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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는 단골 한의원은 좀 소란스러운 곳이다. 한의사 선생이 환자들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하기 때문인데, 그는 아픈 곳에 대한 상담뿐 아니라 환자들의 근황도 잊지 않고 나누곤 한다. 처음엔 '이거 좀 시끄러운 거 아닌가' 했는데, 한의사 선생이 환자들과 나누는 얘기를 듣다 보면(진료 공간이 칸막이로 되어있는 한의원의 특성상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린다), 잡담처럼 느껴지는 그 대화가 선생의 치료라는 걸 알게 된다.

진료라 하면 보통 2, 3분 안에 의사 얼굴 보고 몇 마디 나누는 게 끝인 한국 의료 현실에서, 그리 자상하게 고통을 물어주는 의사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늙어 가며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거나 살다 힘든 상황에 처해질 때면, 그 상실이나 고통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응해주는 누군가가 고맙고 반갑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것이 바로 치료의 시작일 테니 말이다.

환자와의 소통으로 조금 소란한 이 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는 권해진 선생이다. 그의 한의원은 파주 교하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쪽에 갔다 허리 아파 침 맞으러 우연히 들른 게 인연이 되어 단골이 되었다. 사는 곳과 좀 떨어진 접근성을 생각하면 우정 그곳을 단골로 삼을 이유는 없지만, 어쩌다 보니 가족 모두 치료받는 한의원이 되었다. 그냥 마음이 편해서 가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펴낸 책을 읽다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책 읽고 글 쓰는 한의사
 
책 <우리 동네 한의사>
 책 <우리 동네 한의사>
ⓒ 보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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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진료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 눈을 잡아 끈 건 빽빽이 꽂혀 있는 책 들이었다. 통증을 자세히 묻는 선생의 진료 중에도 내 눈은 줄곧 책을 훑고 있었다. 한의원이니 한의학에 관한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관련 서적이 아닌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보니, 진료는 뒷전이고 책들을 보느라 한눈을 팔게 되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의 병적인 증상이랄 수 있겠다.

훑어보던 책 중에서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좋아했던 책을 찾고는, '아 저 책이 있네', 읽고 싶던 책을 발견하고는 '아 저 책이 있네' 했다. 진료실에 책 있는 게 뭐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워낙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다 보니, 책이 그득한 장소나 책을 탐독할 거로 추정되는 이를 만나면 반가움에 혼자 달뜨곤 한다.

첫 진료 때 혼자 반가워서, '아 이분은 책을 읽는 사람이구나' 했던 마음은 더 반가운 일로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책 읽는 한의사 권해진 선생이 쓴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의원 접수대에 노란 한지로 곱게 싸여 있는 그의 책을 첫 구매자이자 독자가 되어 받아 든다. 인터넷 주문하면 하루고 이틀이고 기다려야 할 판이라, 얼른 읽고 싶은 마음에 현장 구매, 서둘러 집에 와 책을 펴든다.

그의 책 갈피갈피에 꽂혀 있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느 땐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어느 땐 눈물을 그렁하게도 한다. 그가 병 자체만이 아니라 환자의 환경과 역사를 함께 들여다보며 환자를 만나는 까닭은, 병을 환자와 떼놓고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며 공존해야 할 동반자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뻔한 진료 기록으로 흐를 수 있을 의료 에세이가 태만으로 빠지지 않은 것은, 그가 환자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심의 시간을 엮은 책 <우리 동네 한의사>는 몸의 고통 앞에 놓인 환자들에 대한 진료 기록이면서 그들의 마음을 보듬은 치료 관통기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책의 부제가 '마음까지 살펴드립니다'인 건 무척 적절하다.

