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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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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은 1919년 4월 30일부터 열린 제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지역의원으로 선임되고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은 손정도 목사였다. 1920년 3월까지 의정원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0년 7월 14일 부의장과 의원직을 모두 사퇴한다.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다. 건강이 다소 회복되면서 1920년 9월 법무총장이 되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국무총리 이승만의 선출과 관련 그의 위임통치론을 둘러싸고 이회영ㆍ신채호 등이 반대하고, 다시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직제가 바뀐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동휘 국무총리 사이의 갈등이 첨여하게 대립하였다. 일부 각료가 취임을 거부하거나 사퇴하면서 이동휘와 안창호도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이 1921년 5월 하와이로 떠나면서 신규식을 국무총리대리로 임명하였다. 난마와 같이 얽힌 임시정부의 수습이 그의 손에 맡겨졌다. 5월 20일 임시의정원 폐원식에서 그는 단합을 호소하였다. 

오날의 폐원식을 당하야 무삼 말로써 제위께 들일지 몰으겟소. 다만 당석(當席)에서 엇은 감상을 말하겠소. 제원(諸員)께서 이 간험(艱險)하고 분규(紛糾)한 시국에 입(立)하야 위난을 무릅쓰고 여일히 분려(奮勵)하였슴을 감사하고 흠앙(欽仰)하오. 기성(旣成)한 국가에서라도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이 일치(一致) 협화(協和)치 못하면 기(其) 권력을 상실할 것이오.

그런데 오날 우리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의 맥락이 잘 통하고 유지됨은 다 제위(諸位)의 협동하는 성력에서 출(出)함인 줄 아오. 우리의 압흐로 행할 바가 대단하고 요원(遙遠)하니 우리는 더욱 분려(奮勵) 하여야 될 줄 아오. 그리하면 저 왜적은 다 소탕될 지오. 설령 못 된다 가정할 지라도 적에게 한인의 기개를 보이는 동시 공포와 좌절을 줄 것이오, 따라 적에게 아부하는 자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오.

또한 앞으로 더욱 노력하고 분투하기를 의뢰하고 후망(厚望)하오. 그리하면 나는 비록 무력(無力) 무책(無策)하나마 성심으로 노력하는 이를 따라 돕겠소. 우리의 장래는 낙관과 활망(活望) 뿐이외다. (주석 5)

 
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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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임시정부를 어지럽혀 놓은 채 홀연히 상하이를 떠난 뒤 수습은 온전히 신규식의 몫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신규식은 이승만이 떠난 뒤, 혼돈 정국을 떠맡고 나섰을까.

이승만이 신규식을 2인자로 임명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뚜렷한 자료는 보이지 않지만, 상황만으로 본다면, 이승만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상하이에 도착한 뒤, 국무총리 이동휘가 의견과 노선대립으로 말미암아 가장 먼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결별하였고, 뒤를 이어 안창호가 정부에서 이탈하여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을 밀고 나갔다. 즉, 연해주와 미주 지역을 각각 배경으로 삼았던 대표적 인물 두 사람이 이승만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여기에다 이동휘의 후임으로 국무총리를 맡은 이동녕마저 체제 개혁을 들고 나와 이승만과 부딪히다가 퇴진하고 말았다. 이승만으로서는 이제 내각구성마저 힘들게 되었다. 

이승만에게는 연해주나 미주가 아닌 중국 현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상하이의 정서에 맞는 인물이 바람직했는데, 이에 적합한 인물이 바로 신규식이었다. (주석 6)


주석
5> 『독립신문』, 1921년 5월 25일.
6> 김희곤, 앞의 책, 35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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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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