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란 이래서 무섭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굴욕과 참사도 겪어본 이들에게 다시 습관처럼 반복된다. 인천 전자랜드가 그 좋은 예다.

전자랜드가 새해 첫날부터 '또' 역사적인 기록을 수립했다. 전자랜드는 1일 인천삼산체육관에서 열린 2020-2021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전주 KCC와의 3라운드 맞대결에서 64-82로 완패했다.

이날 경기는 1쿼터만에 큰 화제를 모았다. 1쿼터 10분이 끝나고 전자랜드가 기록한 득점이 달랑 2점, 반면 상대팀인 KCC는 무려 22점을 득점하며 일찌감치 승부가 기울었다.

전자랜드는 1쿼터 2점슛 12개, 3점슛 8개 등 총 20개의 슛을 시도했지만 골망을 가른 것은 단 1개 뿐이었다. 슛 시도만 놓고보면 1쿼터에 16개의 슛을 던져 22점을 올린 KCC보다 더 많이 던졌다. 전자랜드는 경기를 시작하고도 무려 7분여가 지나서야 김낙현의 점프슛으로 간신히 악몽같은 0의 행진을 끊을수 있었다. 팀 야투 성공률은 고작 5%였다. 슛이 안들어간다고해도 상대 파울을 끌어내어 자유투조차 얻어내지 못했다.

이 기록은 프로농구 역대 1쿼터 최소 득점 신기록이기도 하다. 종전 기록은 고양 오리온이 2007년 12월15일 서울 SK전, 2013년 1월11일 KCC전에서 각각 1쿼터에 기록한 3득점이었다.

또한 범위를 넓히면 역대 한 쿼터 최소 득점 타이 기록에 해당한다. KBL 출범이후  한 쿼터 2득점을 기록한 경우는 이날까지 총 4번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하필 모두 전자랜드가 달성한 기록이다 1998년 2월21일 전자랜드 전신인 대우증권 제우스가 대전 현대(현 전주 KCC)에게 4쿼터 2점에 그친 것을 시작으로, 2006년 2월26일 전자랜드가 안양 KT&G(현 안양 KGC)에 2쿼터 2점, 2009년 11월10일에는 원주 동부(현 원주 DB)를 상대로 4쿼터 2점에 머물렀다.

3쿼터를 제외한 1, 2, 4 쿼터별 프로농구 최소득점을 모두 전자랜드가 보유하고 있는 것. 아마추어 농구에서도 어지간해서는 쉽게 나오기 힘든 불명예 기록이, 그것도 프로팀에서 수 차례나 벌어진 것은 '참사'에 가깝다.다행히 KBL에서 한 쿼터 무득점이나 1점에 그친 경우는 아직 없다. 프로 수준에서 이런 기록이 일부러 나오기도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자랜드의 불명예 기록은 앞으로도 당분간 깨지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만일 다른 프로구단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구단의 명예'나 '프로 선수들의 질적 수준' 문제 등을 거론하며 적지않은 후폭풍이 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농구팬들은 오히려 '전자랜드라면 그럴만도 하다'고 반쯤 납득하는 분위기에 가깝다.

농구팬들 사이에서 전자랜드는 이른바 '개그랜드'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구단 역사상 중요한 순간마다 경기력에서 구단 운영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식적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기행을 수 차례나 저질렀던 팀의 징크스를 풍자하는 수식어다.

큰 점수차로 여유있게 이기고있던 경기를 막판에 야투난조와 실책남발로 자멸하는가 하면, 강팀에 강하고 약팀에 약한 도깨비팀같은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신인드래프트에서는 모처럼 상위권 순번의 기회가 돌아올때마다 '꽝손'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한때는 팀성적도 한때는 하위권을 전전하는 동네북이었던 시절도 있었고, 그동안 구단이 팀운영을 포기하려고 했던 경우도 여러 번이다.

프로농구판 '내팀내(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혹은 DTD)' 징크스도 개그랜드만의 또다른 전통 중 하나다. 프로야구 LG 트윈스나 롯데 자이언츠의 암흑기 시절을 빗대어 초반에만 반짝 잘하다가 중반이후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패턴으로 팬들의 기대감을 머쓱한 설레발로 만드는 것을 자조하는 표현이다.

전자랜드는 올해 약팀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1라운드를 7승 2패로 출발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2라운드 이후 6연패 한 차례를 포함하여 6승 11패로 역주행했다. 선두권이었던 순위는 순식간에 공동 6위까지 추락하며 이제는 5할승률도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에이스 김낙현의 일시적인 슬럼프와 헨리 심스-에릭 탐슨 등 외국인 선수들의 기량이 압도적이지못하다는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강팀이 되려면 100%의 전력이 아닐 시에도 일관성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게 올시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자랜드는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된 2019-20시즌에도 초반 선두권을 달리다가 갑작스러운 부진에 빠지며 42경기에서 21승 21패,5위로 시즌을 마감한바 있다. 이처럼 매 시즌마다 전력의 안정감이 떨어지는 '롤러코스터' 행보는 전자랜드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전자랜드가 전신 시절을 포함하여 창단 이후 단 한번의 정규리그-챔프전 우승을 차지해보지못했고, 파이널 진출도 불과 단 1회(2018-19시즌)에 그친 근본적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자랜드의 모기업은 올시즌을 끝으로 농구단 운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2020-21시즌은 인천 전자랜드라는 이름으로 프로농구 코트를 누빌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가뜩이나 팬들에게 좋은 추억만 남기고 떠나도 모자랄 시점인데, 자꾸 좋지못한 이미지만 소환하며 놀림감이 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전자랜드의 마지막 여정이 아름다운 마무리로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더 이상 개그와 기행이 아닌 '감동과 투혼'을 보여줘야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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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전자랜드 한쿼터최소득점 프로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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