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상처입히지 않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선한 마음가짐과 각오, 모두 중요하지만 보다 앞서는 것은 '배움'이다. 우리는 앎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익힌다. 배움 없이 품은 선한 마음은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낳고, 배움 없는 각오는 아집을 만든다.

하지만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의 전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올해의 보이스상>을 수상한 래퍼 슬릭(Sleeq)은 "인간은 지구 전반을 인지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존재"라 말하며, 그럼에도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가사'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지난 2016년, 자신의 1집 앨범 < COLOSSUS >의 수록곡 'Rap Tight'에 적힌 비속어에 대해 사과하고, 2집 앨범 < LIFE MINUS F IS LIE >을 넘어 지금까지 그의 다짐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는 노랫말(Here I Go)'을 계속 이어간다. 산문과 같은, 빽빽한 가사 속에서 리듬을 다루는 정교함과 서사의 집중력을 함께 끌고 가는 역량 또한 놓치지 않는다.

타인을 상처입히는 데 무감각한 한국 힙합 신과는 결별을 선언했다. 여성 혐오에 물든 몇 힙합 리스너들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Mnet 예능 프로그램 <굿걸>에 출현해 성소수자의 긍정과 연대를 상징하는 프라이드 깃발을 방송에 내걸었다. 지난 23일, 배움을 거듭하며 자신의 노랫말을 곱씹는 래퍼 슬릭을 만났다.
 
 가수 슬릭 인터뷰 이미지

가수 슬릭 인터뷰 이미지 ⓒ 슬릭

  
- 최근 근황에 대해 간단히 알려주세요.
"3집 앨범을 작업 중이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지난 6월, 좋은 회사를 만나 음악적으로 지원을 많이 받는 덕분이죠. 조급해하지 않고 원하는 만큼의 목표지점에 도달할 예정이에요."
 
- 3집 앨범은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나요?
"3집 앨범에 들어갈 노래는 이미 다 만들어 놓았어요. 3집을 아름다운 앨범으로 만들고 싶어요. 아름답다는 정의는 사람마다 달라서 다른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1집과 2집은 저에게 충분히 아름다웠고, 3집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어요. 메시지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사운드가 아름다울 수도 있겠죠. 사운드에 조금 더 중점을 두기 위해 많이 공부하고 있어요."
 
- 지난 20일 발매된 싱글 '다들 웃고 싶어하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어디선가 유튜버의 비율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기사를 접해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소규모 컨텐츠, 혹은 1인 미디어가 경제적 경쟁력이 생기면서 모두 유튜브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죠. 저를 포함해서요. 저도 하루 종일 누워서 어깨가 결릴 정도로 유튜브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러다 실수로 알고리즘 빅데이터를 모두 잃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유튜브를 끊게 되었죠. 그러고 세상을 다시 보니, 제 감정은 미디어를 통해서는 성찰할 수 없는 것이라 깨달아서 노래를 만들었어요. 과거의 저를 청자로 포함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네요."
 
- Mnet <굿걸>에서 프라이드 깃발을 걸고 노래하신 장면이 아직까지 인상깊게 남아요. 소수자 의제를 공적 영역에서 꾸준히 발화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얻으시나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소수자 의제를 방송에서 꺼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상상하지 못했죠. <굿걸>에서 'Here I Go'를 부른 이유는 방송 당시, 퀴어 당사자인 제 친구가 심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였기 때문이에요. Mnet처럼 세계 각국에 방송되는 채널에서 부르면, 친구도 세계적으로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죠. 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많이 받았지만, 용기와 크게 관련된 행동은 아니었어요."
 
"SLEEQ got rainbow on ma wrist
Bread and Roses for ma women
For ma all gender queer
For ma all spectrum 위의 가능성들을 위해
For ma non binary 와 AIQ들을 위해."
- 슬릭, 'Here I go' 중에서

 
- 트랜스젠더들의 비극적 소식이 잇따른 가운데, 여전히 페미니즘의 교차성을 부정하는 소위 'TERF(Trans Exclusionary Radical Feminist)'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요.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이런 공격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이 있을까요?
"극복할 수는 없겠죠. 상처를 극복한다는 건 이상한 개념이에요. 상처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처를 극복할 의무가 없어요.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내재적으로 생각하는 건 위험한 일이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이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들 거예요. 저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오역했을 수도 있겠죠. 물론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소수자의 생존권과 안전에 우선하는 사상은 사회운동으로서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고소를 하거나 법적·사회적 처벌을 시도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에 계신 트랜스젠더 분들도 많잖아요. 그렇다면 상처를 인지하고,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공유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주변에 그런 사람조차 없다면,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저에게 메시지를 주셔도 좋아요. 무엇보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해요."
 
