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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아버지 손문과 대한민국의 아버지 신규식
 중국의 아버지 손문과 대한민국의 아버지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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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이 국무총리대리에 이어 외교부장을 겸직하며 임시정부를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을 즈음 결코 놓칠 수 없는 두 가지 큰 외교현안이 대두되었다.

하나는 미국 하딩 대통령이 해군군비축소문제와 태평양지역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일명 워싱턴회의)에 대비하여 상하이에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이승만ㆍ서재필 등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케 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쑨원에 의해 광동에서 출범한 중국의 호법정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을 요청키로 하였다. 그는 외무총장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누구보다 쑨원 총통과 호법정부 요인들을 잘 알고 있기에 직접 나서기로 하였다. 호법정부란 신해혁명 당시 입헌공화제의 약법(헌법)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이때까지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아직 임시대통령의 신분이어서 이와 관련 서한을 보낸 것이다. 

광동정부를 내용으로 승인하야 아국정부와 인연을 결(結)하여 각계 요인으로 접합연결하고 금방 태평양회의에 광동정부의 대표파견이 상금(尙今) 기점이오라 만일 파견케 되면 그 대표에게 예선 약속하야 아국문제를 회의에 제출케하고 진력방조케 하도록 하기 위함. (주석 7)

신규식은 광동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대리 외무총장 신규식'의 명의로 중국의 각계 지도자들에게 태평양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과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야 할 근거를 제시하고, 같은 명의로 일본의 각 법률단체에 통고서를 보냈다. 「통고서」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를 욕심낸 나라는 귀국이다. 지금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본국에서는 대회에 대표를 파견하려 한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출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귀국의 자구책 가운데 상책이다. 발칸문제 때문에 유럽전쟁이 일어났듯이 지금 귀국의 지위가 바로 서방의 발칸 사정과 똑같다. 

때문에 동아전쟁이 일단 발동되면 귀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참여할 것이 조금도 의심되지 않는다. 본국 문제가 토의될 것을 희망하며 귀 정부를 재촉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귀국을 위한 자구책이며 양국을 위한 일이다. (주석 8)

 
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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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작업'을 마친 그는 9월 말 민필호를 대동하고 홍콩을 거쳐 호법정부의 수도 윈남(雲南)에 도착,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이때 윈남강무당(군관학교)에 한인 학생들을 교육시키기로  약조하고, 이후 약속대로 50여 명을 졸업시킴으로써 우리 독립군(광복군) 양성에 기여했다.

10월 초에 신규식은 비상총통부를 방문하여 쑨원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호혜조약 오관(五款)」을 제시하였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호법정부(護法政府)를 중국 정통의 정부로 승인함.
    아울러 그 원수(元首)와 국권을 존중함.
2) 대중화민국(大中華民國) 호법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함.
3) 한국 학생의 중화민국 군관학교(軍官學校)에 수용 허가를 요청함.
4) 차관 5백 만 원을 요청함.
5) 조차지대(租借地帶)를 허락하여 한국독립군 양성에 도움이 되게 하기를 요청함. (주석 9)


그의 광동방문은 상하이 『민국일보』를 비롯하여 『광동군보』 『사민보』 등 중국신문에 크게 소개되고 호법정부 요인들은 국빈의 예를 다하여 그를 접대하였다. 그의 외교적 성과는 컸다. 당장의 임시정부 승인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승인의 효과와 다르지 않았다. 그밖에도 이룬 것이 많았다.

그 첫째 이유는 비록 '정부승인'은 아닐지라도 이를 찬성하는 쑨원의 의지가 광동국회에서 '한국독립승인안'을 상정하고 통과시켰다는 점이다. 둘째 이유는 신규식이 쑨원에게서 공식적인 외교관계 성립을 상징하는 공식접견의 기회를 받아냈다는 점이다. 

마침 10월 10일 광저우 북교장(北較場)에서 열린 신해혁명 10주년 기념식에서 신규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정식 외교절차에 따라 대총통을 접견하는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2년 2월 외무부 외사국장 박찬익을 광동주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하여 외교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호법정부에 주차(駐箚)하는 동안 호법정부로부터 매월 광동 화폐인 호양(豪洋) 5백 원(元) 씩, 6개월에 걸쳐 원조를 받았다는 점이다. (주석 10)


주석
7> 『우남 이승만 문서』동문 편, 중앙일보사ㆍ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410쪽, 1998.
8>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518~519쪽, 1972.
9> 민필호, 「한중외교사화」, 『석린 민필호전』, 김준엽 엮음, 나남, 232쪽, 1995.
10> 김희곤, 앞의 책, 37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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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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