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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 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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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 9년만인 1919년 3월 국내에서 폭발한 3ㆍ1혁명의 소식은 해외 망명가들에게 천국의 복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토록 참혹한 일제의 무단통치에서도 고국의 동포들이 기죽지 않고 궐기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을 주도하고 '대한독립선언'에 참여하는 한편 밀사를 국내에 보내 궐기를 촉구하는 등의 역할을 해왔던 신규식은 3ㆍ1혁명의 소식에 누구 못지않게 감격하고 동포들에게 감사하였다. 그리고 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이를 주도할 기관이 시급했던 것이다.

1919년 3월 하순 여운형ㆍ서병호ㆍ선우혁ㆍ김철 등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상의하였다. 국내에서 손정도ㆍ현순ㆍ최창식 등이, 일본에서 최근우ㆍ이광수 등이,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이동녕ㆍ이시영ㆍ김동삼ㆍ신채호ㆍ조성환ㆍ조소앙 등이, 미국에서 여운홍이 속속 상하이로 집결하였다.

예관은 밀려든 독립지사들을 한데 묶을 단체를 구상했다. 그래서 신석우와 여운형 등에게 상해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토록했다. 이 모임에서 회장에 신석우, 총무에 여운형이 선출되었고, 3백여 명의 교포가 모였다. 이어 비록 등사로나마 『아등의 소식』이라는 신문을 발행해서 배일선전과 한국독립을 외치게 됐다. (주석 1)

 
상해임시정부청사 입구의 골목. 허름한 골목길이 당시의 간난신고를 대변해 주고 있다.
▲ 상해임시정부청사 입구의 골목. 허름한 골목길이 당시의 간난신고를 대변해 주고 있다. 상해임시정부청사 입구의 골목. 허름한 골목길이 당시의 간난신고를 대변해 주고 있다.
ⓒ 류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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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상하이를 찾은 인사들은 하나같이 조국독립에 열정이 넘치는 애국지사들이었다. 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뜻을 모았다. 일부 인사들은 이념ㆍ출신ㆍ지역색 등을 이유로 당이나 위원회를 조직하여 모두 수용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나라가 망하고 정부가 없어진 이래 국민의 뜻은 독립정부의 수립이라는 데 다수 의견이 모아졌다.

예관은 박찬익ㆍ여운형ㆍ선우혁ㆍ서병호ㆍ한진교 등 청년 그룹과, 국내에서 온 현순ㆍ손정도 등과 함께 임시정부 조직에 관한 논의를 벌였다. 이 일은 원로격인 박은식ㆍ이시영ㆍ이동녕 등에게 이미 내락을 받아논 터였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예관이 부닥친 벽은 우리 동포들의 고질적인 파벌의식과 지방색과 불순한 출세욕이었다. 대다수의 독립지사들이 사심없이 임정 창립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마당에, 일부 인사들은 자파세력의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또 감투 하나를 얻어 쓰기 위해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별별 해괴한 짓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주석 2)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을 기해 수립을 선포하였다.

조각 명단은 국무총리 이승만, 외무총장 김규식,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 법무총장 이시영ㆍ교통총장 문창범이다. 신규식은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었지만, 왠일인지 그는 조각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그는 신경쇠약증으로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임시정부 수립에 그의 기여도를 보면 석연치 않는 일이다. 4월 23일 서울에서 발표된 한성정부에서 법무총장으로 선임된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상하이에 한국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예관 신규식(1880~1922)이다. 그 가운데서도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던 터전을 만들어낸 공은 거의 신규식의 몫이었다.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듬해 동제사를 결성한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이어서 신아동제사(1915)와 신한혁명당을 만들어 중국 혁명인사들과 힘을 합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추세를 지켜보면서 독립의 기회를 찾았다. 

이러한 신규식의 작업 모두가 중국 지역에 한국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를 다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더구나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은 근대국가를 건설한다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주석 3) 


그는 무관출신답게 권세나 명예욕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산모가 배제된 출산이었지만 임시정부 출범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한국 임시정부의 조직은 무수 선열(先烈)의 선혈(鮮血)의 관개(灌漑)로 된 것이요 삼천만 자유를 애호하는 한민족의 옹호로 이룬 것이요. 전 세계 정의를 숭상하는 인사의 동정으로 해서 된 것이며, 천만 번 불굴 불소하는 혁명지사의 추진으로 된 것이다.

다만 왜구의 매와 개가 국내에 널려 있어 정령(政令)을 순조롭게 시행하고 국권을 펼 수 없으니 형세 부득이 국외에 안전한 곳을 택해 정부를 설치하여, 정권을 안정하고 정령을 관철하는 길을 구하게 된 것이다…(중략)…국외 및 동북 등지에서 항왜(抗倭) 무장운동을 격동하고 여러 가지 직접 행동을 지도하여 왜국의 암흑통치를 전복하고 태극기를 거듭 경성에 휘날리게 하려는 것이다. (주석 4)


주석
1> 이이화, 앞의 책, 266쪽.
2> 앞과 같음.
3> 김희곤, 앞의 책, 353쪽.
4> 강영심, 앞의 책, 17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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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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