- TERF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의 말씀이 옳을 수도 있어요. 인간은 지구 전반을 인지하기는 너무 작은 존재기 때문에, 누구나 옳은 생각을 하고, 틀린 생각도 하죠. 자신의 생각이 옳다, 그리고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쯤 동시에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비건이지만, 누군가 비거니즘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의견을 듣고 이유를 찾아보겠죠. 그럴 때 공부는 시작돼요. 만일 이 기사를 읽은 TERF 분들이 단 한 분이라도, 슬릭이 왜 저렇게 생각할까? 라는 물음이 든다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스스로 탐구해보셔도 좋겠죠.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라는 책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만일 책 내용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면, 제 의견에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소진되지는 않으실까요?
"전혀요. 그렇지 않아도, SNS를 통해 연락주신 한 분과 일주일 정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에요. 처음에는 저에게 굉장히 공격적으로 대하셨지만, 시간이 지나 농담도 나누고, 안부도 여쭤보는 사이가 되었어요. 논쟁을 나누는 사이 정이 든 거죠. 저도 TERF 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 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유의미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 이미 결별을 선언하셨지만, 한국 힙합 신이 혐오를 돌아보고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믿으시나요?
"개선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해요. 의도는 없겠죠. 힙합 신의 개선은 타의적으로 이뤄질 거예요. 힙합 음악을 소비하는 리스너들도 점점 혐오에 대한 인식과 페미니즘적인 사고를 갖게 될 거니까요. 세상이 그렇게 바뀔 거고, 결국 신 내부의 혐오자들도 인정하게 되겠죠."
 
 가수 슬릭 인터뷰 이미지

가수 슬릭 인터뷰 이미지 ⓒ 슬릭


-슬릭x이랑의 '괄호[과:로]가 많은 편지'가 문학동네에서 연재를 마쳤어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지금은 문학동네에 계시지 않지만, 이랑 선생님과 제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기획해주신 분께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작가로 데뷔해 어렸을 적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내 생각을 특정인에게 산문으로 전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비롯해 너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이 은혜는 언젠가 갚으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 9화에서 말씀 주신 '좋은 음악'에 대해, '좋은 음악'이 아닌 '좋은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좋은 음악을 만드는 이유는, 좋은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좋은 음악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제작 중인 음악이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저에게 있어 여행을 하는 느낌이에요. 40% 정도는 내가 듣기 좋은, 40% 정도는 남들도 듣기 좋은, 나머지 20%는 내가 듣기에도 별로고, 남들이 들을 때 어떨지 모르는 노래가 나오죠.

최근에는 어쿠스틱한 노래에 관심이 많아요. 전력이나 데이터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죠. 빅데이터와 그에 관한 전력 소모로 인해 탄소 배출 문제가 심각하다고 배웠거든요. '음악' 혹은 '노래'를 데이터로 인지해보려는 작은 노력의 일환이에요."

"나는 너의 용기야, 너를 쓰러지지 않게 하는
서툰 걸음을 하는 것 뿐이지만 나는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나의 걸음 멈추지 않게 하는 당연함은 당연하게 오지 않아."
- 슬릭, 'MA GIRLS' 중에서.

 
- 슬릭이 생각하는 비거니즘이란?
"행복이죠. 오랜 시간 느낀 마음의 모순을 풀어, 저를 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줬어요. 이건 제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와 같아요. 저는 여성이고, 사회가 나를 여성으로 인식하는데 제가 여성 혐오를 하면 모순적이잖아요. 제가 동물을 사랑하는데 육식을 하는 것도 똑같이 느껴졌고, 그런 모순이 있는 게 싫었어요. 비건으로 살아가며, 마음의 모순이 풀어진 덕분에 지금은 매우 행복해졌어요."
 
- 슬릭에게 가장 즐거운 순간은?
"저는 공부할 때 가장 즐거움을 느껴요. 제가 지금 배우고 있는 학문이 사주명리학, 젠더학, 교차 페미니즘, 풋살, 병리학, 수어 등. 어쨌든 많이 배우고 있어요. 모르는 것을 알게 될 때의 즐거움이 제일이라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배우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 배우면서 얻는 스트레스는 없으신가요?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아요.(웃음)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갑자기 수학을 배워야 한다면, 가르치시는 분이 한숨부터 내쉴 테니까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건 너무 재미있는 일이죠."
  
슬릭이 걷는 행보와 노랫말은 그가 가진 각오와 배움의 의지를 대변한다. 2012년, 믹스테이프 앨범 '위클리 슬릭(WEEKLY SLEEQ)'을 발매한 이래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힙합 음악 시장에서 독보적인 목소리를 가지게 된 것은 올바르고자 하는 의지와 끊임없는 성찰의 자세 덕분이다.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겠다는 마음이 이어져 수많은 이들의 용기와 위로가 되었다. 슬릭이 전하는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슬릭 힙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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