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컷

스틸컷 ⓒ 싸이더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두 가지로 나뉜다.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볼 것이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할 것이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시한부의 삶을 사는 정원(한석규 분)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미래가 없는 그는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이 사라진 후 이어지는 첫 장면은 집안에서 곤히 잠든 정원의 모습이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구령을 붙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미닫이문이 살짝 열린 곳으로는 햇볕이 들어와서 그를 비추고 있다. 그는 주먹에 턱을 괴고 가만히 바깥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눕힌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그가 대청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고 있는데 역시 이번에도 바깥에서 햇볕이 들어와 그를 비춘다. 중요한 건 두 경우 다 카메라가 집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즉 화면은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을 택한다. 집이라는 공간을 그의 삶이 유지되는 곳으로 본다면 바깥은 삶 너머의 공간, 즉 죽음에 이르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바깥의 햇볕이 집안의 그를 내리쬔다는 것은 그가 죽음과 아주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셈이다. 여기서 카메라가 바깥에서 안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응시하는 것은 그가 '떠나가는' 입장이라는 것을 한층 강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영화 내내 정원은 지난 추억을 반추한다. 그가 떠올린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생 때이다. 어린 그는 운동장에 홀로 남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언젠가는 자신도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 때의 그는 안전한 삶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30대가 된 그는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죽음을 생각했던 나, 즉 죽음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어린 나를 떠올린다. 그가 그러한 먼 기억을 돌아본다는 것은 언젠가 막연히 생각했던 죽음에 그가 아주 가까이 다가갔음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의 주변엔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뿐이다. 아버지, 여동생, 동네 첫사랑, 태권도 사범인 친구까지. 정원이 그들과 함께할 땐 '그거 기억나?' 하는 식으로 시작되는 추억들이 대화의 주제가 된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두 정원의 병이 얼마나 위중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정원의 안위를 묻거나 반대로 정원이 그들에게 본인의 부재를 예고하는 언행을 하게 된다.
 
 스틸컷

스틸컷 ⓒ 싸이더스

 
반면 다림(심은하 분)은 다르다. 영화의 초반부에 그녀는 정원의 사진관에 손님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둘의 첫 만남이다. 정원은 다림과 함께할 때만은 회상에 빠지지 않고 현재의 만남에 충실하게 된다. 다림이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삶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다림이 정원의 투병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 덕에 영화는 신파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된다.

다림과 정원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사진관 출입문에는 '출장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고 그 앞을 다림이 지키고 있다. 그러다 정원이 양복 차림으로 나타난다. 그는 아는 분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당연히 그는 착잡한 마음이고 다림에게 조금만 있다 와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림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빨리 사진을 인화해 달라고 재촉한다. 하필 정원이 장례식장이라는 죽음의 공간에 다녀왔을 때 다림을 만난 것, 그리고 다림이 그의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고 곧바로 정원을 현실의 세계로 데려온 것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정원은 넥타이를 풀고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작업을 끝낸 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림의 옆에 서는데 그 때 다림 역시 근무복인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이렇듯 영화는 옷차림을 통해서도 정원이 다림을 통해 현재를 다시 살아가게 됨을 넌지시 말해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카메라가 인물을 직접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진관의 통유리창에 반사된 인물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유리나 거울은 현재의 상징으로 읽힌다. 유리나 거울이나 상을 비추되 그 상을 붙잡아 두진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든 프레임 안에 머물렀다가 떠나가고 이는 현재의 시간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속하는 인물이 바로 다림이다. 그녀는 오토바이 사이드 미러를 보고 머리를 정돈하거나 거울을 보고 화장을 한다. 또한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는 통유리창 너머로 사진관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정원의 입원으로 사진관이 내내 잠겨 있게 되었을 땐 기다림에 지쳐 홧김에 유리창으로 돌을 던져 버린다. 그 순간 그녀는 깨진 유리창 사이로 사진관 내부를 똑바로 바라보게 된다. 이 때 카메라는 사진관 내부에서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하여 관객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지만 정작 그녀는 (반사될 유리창이 없으므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고, 이는 곧 그녀가 정원의 세계에 머물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그녀의 기다림이 끝을 맞이한 것이다.

유리와 대조 되는 존재로 활용되는 것이 바로 사진이다. 사진은 찰나의 시간을 가두어 보관하는 도구이다. 정원이 사진관을 운영하는 설정은 그의 시간이 곧 정지된 영역으로 변할 것임을 암시하는 셈이다. 정원이 퇴원 후 사진관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림의 편지를 발견하고 답장을 쓰지만 정작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계절이 바뀐 겨울,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다림은 사진관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 때 정원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사실상 이 삽입은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영화 속 다른 장면에서는 모두 정원이 화면 안에 있을 때 그의 내레이션이 삽입되었다. 고로 내레이션을 그 순간 정원이 하는 생각을 들려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내레이션이 나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내레이션은 그것만의 독특한 효과를 발휘한다. 다림이 사진을 확인하고 사진관을 떠나는 동시에 내레이션이 시작됨으로써, 그의 편지를 전해 받지 못한 다림이 꼭 그의 편지를 다 읽은 것처럼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원은 추억으로 그치지 않고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나게 해준 다림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다림은 언젠가 한 번씩 떠올려볼 추억을 선사해준 정원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이 저릿한 장면은 아마 정원이 본인의 영정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는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앉아 있다가 카메라 렌즈를 조정하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카메라로 가서 자동셔터를 작동시킨다. 그는 계속 무표정으로 있다가 씩 웃는데 바로 그 순간 셔터가 눌리며 화면이 멈춘다. 그리고 그 위로 영정 사진의 액자가 오버랩된다. 이걸 보면 우리의 머릿속에서 왜 그렇게 추억이 미화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추억은 사진과 같아서 결국 가장 아름다운 찰나의 장면을 인상 깊게 새겨놓을 뿐 그 이전에 지나온 수많은 장면은 전혀 남기질 않는다. 하지만 이 지점을 굳이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원도 그걸 알기에 셔터가 눌리기 직전 끝내 웃어 보인 것 아닐까. 무엇을 추억으로 남길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추억이 되는 건지, 이 두 가지의 질문 사이에서 언젠가 현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영화 허진호 멜로 한석규 심은하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