인 고속도로는 하지만 남자의 접근을 불허한다. 물류와 재화는 뻥 뚫리고 잘 정돈된 고속도로로 씽씽 달릴 수 있지만, 남자에겐 금지된 통로다. 급히 출동해 벌금을 물리려던 지방경찰은 하지만 남자의 신세를 듣고 측은히 여겼는지 길을 알려주고 안전한 곳에 내려준다. 그리고 야산을 헤매다 굶주리고 지친 남자가 쓰러져 실려 온 동네병원 역시 그에게 필요했던 약간의 휴식과 보급을 담당하며 (과거 무상의료 시절의 희미한 잔향처럼) 잔존한 무상의료 체계 또한 온전하진 않지만 남자를 조력하는 셈이다.
 
반면에 그의 눈에 비친 복지부의 공무원들과 부유한 도시청년들은, 충분히 나눌 수 있거나 혹은 그들이 마땅히 수행해야할 역할조차 맡지 않는 도덕적 해이를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주의에서 관료주의만 남고, 자본주의에서 배금주의만 가져온 듯 이런 장면들은 소리를 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현재 자국에 대한 비판의식을 엿보게 만든다(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길>은 자국 정치인들에게 혹평 일색이라 전한다). 1990년대의 발칸반도를 직접 체험한 세대가 감독으로 성장해 선보이는 구체제에 대한 향수와 영화 속 배경 묘사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별도의 해석과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하지만 영화는 노골적으로 1990년대 이전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이후의 전쟁과 자본주의 체제를 대비시키거나, 빈자 vs 부자의 도식적 계급갈등을 축으로 삼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며 지원해주는 이들 중에는 (의도는 어쨌든) 고위 관료나 언론방송계, 이른바 상위 클래스들도 존재한다. 물론 한계가 빤하지만 그래도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경우도 엄연히 보여준다. '가진 자'들이라 해서 무조건 악인으로 도식화하지 않는다.
 
반면에 같이 빈곤한 신세임에도 가난 때문에 타락하거나 '야만' 단계로 추락해버린 존재들도 세세하게 묘사된다. 남자가 길 위에서 하룻밤 노숙할 때 그의 보잘것없는 짐을 노리는 마을의 부랑자들이나, 그가 고향에 귀환했을 때 겪게 되는 동네 주민들의 이기적 행태들은 황망한 상황을 조성하곤 한다. 이런 묘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블랙코미디로 잘 묘사되어 찬사를 받은 부분이기도 하다.
 
3_1. 사회비판보다는 인간 존엄성을 묻다
 
또한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자가 빵을 쪼개는 순간들을 빼놓을 수 없겠다. 국교에 가까운 정교회 지역인 세르비아의 특성과 맞물려 빵을 손으로 쪼개는 행위의 반복은 '아버지-예언자-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니콜라는 그저 마른 빵과 물이 든 플라스틱 병, 얇은 모포 한 장에 의지해 도보론 누구도 갈 수 없다며 만류하는 길을 걷는다. 그런 처지에서 자기 먹기에도 모자란 빵조각을 나눌 때, 남자 자신은 물론 관객들도 저러다 어쩌느냐며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을 테다. 그가 가진 빵과 물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남자를 지탱할 만큼은 결코 떨어지지 않고 최후의 순간엔 어디선가 사막에서 찾아내는 만나처럼 그의 가방에 채워지곤 한다.
 
특히나 겨우 도착한 베오그라드의 복지부 청사에서 외면당한 채 장대비가 쏟아지는 건물 구석에서 시위라 하기에도 초라한 행색으로 모포 한 장으로 비를 피하던 남자에게 이름 모를 이가 전해준 따뜻한 음식 꾸러미 장면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그가 누군가의 후의에 숨겨오던 격정을 토해내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언론을 의식한 정부 고위 관계자의 후의보다 남자에겐 그의 일생에서 기억에 남을 순간일 테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할리우드 무비가 아니다. 이제는 좀 모든 게 해결될 것 마냥 남자나 관객이나 기대할 법한 후반부는, 달콤한 마약 같은 승리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영화를 보고 관객이 목격할 좌절과 무력감 앞에서 남자는 다시 마른 빵을 뜯어서 우적우적 씹는다. 황금만능 자본주의와 부패한 관료주의 카르텔은 남자가 감당하기엔 터무니없이 엄청나게 강력하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도 신이 있고 도리가 있다면, 인간으로서 지켜내야 할 것을 사수하기 위해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듯 남자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3_2. 오랜만에 만난 '예술로서의 영화'
 
<아버지의 길>은 아주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결말까지 한 문단으로 요약하는 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신기할 만큼 해몽이 스펙트럼을 그리며 가지를 뻗어나간다. 그런 잔상은 일정 시간이 지날수록 더 두터워진다. 관객 각자가 가진 경험과 지식에 따라 이 영화는 다양한 해석을 펼쳐나갈 캔버스처럼 활용된다.
 
누군가는 영화에서 주인공 남자의 험난한 여정을 보고 그리스도의 광야에서의 수난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겪는 대접에 관해서는 <반지의 제왕>과 <호빗> 연작들에서 빌보와 프로도 배긴스가 긴 여행 끝에 샤이어로 귀환하던 날 겪었던 풍경을 떠올릴 법하다. 물론 아주 차갑고 건조한 버전으로. 물론 (가장 많을법한) 켄 로치의 몇몇 영화의 배경과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 곳곳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떠올릴 테다.
 
<아버지의 길>은 많은 부분에서 켄 로치와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이 떠오르지만, 영화의 색깔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은 주연배우 고란 보그단의 연기는 그들과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두 거장의 사회적 리얼리즘 지향 비전문배우 기용 스타일이 아니라 철저하게 연극적으로 계산된 '메소드' 타입 연기를 선보이려 20kg를 감량해 깡마른 체구와 주름진 표정으로 무언의 대사를 전달하는 그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은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가 될 테다.

그런 미세한 차이를 변별해내는 것도 감상 관련 작은 재미다. 거기에 주인공을 괴롭히는 실체적 '빌런'으로 세르비아의 국민배우이자 <쿠오바디스 아이다>에서 보스니아의 '인간백정' 세르비아계 군벌 지도자를 맡았던 보리스 이사코비치가 거대한 '악의 얼굴'을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세심한 요소가 맞물려 드라이하고 미니멀하지만 무게와 울림이 있는 작가주의 영화를 만나게 되는 건 영화를 보는 행위에 있어 색다른 체험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작품정보>
 
아버지의 길 Father, Otac
2020|세르비아, 프랑스, 독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드라마
2021.09.30. 개봉|120분|12세 관람가
감독 슬로단 고르보비치
주연 고란 보그단
출연 보리스 이사코비치, 나다 사르긴, 니콜라 라코체비치, 밀란 마리츠
수입 전주국제영화제
배급 (주)엣나인필름
 
2020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관객상,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 파노라마
2020 FEST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페데오라 심사위원상/스텔라 아르투아상
2020 캘거리국제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2021 클리블랜드국제영화제 명예언급-중앙, 동유럽경쟁
2021 트리에스테영화제 장편영화 관객상, CEI상
2021 더블린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2021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아버지의 길 슬로단 고르보비치 고란 보그단 보리스 이사코비치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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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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