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이재영-이다영 자매(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학교 폭력 사건으로 시작된 이른바 '학폭 미투'는 다른 종목과 연예계로까지 번지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물론 쌍둥이 자매처럼 과거에 저지른 일을 인정해 징계를 받는 경우도 있고 결백을 주장하며 법정다툼까지 불사하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개그맨 홍현희는 학폭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와의 대면을 통해 오해를 풀고 학폭 의혹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2009년에 있었던 폭력사건으로 퇴출됐다가 작년 프로팀 감독으로 복귀했던 KB손해보험 스타즈의 이상열 감독이 과거의 잘못을 확실히 씻어내지 못하면서 11개월 만에 감독직 사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만약 이상열 감독이 12년 전 폭력사건 피해자였던 박철우(한국전력 빅스톰)를 직접 찾아가 진정성을 담아 용서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2009년 박철우 구타로 구설수 올랐던 지도자
 
 이상열 감독은 "친정팀을 명문으로 만들고 싶다"는 각오를 지키지 못하고 팀을 떠나게 됐다.

이상열 감독은 "친정팀을 명문으로 만들고 싶다"는 각오를 지키지 못하고 팀을 떠나게 됐다. ⓒ KB손해보험 스타즈

 
흔히 '삼손'이나 '야생마'하면 야구의 이상훈(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나 축구의 김주성을 먼저 떠올리지만 배구에서는 이상열 감독이 80년대 후반부터 '코트의 삼손'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경기대 시절부터 장윤창의 뒤를 이을 국가대표 라이트로 기대를 모았던 이상열 감독은 대학 졸업 후 1989년 럭키금성에 입단해 1997년까지 대표팀과 실업배구를 오가며 활약했다.

이상열 감독은 195cm의 큰 신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풀한 스파이크와 강한 카리스마, 그리고 준수한 외모로 남자배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부상 탓에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동시대에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써비스라는 '양대산맥'이 존재했기 때문에 겨울리그에서 한 번도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던 것도 실업배구 시절 이상열 감독의 오점이었다.

은퇴 후 모교인 인창고등학교에서 코치와 감독으로 재직하던 이상열 감독은 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2009년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대표팀 선수였던 박철우를 구타한 사건이었다. 이상열 감독에게 폭행을 당한 후 대표팀에서 이탈한 박철우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상열 감독에게 구타를 당해 피멍이 든 자신의 얼굴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로 인해 이상열 감독은 대한배구협회로부터 무기한 자격정치 처분을 받았다.

문제는 아마추어 배구와 대표팀을 관장하는 대한배구협회와 V리그를 운영, 관리하는 한국배구연맹이 다른 단체였다는 점이다. 대한배구협회로부터 징계를 받은 이상열 감독은 징계와 무관했던 한국배구연맹이 운영하는 V리그에서 경기 감독관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이상열 감독은 2011년 현역 시절 국가대표로서 배구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 받아 대한배구협회로부터 받았던 무기한 자격정지가 2년 만에 해제됐다.

징계에서 해제된 이상열 감독은 2012년부터 이경석 감독의 후임으로 경기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상열 감독은 OK저축은행 읏샷의 창단멤버가 된 이민규, 송명근(공교롭게도 학폭사건으로 자진 시즌 아웃), 송희채(군복무)를 키워내며 경기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지난 2015년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지내기도 했던 이상열 감독은 작년 4월 권순찬 감독의 후임으로 KB손해보험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부적절한 발언으로 사태 재점화... 불명예 사퇴로 일단락
 
 이상열 감독이 시즌 전 박철우에게 용서를 받았다면 시즌 중 사퇴라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이상열 감독이 시즌 전 박철우에게 용서를 받았다면 시즌 중 사퇴라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 한국배구연맹

 
여전히 적지 않은 배구팬들은 이상열 감독의 박철우 폭행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이 때라도 이상열 감독이 박철우를 찾아가 사과의 뜻을 밝혔다면 지금 같은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프로팀을 맡게 되면서 팀을 재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이상열 감독은 끝내 박철우에게 사과하는 자리를 갖지 않았다. 물론 구단이 자리를 마련해주길 기다렸을 수도 있지만 이는 '가해자'인 이상열 감독 본인이 직접 나서야 했을 문제다.

KB손해보험은 1순위로 지명한 '말리특급' 노우모리 케이타의 활약에 힘입어 시즌 초반부터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다. 이대로 성적을 유지한다면 이상열 감독은 2010-2011 시즌 이후 KB손해보험을 10년 만에 봄 배구에 진출시키는 사령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열 감독은 지난 2월 쌍둥이 자매의 학교폭력 사건이 터진 후 피해자 박철우의 분노를 사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는 또 한 번의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분노한 박철우는 지난 2월18일 OK금융그룹과의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를 통해 이상열 감독의 폭행전력을 폭로했다. 이상열 감독은 뒤늦게 언론을 통해 "사과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2월20일 잔여시즌 출장포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잔여연봉을 받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에 휩싸였고 결국 이상열 감독은 12일 자진사퇴를 결정했다. 감독대행을 맡게 된 이경수 코치의 부담만 더욱 커진 셈이다.

승점 52점으로 3위를 달리고 있는 KB손해보험은 13일 현재 정규리그 5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2위 우리카드 위비를 3점 차이로 추격하고 있지만 OK금융그룹에게 2점, 한국전력에게 3점 차이로 추격을 당하고 있다. 여기에 '전력의 반'이라 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 케이타가 시즌 중반부터 체력문제를 드러내며 초반 같은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상열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KB손해보험이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자신은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10년도 더 된 일에 아직까지 앙심을 품고 있다며 피해자를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과할 마음이 있었다면 배구계 선·후배를 통해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고 피해자가 받은 상처의 크기는 애초에 가해자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상열 감독은 정규리그 막판 V리그에 큰 상처를 남기고 명예롭지 못하게 팀을 떠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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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도드람 2020-2021 V리그 KB손해보험 스타즈 이상열 감독 박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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