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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영 씨는 남은 삶을 '한빛 엄마'로 살겠다고 한다. 늘 들고 다니는 책은 김혜영 씨에게는 곧 한빛이기도 하다.
 김혜영 씨는 남은 삶을 "한빛 엄마"로 살겠다고 한다. 늘 들고 다니는 책은 김혜영 씨에게는 곧 한빛이기도 하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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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나기로 한 분은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후마니타스)라는 책을 펴낸 김혜영씨다. 그는 40년 동안 국어 교사로 일하다 지난해 여름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노후가 보장된 안정된 삶을 이어오다 퇴직을 몇 해 앞두고 아들을 떠나보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한빛. 
   
CJ ENM은 아홉 달 동안 이곳을 드나들며 멋진 피디(PD)를 꿈꾸었을 이한빛 피디가 일하던 곳이다. 그는 2016년 1월에 tvN에 입사하였으나, 그해 10월 26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는 어떤 청년이었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는 왜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을까?

'한빛 엄마' 김혜영씨는 그토록 자랑하고 싶던 아들을 잃고는, 내가 잘못 키웠나 자책도 하고 슬픔을 꾹꾹 누른 채 때로는 통곡을 하며 아들의 흔적을 따라갔다. 그렇게 3년 동안 쓴 글은 고(故) 이한빛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에 순응적이던 평범한 엄마 김혜영을 '한빛 엄마' 김혜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도 했다.

부질없는데도 버릴 수는 없고

지난 8월 4일,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빛센터가 위탁 운영하는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이기도 하다. 한빛센터는 고 이한빛 피디의 유지를 이어받아 설립된 단체로, 방송사 및 미디어 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및 취약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 증진, 낡은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해 일한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곳은 한빛센터가 위탁운영하는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이기도 하다. 한빛센터는 고 이한빛 PD의 유지를 이어 받아 설립된 단체로, 방송사 및 미디어 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및 취약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 증진, 낡은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해 일한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곳은 한빛센터가 위탁운영하는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이기도 하다. 한빛센터는 고 이한빛 PD의 유지를 이어 받아 설립된 단체로, 방송사 및 미디어 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및 취약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 증진, 낡은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해 일한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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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씨를 만나, 먼저 어떻게 지내시는지 여쭸다.

"퇴직하고 딱히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충남 도고에 있는 집으로 갔어요. 7년쯤 전에, 퇴직하면 살 계획으로 마련한 집이죠. 오늘 오면서 아들이 잠들어 있는 의정부 성당에 들렀다 왔지요. 늘 서울에 오면 아들 먼저 보고 일을 봐요."

"한빛씨 흔적이 있는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많이 울었죠.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부모님 돌아가실 때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는 걸 알았어요. 나도 언제까지 살지 모르고요.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한빛이 짐은 도고 집에 다 있어요.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버릴 수는 없고, 참 그래요."


김혜영씨는 퇴임을 1년 반 앞두고 고양시로 교장 발령이 났다고 한다. 한빛과 살았던 집을 떠나고 싶었는데, 핑계가 생겼다. 더구나 교사로서 마지막을 학교 가까이에서 차분히 정리하고도 싶었다고 한다. 한빛의 흔적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남편을 설득하여 2019년 초에 고양시에서 2년을 살았다.

막상 퇴임하고 나니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 도고의 시골집으로 갔다. 조용한 시골에서 틈틈이 텃밭 농사도 지으며 산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용해도 슬프고 바빠도 슬픈 마음은 쉬 사그라지지 않는다며 또 울컥하신다.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처음부터 국어 교사가 되고 싶으셨어요?"

"어려서 꿈이 교사였어요.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아버지가 교사여선지 직업이 다양한지도 몰랐어요. 교사뿐인 줄 알았죠. 섬마을 교사 같은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었죠."


한빛씨 얘기를 하면 더 가라앉을까 봐 이쯤에서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어떻게 해서 교사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김혜영씨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많은 이들에게서 존경받은 분인 듯하다.

검소하면서도 7남매(딸 여섯, 아들 하나)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했다고 한다. 물건을 사도 7개를 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빠듯한 교사 월급에 쉽지 않았을 듯하다. 김혜영씨 말처럼 "엄마는 좀 힘들었"을 정도로, 가끔 이웃집에서 쌀을 빌린 때도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김혜영씨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고 재우기까지 할 정도였다.

