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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열사들의 투쟁 30주년을 맞아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각 열사의 추모행사와 함께 학술토론회와 다큐멘터리 제작 등이 준비되고 있다. 1991년 5월 투쟁 재조명 사업을 적극 후원하고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원영 상임이사가 1991년 5월 투쟁의 의미를 정리한 글을 보내왔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잊혀진 투쟁, 1991년 5월' 기획 시리즈를 마친다. [편집자말]
<1991, 봄> 영화 스틸컷
 <1991, 봄> 영화 스틸컷
ⓒ 인디플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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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은 신록이 우거지고 온갖 꽃들이 만개하면서 자연은 고운 자태를 뽐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 한반도의 역사에서 5월은 필자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또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는 계절이다.

1980년을 대학 입시의 중압감 속에서 보냈던 필자는 1981년 대학에 입학했다. 어렴풋이 소문으로 알고 있었던 1년 전 1980년 광주. 대학 1학년 때 대략적인 광주의 진상을 알게 되면서부터 필자에게 5월은 자연의 계절적 시간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시간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5월은 늘 투쟁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세진과 조성만, 조정식 등 함께 같은 공간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던 후배들의 죽음이 5월의 시간에 더해졌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필자에게 5월이란 광주항쟁, 한반도 평화와 같은 주제를 안고 열사들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민주화의 격랑 속에서 보냈던 청년 시절, 5월은 억압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앞서간 이들에 대한 미안함, 부채 의식과 죄책감이 뒤섞인 복잡하면서도 가슴 아린 그런 의미를 담은 시간이었다.

'유서대필사건' 그리고 김기춘과 강신욱과 곽상도

30년 전인 1991년 5월에는 이런 의미를 더욱 각인시켜주는 사건들이 있었다. 명지대 1학년 강경대의 죽음으로 시작된 그해 5월, 박승희, 김기설, 김영균, 윤용하, 김귀정 등 잊을 수 없는 죽음으로 필자 역시 거리에서 피와 눈물로 뒤범벅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해 5월을 떠올리면 이러한 죽음들과 더불어 한 젊은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노태우 정권이 '유서대필사건'이라 이름 붙였던 이 사건은 정권의 필요에 의해 한 청년의 인생이 철저하게 파탄 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었던 김기설이 열사들의 죽음에 대한 정권의 책임을 묻고, 민주화의 완성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했다. 노태우 정권은 그 죽음의 배후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매도하면서 김기설의 친구이자 전민련의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그를 체포, 구속했다. 법원은 목격자 등 직접적인 증거도 없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왜곡된 필적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강기훈에게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6년 뒤인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과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권고하면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났다. 2012년 대법원에서 재심이 개시되었으며, 사건 발생 24년 만인 2015년 5월 14일, 강기훈은 무죄가 확정되었다.

무죄가 확정되던 즈음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좀 미안하다고 한마디 정도 해주면 안 되나 하는 그런 개인적인 바람이 늘 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던 강기훈은 젊음을 온전히 빼앗겼던 그 긴 세월을 버텨낸 후 현재 간암 투병 중에 있다.

사건 당시 노태우 정권의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기춘은 이후 승승장구하여 15~17대 국회의원에 이어 박근혜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또 이 사건의 총지휘 부장검사이자 대검찰청 강력부장이었던 강신욱은 이후 대법관을 지냈으며,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수사 검사였던 곽상도는 박근혜 정권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후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에 이어 현재 국민의힘 소속의 재선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강기훈에게 사과한 사람은 없었다.
 
노태우 정권은 죽음의 배후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매도하면서 김기설의 친구이자 전민련의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그를 체포, 구속했다.
 노태우 정권은 죽음의 배후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매도하면서 김기설의 친구이자 전민련의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그를 체포, 구속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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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언론, 그리고 가짜 뉴스

'유서대필사건'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검찰의 문제이다. 검찰은 이 사건에서 정권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기획하고, 수사했고, 결과를 발표했다. 강기훈이 유서대필을 하지 않았다는 수많은 증거들은 검찰에 의해 무시되었고, 오직 검찰이 사실이라고 믿는, 아니 검찰의 기획에 따라 사실이 되어야 하는 것만을 모아 강기훈을 희대의 범죄자로 몰아갔다.

이러한 행태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의 보위와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면 필요에 따라 사건을 기획하고, 수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한다. 이때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는 수많은 증거는 무시된다.

당시 언론 역시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 '유서대필사건'에서 언론은 정권과 검찰의 발표를 받아쓰기만을 했다. 그 결과 정권에 민주화를 요구했던 1991년 5월의 정국은 '자살을 방조하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라는 프레임으로 전환되었다.

언론은 선정적 보도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호도했다. 이는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받아쓰기를 통해 지엽말단적인 문제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상업적 목표(구독률, 시청률 등)에 집중해 오직 속보 경쟁, 단독 경쟁만을 일삼는 현재 언론의 행태로 이어지고 있다.

