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신세계>, <마녀> 등으로 자신만의 한국형 누아르 장르를 개척 중인 박훈정 감독이 4월 9일 넷플릭스를 통해 새 작품 <낙원의 밤>을 선보였다. 신세계의 후속작이 사실상 무마된 것을 아쉬워하는 영화팬 중 한 명이기에 영화에 대한 기대는 한 껏 높았다.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를 택한 행보 또한 흥미로웠다. 주된 이유야 코로나 19로 인한 손익분기점을 달성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전 세계인들이 한국형 누아르를 어떻게 평가할지 주목되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박훈정 감독 특유의 색을 띠고 있었다. 거친 액션신이 적고, 분위기를 깨는 유머 코드에 다소 실망했다는 평이 더러 보인다. 하지만 <마녀>에 이어 총을 든 여성이 핵심인물로 그려지고 복수의 복수와 자결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제목만큼이나 일종의 허무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제주도 낙원에 스며드는 악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화면에 꽉 채워졌다. 대화는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만큼만 절제되어 주고받았으며 그 뒤로 흐르는 음침한 기운이 블루톤으로 채도가 낮게 깔렸다. 빽빽한 수목림 사이를 지나 해안길을 타고 미끄러지는 차를 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낙원'이라는 단어가 제법 어울렸다. 다만, 스크린으로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그토록 눈부신 낙원의 섬은 육지에서 흘러 들어온 악들이 곳곳에 스며들면서 점점 지옥으로 물들어갔다. 

태구(엄태구 분)는 가족을 죽인 울분으로 상대편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제주도에 몸을 숨긴다. 재연(전여빈 분)은 시한부 판정을 받고 불법 무기상인 삼촌과 함께 제주도에 살고 있다. 태구가 러시아로 가기 전 잠시 재연의 삼촌 집에 머물게 되면서 둘은 만나게 된다. 

뜻밖에도 태구와 재연은 물회를 좋아했다. 태구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릴 적에 자주 해주던 물회에서 포근함을 느꼈다. 재연은 맛집이지만 아직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헐빈한 가게에서 물회를 먹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가 살해당하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재연은 자기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것 같은 물횟집을 찾아 꾸역꾸역 스스로를 위로했다. 외딴곳에 쓸쓸하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그녀와 닮았다. 재연은 태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그곳으로 데려가 작은 비밀을 살며시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태구는 결국 자신의 보스인 양 사장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그를 쫓아 상대편 조직인 복성그룹 마 이사(차승원 분)가 제주도에 도착한다. 이후 낙원의 밤은 더욱 짙게 물들며, 너무나 아름답기에 더욱 처연하고 시린 이야기가 이어진다. 
 
 <낙원의 밤> 스틸컷

<낙원의 밤> 스틸컷 ⓒ 넷플릭스

 
차승원의 연기는 독보적이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내뱉는 대사 "조그만 기다려, 얼마 안 걸려"는 계속 회자될 것 같았다. 엄태구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짧지만 강력한 액션은 그보다 더 나은 배역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의 강력한 인상에 이후 작품이 더욱 기다려졌다. 

전여빈은 현재 출연 중인 드라마 <빈센조>에서 대중에게 익숙해진 장난끼 많고 발랄한 캐릭터는 온 데 간 데 없고 세상 끝까지 가 잃을 게 없어 보이는 시한부 인생의 여자 킬러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녀의 무심하고 딱딱한 말투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영화 전체에 잘 스며들었다. 
 
 <낙원의 밤> 스틸컷

<낙원의 밤> 스틸컷 ⓒ 넷플릭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살인과 교사를 서슴지 않는 보스와 받은 대로 되돌려 주어야만 하는 건달들의 세계는 가장 나약해 보이는 재연의 총에 모두 무너진다. "죽이고 싶은 놈이 있어"라며 사격 연습을 하던 재연이 진짜 지키고 싶었던 것은 살해된 부모처럼 다시는 소중한 것을 남에게 뺏끼지 않겠다는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얽이고설킨 욕망 속에서 우리는 낙원을 꿈꾼다. 감독은 그 모든 날 선 욕망을 피해 낙원을 꿈꾸는 모습이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토록 잔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제주도의 밤이 깊어질수록 누군가에게 낙원이자 절망이며 지옥 같은 시간을 지워갔다.
낙원의 밤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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