60~70년대 어렵던 시절이니 이해가 되면서도 어머니를 비롯해 식구들이 힘들었겠다 싶다. 교육자로서 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들이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힘썼다고 하니, 남다른 교육 철학을 지녔으며 아이들을 향한 관심 또한 깊었다.

아버지가 퇴임할 때 첫째 한빛이 태어났는데, 줄곧 아버지께서 한빛을 돌봐 주셨다고 한다. 유치원 등하원도 도맡아 하고, 좀 더 자라서는 거의 날마다 근처 학교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 놀게 했단다. 아버지의 교육 철학이 담긴 돌봄이었을 테다. 교사로서 부모로서 보여 준 아버지의 모습이 교사로서 엄마로서 김혜영을 있게 했다고 한다. 김혜영씨도 두 아들을 될수록 동등하게 대하고, 믿고 존중해 주려고 했다.

교사가 되고 나서도 열정 넘치게 일해 왔다. 국어 교사로서 갖춰야 할 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배우고 익혀 수업에 적용하려 애썼다. 교사 일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학생들 진학에서도 두드러진 결과가 나와 학교에서도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삶이었다.

교사가 되고 3년쯤 뒤에는 교육대학원을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배우기도 했다. 고3을 맡았을 때는 대학을 많이 보내 관리자들도 최고로 여겨 주었다. 끝내주는 김혜영, 괜찮은 교사. 이런 칭찬에 취해 스스로를 최고로 알던 시기였다. 교사에게 철학이 있어야 되는지도 몰랐고 열심히 가르치면 그게 교사인 줄 알았다고 한다.

남편도 국어 교사로 일하다 퇴임했는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났을까?

"저는 포천에서 국어 교사를 했는데, 흥사단 교육문화연구회에서 사물놀인가를 가르친대요. 이것도 국어 수업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갔죠. 그때 남편이 거기 모둠장이었어요."

"거기서 만났군요."

"그때 제가 29살 끝 무렵인데 당시로선 노처녀(?)였죠. 남편도 나이가 좀 있고 하니까 옆에서 사람들이 둘 사이를 부추긴 면도 있었고요."

"그래도 끌리는 면이 있으니까 결혼했겠죠?"

"되게 존경스러웠어요. 사랑도 했는데 존경했죠. 제가 볼 땐 정말 의식 있는 교사였어요. 같은 국어 교산데 내 자식이라면 저 사람한테 국어 배우는 게 낫겠다 생각했죠. 공부는 지식만으로 안 되고 가치관을 심어 줘야 하는데, 한빛 아빠는 저랑 달랐어요. 임용고시로 공부만 잘해서 교사 되는 게 좋은 게 아니에요."


과거 촌지를 받고 매를 들던 교사였던 그는 촌지를 안 받고 매를 내려놓으며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다. 남편과 전교조를 만나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남편이 육아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고 들었어요."

"그니까요. 남편이 '애는 여자가 낳지만 육아는 남편 몫'이래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애는 엄마가 키우는 거 아냐?' 했지요.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저러나 보다 했죠."

"전혀 안 그래요! ㅎㅎ"


남편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가난한 만큼 복잡한 집안 사정도 있었을 테고. 그런 남편에게 교사 김혜영은 큰 복으로 비쳤나 보다. 물론 남편이 전교조 해직 교사가 되고, 잦은 모임 등으로 미안한 마음을 육아로, 집안일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책에도 남편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래서인지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을 교사가 보고 부모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쓰기도 했다. 육아를 분담하는 남편 이야기나 교사로서 부모로서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그대로 드러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목을 보고 하는 얘기일 테다.