1991년 5월에서 나타난 문제점 중에서 특별하게 지적해야 할 점은 가짜뉴스 문제다. 당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고 한 박홍 신부의 인터뷰는 지금 표현으로 하자면 전형적인 '가짜뉴스'였다. 특히 박홍 신부는 어둠의 세력이 북한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그의 말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발언이었으며, 어느 것 하나 사실로 드러난 게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진 바가 없었다. 자신의 터무니없는 발언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사과조차 한 적이 없었다. 인터뷰 당시 그는 서강대학교 총장이었다. 즉 가짜뉴스가 장삼이사들의 사적인 자리에서 유포된 것이 아니라, 대학교 총장이라는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 의해 인터뷰라는 공적인 방식으로 생산, 유포된 것이었다.

오늘날 가짜뉴스는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그럴듯한 내용과 방식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심지어 박홍 신부의 경우처럼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있으면서 전혀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고 있다.

586세대와는 달랐던 1991년 세대의 트라우마

당시 국민들은 강경대의 죽음에 분노했지만, 박홍 신부의 발언과 '유서대필사건'에 대한 언론의 받아쓰기 이후 빠르게 식어갔다. 특히 6월 3일, 총리에 내정된 정원식 교수가 대학원 강의를 위해 외국어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대학생들이 항의의 표시로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사건이 터지면서 1991년 5월 투쟁은 국민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91년 5월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1991년 5월 투쟁은 민주주의의 승리로 기억되지 않는다. 아니 패배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386(현재의 586)세대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6월 항쟁에서 불과 4년이 흐른 뒤에 있었던 1991년 5월 투쟁은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피와 눈물로 거리를 메웠던 세대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1991년 5월 투쟁은 아직 민주화 투쟁의 기록으로 공인되고 있지 못하기에 그 트라우마는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까지도 활발했던 학생운동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그 세력이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특히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 사회 내에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전면화되면서 정치적 민주화 운동은 전체적으로 축소되어 갔다. 이러한 현실에서 5월 투쟁의 주역이던 세대들은 선배 세대인 386세대처럼 사회정치적 의미를 부여받는 세대로 성장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전개 과정이 이들의 트라우마를 더욱 내재화시켰을 것이다.

트라우마, 민주주의 실현 통해 집단적으로 극복해야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는 계기가 된 촛불 집회는 새로운 방식의 민주화 투쟁이었다. 1991년 5월 투쟁 세대를 포함하여 과거 민주화 세대들은 이처럼 청년세대와 공감하고 소통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는 계기가 된 촛불 집회는 새로운 방식의 민주화 투쟁이었다. 1991년 5월 투쟁 세대를 포함하여 과거 민주화 세대들은 이처럼 청년세대와 공감하고 소통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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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과정에서의 트라우마는 비단 1991년 5월 세대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의 유신 세대들이나, 1980년대의 386세대들에게도 비록 그 양상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즉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트라우마는 모든 세대들이 겪는 문제였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극복되어야 하겠지만, 결국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해 집단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다.

2016년,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는 계기가 된 촛불 집회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민주화 투쟁을 보았다. 거리에는 평화로운 거대한 공론장이 형성되었다. 시민들은 직접 자신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냈고, 이를 통해 시민 스스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의제를 설정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손으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내고,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시민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민주주의 승리의 역사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1991년 5월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변화를 거듭했다. 그에 따라 정치·경제·사회적 의제들도 변화해왔다. 이제는 1991년 5월 투쟁 세대를 포함하여 과거 민주화 세대들이 이러한 새로운 의제에 적응하고 청년세대와 더불어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검찰 문제, 언론 문제, 그리고 가짜뉴스 문제 등도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청년세대와 공감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해결 방안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청년 시절이었던 민주화 투쟁의 시대에 기성세대였던 산업화 세대는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잠정적으로 유보할 수 있다'거나 '너희가 6.25를 겪어봤냐'는 레드 콤플렉스 논리로 청년세대를 가르치려 했다. 이러한 논리에 대해 당시 청년이었던 우리 세대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저 같은 사회 속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기성세대로 치부했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기성세대가 된 민주화운동 세대 역시 우리의 현재 모습을 청년세대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직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옳다는 확신 버려야

과거 민주화운동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지난 30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면서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마치 우리가 청년 시절에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고민을 했던 것처럼 현재의 기성세대인 우리와 사뭇 다른 고민을 하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진단과 처방 역시 우리와 다른 점이 많다. 왜 우리와 많은 면에서 다르게 되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청년세대와의 소통을 위해서는 '우리가 옳다'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옳다'는 생각,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가치 기준이 옳다는 확신은 결국 그 확신을 가르치고 강요하려는 태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특히 청년세대들은 왜 다르게 생각하는지 듣고, 우리의 생각을 조금씩 수정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럴 수 있을 때 비로소 과거 민주화운동 세대와 청년세대의 소통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야말로 1991년 5월, 청년이었던 열사들의 뜻을 지금 청년세대들과 이어주는 길이 될 수 있다. 트라우마의 진정한 극복은 이러한 소통을 통해 우리가 옳다고 생각해왔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변화된 현실에 맞게 실현하여 내일의 민주주의를 열어갈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 이 글을 쓴 이원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81년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1991년 5월에는 애국크리스찬청년연합 의장과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 중앙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투쟁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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