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관련 이미지.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관련 이미지. ⓒ 한국영화아카데미

 
세상살이는 고단한 일이다. 고단함의 배후에는 인연으로 얽힌 관계가 있다. 싫든 좋든 우리는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평생 살아간다. 인구가 늘고 세상이 복잡다단해질수록 그물코는 점점 커진다. 멸치도 빠져나가지 못한 그물이었는데, 요즘엔 상어나 고래도 어렵지 않게 지나간다. 스마트한 시대의 역설이다.

두 사람의 여성이 주축이 된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이 조용히 입소문을 타고 있다. 홍성은이 각본과 연출을 도맡았고, 공승연이 주인공 진아 역을 연기한다. 장편영화는 두 사람 모두 처음이라 한다. 하지만 91분의 상영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이 던지는 문제의식이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2020년 기준 전국 1인 가구 비율은 39.2%, 906만을 돌파했다. 23.4%, 540만 가구에 이르는 2인 가구를 압도한다. 이런 상황이기에 혼밥과 혼술 혼영 같은 단어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심화할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35년에는 1인 가구가 2226만으로 늘어날 것이라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다룬다.

진아의 일상

카드사 콜센터 상담원 진아는 20대 후반이다. 혼자만의 생활과 공간을 추구하는 진아. 그녀 아버지는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출한다. 어머니를 홀로 두고 나온 진아의 생활은 아파트와 콜센터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것이다. 병약한 어머니가 걱정돼서 거실에 CCTV 설치한 진아. 그는 언제나 스마트폰 수신에 몰두한다.

그녀의 귀에는 늘 수신기가 함께한다. 콜센터에서는 전화 수신기가, 여타 공간에서는 스마트폰 수신기가 동반한다.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다. 그녀는 콜센터에서 최고의 성과를 자랑하는 베테랑이다. 전화 고객과 전혀 감정을 섞지 않고 건조하게 사무적인 내용만 처리하는 진아. '죄송합니다'를 기계적으로 말하는 그녀.

시종일관 표정도 감정도 없이 사이보그처럼 노동시간과 조건을 준수하는 진아. 그녀를 붙들고 있는 마지막 매체는 텔레비전이다. 그녀의 밤을 동행하는 텔레비전. 그러고 보면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빈 시간을 홀로 감당할 능력이 없다. 어딘가에 자신을 강박적으로 붙들어 매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적인 기기의 노예가 진아다.

진아와 수진

콜센터 팀장이 진아를 호출한다. 신입을 교육하라는 주문이다. 즉각 거절하는 진아! 하지만 그녀의 사수였던 팀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아주 앳되고 철없어 보이는 수진.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독립하려고 고향을 떠나 홀로 서울로 왔다는 수진. 수진은 진아를 '선배'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한다. 어떻게든 진아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수진.

한사코 거리를 두는 진아와 엉기려는 수진의 아슬아슬한 공존. 여기서 잘 만들어진 장면 하나. 진아가 점심이면 날마다 찾는 간편 일식집을 따라가는 수진. 자동화된 기계식 주문을 마치고 수진이 진아를 따라 들어갔을 때, 진아는 다른 손님들 사이에 앉아있다. 순간 몹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수진의 표정이 화면을 채운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 그려진 콜센터 사무실 공간은 닭장 비슷하다. 책상과 의자 하나의 공간이 칸막이로 격절(隔絶)돼 있다. 누구도 타자와 말을 섞거나 농담하지 않는다. 거기서 수진은 '시간 여행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절절하게 토로한다.

"저도 데려가시면 안 돼요?! 2002년으로 저도 가고 싶어요!"

진아와 이웃 남자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관련 이미지.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관련 이미지. ⓒ 한국영화아카데미


아파트 복도에서 아침저녁으로 담배를 피우며 진아에게 말을 거는 이웃집 남자. 그 역시 20대 청년이다.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그는 '히키코모리'로 보인다. 그가 진아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이웃에게 아는 척해달라는 거다. 진아에게 환영처럼 다가오는 옆집 남자가 담배 피우며 말한다. "인사 좀 해주지."

복도를 지나던 진아가 코를 틀어막는다. 전에 없던 악취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고독사'다. 사멸의 순간 아무도 옆에 있지 않아서 상당 시간 흐른 다음에야 알려지는 고독한 죽음. 이웃 나라 일본에서 잃어버린 30년 동안 일반화된 죽음의 형식 가운데 하나인 고독사. 고독사를 대하는 방식은 참으로 비정하고 우울하게 다가온다.

아파트를 임차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집주인의 행색과 언어는 우리에게 2021년 현재를 돌이키도록 한다. 다른 집보다 싸게 나온 아파트를 빌리는 30대 남성 성훈의 태도가 진아를 거슬리게 한다. 누군가와 말을 섞는 행위 자체를 꺼리는 진아를 불러세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성훈이 못마땅한 진아. 성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방식을 고수한다.

진아는 성훈에게 뭔가 배우는 게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단출하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제사상에 술을 올리고 절하면서 망자를 보내는 의식을 정중하게 치르는 성훈.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표정과 몸놀림이 진아에게는 생소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배우는 최초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진아와 아버지

진아는 아버지를 벌레 보듯 한다. 일찍부터 가출하여 남처럼 살아온 아버지. 그러다가 홀연히 어머니가 불귀의 객이 되자 세상천지 유일한 가족이 된 아버지. 하지만 진아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60대 남성으로 진아의 아버지 역시 혼자 살아가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고독한 인생과 하루속히 작별하려고 한다.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 행복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진아의 마음을 찢어놓는다. 게다가 물적인 욕망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육친의 정을 느끼기란 쉽지 않을 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끄러운 공간에서 희희낙락하는 아버지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

황혼 이별이나 사별 혹은 별거 같은 이유로 60대 이상 '홀로족'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들에게 행복추구권을 앗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행태는 진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대낮에 콜라텍 같은 데서 춤이나 추는 아버지의 흉중에 어머니와 자식의 흔적은 그림자라도 있을까, 진아는 생각한다.

진아의 삶은 변할 것인가

전화상담을 하던 진아가 자리를 박차고 거리로 뛰어나간다. 거리에서 오래도록 머물던 그녀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한다. 그녀는 극도로 예민하고 피로하다. 그래서일까, 수진에게 전화하여 혼자이되 혼자이기 싫었다는, 혼자서 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는 진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이 진아를 위로한다.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여는 진아. 그녀는 필시 이 지점부터 타자와 함께하는 삶을 연모하기 시작한 듯하다. 혼자서도 넉넉하고 당당하며 자신만만하던 진아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설령 그것이 악연이더라도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느낌이랄까.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이 조금씩 그리워지는 진아.

버스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진아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마치 창밖 풍경을 처음 보는 사람 같다. 그렇다. 여태까지 그녀는 사람도 거리도 하늘도 바람도 보지 않고 살아왔다. 그랬던 그녀가 자신을 둘러싼 대상에게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닌,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 하나 제대로 태어나는 장면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 홍성은 공승연 히키코모리 고독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와 세상, 책과 문학, 일상과 관련한 글을 대략 3,000편 넘게 올려놓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