내 아들인데 어떻게 기억이 자꾸만 희미해질까

이쯤에서 책 얘기를 꺼냈다. 책은 어떻게 내게 되었을까? 아니, 글을 왜 썼을까? 짐작이 되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아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글을 썼다. 글은 아들과 아들이 꿈꾼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기도 하고 김혜영 씨를 치유해주기도 했다. 글쓰기를 통해 그는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 책 판매로 들어오는 인세는 모두 한빛센터 운영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아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글을 썼다. 글은 아들과 아들이 꿈꾼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기도 하고 김혜영 씨를 치유해주기도 했다. 글쓰기를 통해 그는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 책 판매로 들어오는 인세는 모두 한빛센터 운영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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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센터 홈페이지에 쓸 생각은 없었고 그냥 일기를 썼어요. 한빛이 너무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기억이 딱 스물일곱으로 멈춰요. 이랬는데 저랬는데 하며 자꾸 과거로만 말하는 거예요, 제가. 더 무서운 건 정말 보고 싶고 그리운데도 자꾸 기억이 희미해져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내 아들인데! 안 되겠다 싶어서 일기를 썼죠. 그러다 홈페이지에 꼭지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한빛 얘기를 아무나 쓸 수 있게 해 달라고요."

그렇게 희미해져 가는 한빛의 기억을 꾸역꾸역 붙잡아 가며 글을 썼다. 함께했던 기억, 한빛이 달아 준 세월호 리본, 남겨 둔 한빛 일기장과 SNS 글을 보며 한빛을 알아 갔다.

한빛과 연결이 된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다 담아냈다. 남편 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동생 한솔이를 비롯해 모든 걸. 한 편씩 쓰면서 솟구치는 슬픔을 쏟아 내기도 하고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빛이 꿈꾸던 세상을 알아 가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하게 되었다.

그 힘으로 또 다른 한빛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서투르지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고(故) 이선호씨의 아버지도 만나고 고(故) 김용균씨 어머니도 만났다. 연대의 손을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흔들리고 포기하고 싶고 두렵기도 했던 김혜영씨를 여기까지 오게 한 데는 아무래도 '청년유니온(youthunion.co.kr)'이 큰 역할을 했지 싶다. 이한빛 피디의 죽음을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이 시대 청년의 문제로 인식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가장 앞장선 단체이기도 하다.

다들 대기업에 맞서 싸우기를 망설일 때도 주저하지 않고 대책위원회를 꾸려 사건을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끝내는 CJ ENM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헌신 덕에 보상금을 비롯한 기금과 후원금을 디딤돌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생겨났다. '한빛이 머물다 간 시간을 명예롭게 해 준' 청년들의 헌신을 그래서 김혜영씨는 결코 잊지 못한다고 했다.
   
 고 이한빛 PD에 대한 시민들의 후원금과 tvN 위로금으로 가족들은 한빛센터를 세웠다. 어려운 형편으로 활동하는 이곳에 많은 분들이 힘을 보태면 좋겠다.
 고 이한빛 PD에 대한 시민들의 후원금과 tvN 위로금으로 가족들은 한빛센터를 세웠다. 어려운 형편으로 활동하는 이곳에 많은 분들이 힘을 보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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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힘을 얻어

김혜영씨가 쓴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에는 가슴 아프고 뭉클한 슬픔만 담기지 않았다. 더 못해 줘서, 못다 한 얘기가 많아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의 부끄러운 민낯도 드러내는 용기와 성찰을 엿볼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서서히 변해 가는 김혜영씨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글쓰기가 가져다준 변화와 책이 나오고 나서 찾아온 변화도 있었으리라 싶다.

"글을 쓰면서 감정이 정리가 된다든가 하는 변화도 있었을 듯한데요."

"자꾸 쓰니까 잊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무엇보다 제가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더라고요.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덜어지고 정리가 되기도 하고요."

"……."

"학교에서 줄곧 국어를 가르치면서 느낀 점을 얘기하고 '이 얘기는 중요해' 이렇게 말로는 그랬는데, 글이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다는 사실을 퇴직하고 알게 된 거예요. 글쓰기가 이렇게 대단하구나를 몸으로 깨달았죠. <작은책>도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정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솔직하게 드러내며 글을 썼기에 더욱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자신은 쏙 빠진 채 그럴싸한 말로 그럴싸한 주장을 하는 공허한 글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다 보면 김혜영씨는 뒤늦게 아들 한빛의 흔적과 일기, SNS들을 보면서 흐릿해진 아들의 윤곽에 살을 보태고 명암을 보태는 듯했다. 나를 비롯해 누구나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그에게 한빛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 존재일까?

