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라는 나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불혹이라는 천년 넘게 우려먹은 수식어보다는 조금 더 근사하고 현대적인 감수성을 부여하고 싶다. 나도 이제 마흔 언저리에 있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다. 아이가 생기고 10년 넘도록 사회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의 영혼은 철부지 어린 시절 그대로고 주변 환경만 바뀐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 마주했던 지금 내 나이의 어른들을 떠올려보면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들도 청춘이었고 어른인 척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만나 보듬어 주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척은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나이에 맞는 격이든 사회적 지위가 어쨌든 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득 마흔이라는 나이에 어울리는 것은 아직도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즌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30년 장인'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출발점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나의 평생 업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괜찮아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일종의 위로도 허용되는 아주 스위트 한 시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포스터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포스터 ⓒ 찬란

 
찬실이는 마흔이다. 여성이고 영화 PD다. 독립영화계에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적은 예산으로 사비를 털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아주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큰 부와 명예를 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자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열정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작업하던 감독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 '지 감독님보다 딱 일 년만 더 살고 싶다'고 했던, 그렇게 그와 끝까지 영화를 만들다 죽고 싶다는 찬실이의 소망은 실패했다. 작업하던 영화는 엎어지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리고 산 중턱에 있는 어느 달동네로 이사를 가고 친한 여배우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산다.

찬실이의 영화가 멈추자 삶이 이어졌다. 끼니 걱정과 시기를 놓친 혼기를 걱정한다. 그리고 '과연 영화 없이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결국 '나는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이고 인간에게는 영화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많다'며 자신이 아끼던 영화와 관련된 물건들을 버리며 영화를 접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영화는 '인간은 허무한 존재지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생존에 어울리는 소박한 생활로 돌아가려는 찬실이를 그의 동료들과 '장국영(김영민 분)'이라는 귀신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영화를 한다는 것은 밥 벌어먹고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은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찬실이가 사랑했던 영화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성취의 대상이 아니라 극 중 인물 김영(배유람 분)이 말했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처럼 지극히 일상적이라 그래서 더욱 티가 안 나게 자신을 지탱해주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찬실이도 마흔이라는 나이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을까. 전구 하나 사러 추운 날씨를 뚫고 좁은 골목을 내려가는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 그리고 잠시 서서 보름달을 보는 찬실이. 그녀가 바랬던 것은 그저 영화로 사는 삶이었다. 그 무식하고 고집스러운 신념이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걷는 그녀의 동료들을 보며 어둡고 추운 밤 길이라도 함께 하기에 갈만하다고 생각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다'는 제목은 훌륭한 영화에 정말 잘 어울리는 근사한 제목이다. 우리도 어쩌면 참 복 많은 사람들이 아닐까.

주인공 역을 맡은 강금실 배우 열연에 손뼉을 치면서 울고 웃으며 봤던 영화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왜 살아요'라고 묻는 것이 당황스럽다면, 부산 사투리로 '그냥 이게 좋아요'라고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새해 첫 영화로 추천한다. 여러분들도 복도 많으시길.
찬실이는 복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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