마음을 살펴주는 동네 명의들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하고 무릎 치료를 받느라 한의원을 자주 가게 되었다. 어쩌다 치료받으러 갈 때도 종아리가 아파 치료받은 일 있는 내 딸의 안부를 꼭 묻곤 하는데, 별일 아닌 듯하지만 환자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보존하고 있지 않는 한 쉬운 일이 아니다. 직업윤리가 투철하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고, 이것만으로도 훌륭하달 수 있겠지만, 그의 세심함은 그 너머에 머문다. 그를 찾는 환자들이 그에게서 몸뿐 아니라, 마음의 보살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서 우리 삶의 언저리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료라는 의사의 경험으로 풀고 있다. 그의 기록을 읽다가, 내 부모, 형제, 친구, 이웃의 얘기를 만나게 되는 이유다. 노년의 시간을 보내며 아픈 몸을 서로 걱정하며 한의원을 찾는 노부부의 얘기에서는 내 부모 혹은 곧 도래할 노년의 자신을, 가족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이 아플 때는 치료 시기를 놓치고 낭패를 보는 여성에게선 지친 K-장녀의 모습을, 의료 수급으로 진료받는 게 눈치 보여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에선 사회의 무책임으로 상처받는 유년을 목도하게 된다.

그가 성공적으로 완치한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전시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환자들의 면면을 고민하고 그들의 고통을 다룬 것은, 병의 치료가 환자가 처한 환경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 약자의 아픔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의사의 글은 영리 의료로 혼탁해진 한국 의료의 위기를 알리는 탄광 속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진료가 이렇게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것은 지독히 불행한 일이지만,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형형하다.

버스조차 거의 다니지 않는 강원도 외진 곳의 건강 약자(주로 노인들)를 찾아가 온기 있는 진료를 전하는 강원도 왕진 의사 양창모의 글엔, "몸이 감옥이 된" 아픈 사람들의 진료에 꼭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마음 돌봄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오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외딴곳에 거의 유폐되다시피 사는 환자들에겐 자신을 보살피러 오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유의 몫을 해낸다.

아픈 이웃을 찾아다니는 의사 홍종원의 글엔, 의료 제도의 공백으로 고통받는 환자에 대한 무력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진심이 스며있다. 빈곤한 살림살이만큼이나 오래 묵힌 고통으로 속수무책인 환자들에게 방문 진료의 의미는 남다르다. 완쾌는 고사하고 당장의 위급함이나 당분간을 지탱시키는 조치일 뿐이라도, 마른 바닥에 들어오는 물만큼이나 절실하다.

우정 값싼 커피를 타 내와 바쁜 의사를 주저앉혀 커피를 마시게 하는 환자에게선 사람과의 접촉에 목마른 외로움을 간파한다. 그런 환자의 마음을 살피고 내온 커피를 다 마시고야 일어나는 것은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잠깐의 담소가 환자의 마음을 싸매주는 또 하나의 치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의료 조합으로 의원을 운영하며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도'를 활용해 밖에 나갈 수 없는 동네 환자들을 왕진하는 의사 추혜인의 글에선, 환자와의 연결감이 곧 치료임을 믿는 신념이 짙게 느껴진다. 환자를 단지 돈벌이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 끊임없이 성찰하는 과정이 글을 단단히 받쳐주며 읽는 이에게 힘을 준다.

하지만 신념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늘 단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개 의사의 힘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의료 부정의를 맞닥뜨리며 때로 좌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기다리거나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진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환자를 구하는 일이 병든 사회를 구원하는 길로 나가는 그들의 유일한 통로일 테니.

마음까지 살펴 주는 동네 한의사 권해진 역시 그 통로에 서 있다. 그는 진료 경험을 통해 생활 속 무심한 습관이 누적시킨 고통이나 불안정한 상황으로 빚어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위기를 찬찬히 돌아보게 해준다. 고통에 귀 기울이면 완전히 나을 수는 없어도 덜 아플 수는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환자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이 의사의 본령이지만 이런 의사를 만나는 일은 이미 행운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병원을 쇼핑하듯 찾아다니며 명의를 구한들 진심이 빠져나간 진료로 얼마나 병을 잘 돌볼 수 있을까. 단골 환자와의 헤어짐을 '애별이고(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라며 아파하는 동네 한의사 권해진의 진심 의술이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우리 동네 한의사 - 마음까지 살펴드립니다

권해진 (지은이), 보리(2021)


태그:#<우리 동네 한의사>, #권해진 , #돌봄 의료 , #고통, #왕진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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