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021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7전 4승제) 판도가 싱겁게 흘러가고 있다. 안양 KGC인삼공사는 1차전 98-79, 2차전 77-74로 승리를 거뒀다. 3차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9-94로 여유 있게 승리를 가져갔다. 94점을 넣은 전주 KCC 이지스가 못한 것이 아니다. KGC는 100점을 훌쩍 넘기며 힘으로 KCC를 제압했다.

3-0으로 승기를 손에 움켜쥔 KGC는 남은 4∼7차전 가운데 1승만 더하면 2016-2017시즌 이후 4년 만에 프로농구 왕좌에 복귀한다. 더불어 6강과 4강 플레이오프에 이어 이날 경기까지 승리하며 플레이오프 및 챔피언결정전 9연승을 달성해 이 부문 신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울산 현대모비스가 2012-2013시즌부터 2013-2014시즌까지 두 시즌에 걸쳐 달성한 8연승인데 현재 분위기로 볼 때 KGC의 10연승 전승 우승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다. 그야말로 사상 최강의 팀으로 거듭나는 모습이다.

사실 KGC의 플레이오프 행진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정규시즌 3위란 성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KGC는 강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팀은 아니었다.

당초 기본 전력에서 앞서는 KGC와 기세, 분위기의 KCC 대결은 팽팽할 것으로 전망됐다. 포지션별 밸런스, 선수층에서 KGC가 조금 더 나아보이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벤치의 전술과 트렌지션 게임에서 강점이 있는 KCC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누구의 색깔이 더 강하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수 있는 시리즈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예측은 단 한명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크리스 맥컬러(26·208㎝)의 대체선수로 5라운드 후반에 합류한 자레드 설린저(28·206cm)가 그 주인공이다. NBA 1라운드 지명에 빛나는 설린저가 국내리그에 입성한다는 말이 들려올 때부터 농구팬들은 술렁거렸다.

잠깐 NBA에서 뛴 것도 아닌 빅리그에서 무려 5년간 269경기를 소화하고, 거기다 나이도 한창때인 선수가 온다는 것 자체가 믿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설린저는 높은 이름값에 걸맞게 압도적인 실력으로 그야말로 KBL 무대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대대로 KGC는 외국인 선수를 잘 뽑는 팀으로 유명하다. '단선생'으로 불리던 단테 존스(1975년생·195cm)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설린저는 역대 최고 외인 중 한명으로 꼽히는 존스보다도 한수위 기량으로 KBL을 맹폭하고 있다. 한 단계 높은 기량으로 농구 강의를 펼친다고 해서 붙은 '설교수'라는 별명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워낙 영향력이 엄청나서 일각에서는 "KCC는 KGC에게 지고 있는 것이 아닌, 설린저에게 지고 있다"는 말까지 터져 나오고 있다.
 
 설린저(사진 오른쪽)는 팀 동료까지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사기 유닛'이다.

설린저(사진 오른쪽)는 팀 동료까지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사기 유닛'이다. ⓒ 전주 KCC

 
팀 동료까지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사기유닛
 
KBL에서의 설린저는 전형적인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돌파, 페이스업, 포스트업, 슈팅 등 내외곽을 오가며 전천후로 득점을 올리는 것을 비롯 넓은 시야와 빼어난 패싱감각으로 상대 수비진을 정신 못 차리게 한다. 게임의 흐름을 알고 플레이를 하고 있어 지역방어, 트랩디펜스 등도 어렵지 않게 깨트려 버린다. 수비도 영리하게 잘한다.

이 정도만해도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최고 외국인 선수의 모습이지만 설린저의 진짜 가치는 다른데 있다. 단순히 팀플레이를 함께하는 것을 넘어서 팀 동료를 살려주는 플레이에도 굉장히 능하다. 사실 설린저같이 압도적인 외인이 있으면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동료들이 받는 우산 효과는 상당하다. 설린저를 막으러 상대팀 수비가 집중될 때 빈 공간, 허점만 잘 이용해도 시너지가 크다.

두 세수 앞을 내다보면서 흐름을 조절하는 설린저는 여기서 동료의 장점까지 잘 살피며 지원까지 해준다. '플레잉 감독'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손바닥 위에 경기를 놓고 쥐락펴락한다. 거기에 설린저는 차원이 다른 외인답게 긴 출장시간 속에서도 체력안배에도 능하다. 

구태여 매 순간 풀 파워를 내지 않고도 상대를 압도할 수 있어 경기가 펼쳐지는 흐름에서 딱 필요한 정도만 움직이면서 상황에 맞는 최대의 효율성을 내고 있다. "설린저는 양팀을 내려다보면서 게임을 조율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KGC가 완전히 다른 팀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설린저 합류 전까지만 해도 KGC는 멤버는 좋지만 거기에 걸맞게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혹평에 시달렸다. 앞선의 다이나믹 가드 듀오 이재도(30·180㎝), 변준형(25·185㎝), 리그 최고 디펜더 양희종(37·194㎝)과 문성곤(28·196㎝), 전성기에 접어든 슈터 전성현(30·189㎝), 국내 토종빅맨 계보를 잇고 있는 오세근(34·200㎝) 등 국가대표급 구성을 자랑하는 이름값이지만 결과가 늘 아쉬웠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이름값 높은 멤버들에 대해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재도는 공수 에너지는 좋지만 시야가 좁고 패싱게임이 약하다. 변준형은 기복이 심하고 화려한 플레이에 비해 실속이 적다. 양희종, 문성곤은 슛이 너무 없다. 전성현은 슛은 좋지만 적재적소에서 패스를 잘 넣어줄 동료 가드의 부재가 아쉽다. 오세근은 몸 상태가 예전 같지않아 반등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등이 그것이다.

김승기 감독은 이른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뺏는 수비'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는 플레이를 즐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 팀에 간파당해 역공을 당하기 일쑤였다.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자 작전타임 중 화내는 경우가 많아졌고 특히 선수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대해서는 자팀 팬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설린저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었다. 앞서 언급한 주축 멤버들의 약점을 모두 메워줄 기량을 가지고 있고, 'BQ(바스켓 아이큐)´까지 좋은지라 동료의 장점만 뽑아 쓸 줄 안다. KBL 역사상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기캐릭터'다.

그 결과 김 감독은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설린저가 알아서 다 해주는지라 경기중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정규리그 때의 성난 얼굴 대신 마스크로도 감춰지지 않는 웃음만이 가득할 뿐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는 설린저의 기량을 감안했을 때 그가 내년에도 KGC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혼자서 KBL 무대를 정복해버리고 KGC의 운명을 바꾼 NBA리거의 위상은 두고두고 팬들 사이에서 회자 될 것이다. 그야말로 올 시즌은 '설린저 시리즈' 딱 하나로 정리되고 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자레드 설린저 전주 KCC 부상병동 KCC 가드진 인삼공사 설교수 플레잉감독 설린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