"참 잘 살았구나, 아름답게 살았구나 싶은 거예요. 한빛과 같은 삶을 산 청년도 있었다 말하고 싶었어요. 물론 100퍼센트 괜찮은 아이는 아니죠. 까칠한 모습도 있을 테고... 제가 미안한 게 많아서인지 좋은 기억만 생각나더라고요."

책이 나오고 겪은 변화나 새로운 경험도 많았을 듯싶다. 여기저기서 북 토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을 테고, 무엇보다 책으로 한빛을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한 감정이 일지 않았을까.

"제가 한빛한테서 받은 게 너무 많더라고요. 떠난 다음에 보니까. 너무 많은 걸 주고 갔어요. 아름다운 청년이었고 열심히 잘 살았구나 싶고 약자 배려하는 애였구나도 알았죠. 이젠 청년들이 절망하지 않고 죽지 않게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제 김혜영씨는 한빛이 남긴 과제를 대신하겠다고 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한빛을 기억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의식(儀式)이었다. 그렇게 의식을 치르듯이 썼다고 한다. '의식'이라는 말은 한빛이 김혜영씨 가방에 세월호 리본을 달아 주며 한 말이기도 했다. 리본은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이 시대 청년들의 죽음이 결코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죽음임을 깨달았기에 김혜영씨는 힘이 닿는 한 어디든지 찾아가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세월호 부모들, 고 김용균 어머니, 고 이선호 아버지 등. 그 손길은 이한빛 피디가 해 오던 연대이기도 하고, 청년유니온을 비롯한 단체들이 내민 연대이며, 책이 나온 뒤 많은 이들이 책을 알리고 김혜영씨를 모신 연대이기도 할 테다.

학교에서 이윤보다 생명이 앞선다고 가르쳤더라면

아침에 출근을 했지만 영영 퇴근을 못 하는 사람이 하루에 7~8명이라고 한다. 이윤보다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문화가 자리 잡혔다면 이렇게 일하다 죽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김혜영씨는 그래서 교직에 있을 때 노동 교육을 제대로 못 한 점을 크게 아쉬워하였다.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거의 다 노동자가 돼요. 근데 애들이 노동자로서 당당함이 없어요. 힘들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다들 노동 교육을 받았다면, '이거 잘못된 거 아냐?' 하며 나섰을 테죠. 옆에 그런 동료도 없고 노조도 없으니까, 절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 않았나 싶고. 안타까워요."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생명보다 이윤이 먼저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 결과로 자살, 재해 사망, 교통사고 사망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이게 선진국의 모습일까,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사람 아닌 생명도 소중히 여겼다면 코로나19도 기후 재난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대비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적어도 한빛센터를 통해 방송/미디어 노동자들이, 청년들이 절망하지 않고 기댈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살맛 나는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청년 이한빛, 그는

이한빛 피디는 2016년 CJ ENM에 입사해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하다 업무 과중과 비정규직 해고 담당 등 부당한 업무 강요, 인격 모독 등을 고발하며 스물일곱 살 생을 마감했다. CJ ENM은 이한빛 피디의 근태 불량을 주장했다.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방송 제작 환경의 부당행위가 드러났고, CJ ENM은 공식 사과와 함께 책임자 징계,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이후 시민들의 성금과 후원, 기부금 등이 모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설립되었다. 한빛센터는 이한빛 피디의 유지를 이어받아 방송사 및 미디어 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및 취약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 증진, 낡은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해 일한다.

 
 고 이한빛 PD. 그는 그토록 경멸했던 삶을 살아야 했던 상황을 온몸으로 맟선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카메라 뒤에도 사람이 있다고 외쳤다.
 고 이한빛 PD. 그는 그토록 경멸했던 삶을 살아야 했던 상황을 온몸으로 맟선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카메라 뒤에도 사람이 있다고 외쳤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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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작은책에도 실립니다.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 먼저 떠난 아들에게 보내는 약속의 말들

김혜영 (지은이), 후마니타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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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러운 일을 한다. 책을 만들고 초중등 친구들과 토론을 한다. 내 손으로 하는 텃밭, 목공, 바느질, 뜨개, 수제맥주, 자전거정비 등을 좋아한다. 리페어 '공방책방'을 만들 꿈을 꾼다. 잡지 <작은책> 편집위원이며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소식지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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