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챔피언' 울산 현대가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했다. 울산은 지난 24일 홍명보 신임감독을 계약기간이 종료된 김도훈 감독의 후임으로 구단의 제 11대 사령탑에 선임했다고 밝혔다. 2017년 중국 슈퍼리그 항저우 뤼청의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로 축구협회에서 행정가로서 일해왔던 홍명보에게는 약 3년 7개월만의 지도자 복귀다.

홍명보 감독은 한국축구가 낳은 대표적인 스타 중 한 명이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스페인과 8강전 승부차기에선 마지막 5번째 키커로 나서 한국의 승리를 결정짓는 등 4강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브론즈볼(MVP 3위)까지 수상했다. 국가대표로서 월드컵 본선에 4번이나 출전했고 A매치 136경기로 한국 선수로는 역대 최다 출전기록을 갖고 있다. 클럽무대에서는 국내 K리그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무대에서도 활약했다.

현역 시절 주포지션은 수비수였고 특히 스리백 전술의 스위퍼로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영원한 리베로(Libero:자유-스위퍼의 이탈리아식 표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중앙 수비수로서는 다소 부족했던 신체능력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예측력과 전술 소화력을 바탕으로 공이 가는 길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수비진을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커맨더형 센터백'의 원조로 꼽힌다.

전성기에 공격의 황선홍에 있었다면 수비의 홍명보로 이어지는 H-H라인은 90년대부터 2002 한일 월드컵까지 10여년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중심축으로 군림했다. 다만 철저하게 스리백 전술에 특화된 선수였기에 홍명보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축구 사정상 현대적인 포백의 정착이 늦어졌다는 부작용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진중하고 과묵한 이미지로 선수단을 이끄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도 대단하여 '캡틴 홍명보'는 지금도 2010년의 박지성과 함께 대표팀 역대 최고의 주장으로 회자되곤 한다.

은퇴 이후엔 지도자와 행정가로서도 굵직한 이력을 쌓았다. 독일월드컵과 아시안컵 등에서 딕 아드보카트-핌 베어벡 등 외국인 감독을 보좌하는 대표팀 코치로 경험을 쌓았고, 2009년부터 연령대별 대표팀을 맡아 본격적으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2009 이집트 FIFA U–20(20세 이하) 월드컵 8강,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동메달 등을 따냈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을 맡아 올림픽 사상 한국의 첫 축구 종목 메달(3위)이라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홍명보에게는 축구 인생 최대의 시련도 찾아왔다. 런던올림픽의 성과를 등에 업고 2013년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에 중용됐으나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1무2패)이라는 아픔을 맛봤다. 당시 홍명보가 지휘봉을 잡은지 1년 밖에 되지않은 시점이었고 당시 한국축구가 지역예선부터 누적된 부진과 연이은 감독교체로 혼란한 시기를 보냈던 것을 감안하면 월드컵에서의 부진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결과는 아니었다.

문제는 잘못된 과정이었다. 홍명보호는 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선수 구성 단계에서부터 '의리축구' 논란으로 큰 홍역에 휩싸였다. 홍명보 감독은 취임 당시 '소속팀에서 잘하고 있는 선수를 뽑는 것이 원칙'이라던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 뒤집으며 K리그에서 꾸준히 좋은 실력을 보여주는 선수들을 홀대한 반면, 자신이 선호하는 해외파와 런던올림픽 출신 멤버들만 중용하며 '국가대표 선수선발의 공정성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박주영, 기성용 등 당시 논란에 휩싸였던 인물들을 불러온 것은 물론 정성룡, 지동원, 김보경, 윤석영 등 경기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던 선수들까지 대거 중용됐다. 하지만 정작 월드컵에서 그나마 좋은 활약을 보여준 것은 오히려 손흥민, 이근호, 김승규, 김신욱 등 소속팀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던 해외파 멤버 혹은 K리그 선수들이었다.

결과는 만만한 1승 제물로 여기던 알제리에 4골을 내주며 참패하고, 상대 퇴장으로 인한 수적우위에도 벨기에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등 연이은 졸전과 탈락이었다. 홍명보 감독이 재임 시절 A대표팀의 승률은 19전 5승 4무 10패, 26%에 그치며 1년 이상 재임한 사령탑 중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애초에 대표팀을 제외하고는 성인팀에서의 지도자 경력 자체가 일천했던 홍명보 감독의 경험부족도, 올림픽과 달리 전 세계를 대표하는 명장들과 겨뤄야하는 월드컵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드러났다는 평가였다.

당초 축구협회는 홍명보를 2015 아시안컵까지 연임시키려고 했으나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자진사임 형식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홍명보는 사퇴 기자회견에서조차 자신의 과오를 면피하려 든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2015년 12월에는 중국 슈퍼리그 항저우 뤼청 감독에 취임하며 처음으로 클럽팀 감독에 도전했으나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구단 측과 갈등을 빚은 끝에 2017년 5월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홍명보의 지도자 경력 1기는 화려한 시작과 달리 '용두사미'로 마감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홍명보는 2017년 11월 갑작스럽게 축구협회 전무이사를 맡아 행정가로 다시 한국축구의 중심에 복귀했다. 당시 축구협회는 대표팀의 부진과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 히딩크 복귀파동에 휘싸인 김호곤 기술위원장의 사퇴 등으로 여론이 악화되며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이미지 쇄신의 일환으로 한국축구의 간판스타였던 홍명보가 깜짝 복귀한 것.

사실 홍명보가 애초에 지도자보다 축구 행정가를 먼저 지망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지만, 불과 몇 년전 한국축구의 난맥상을 초래했던 당사자가 그저 보직만 바꿔서 재등장한 '회전문 인사'에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이른바 '축구협회의 황태자'로 불리우던 홍명보의 견고한 위상을 또 한번 보여준 장면으로 꼽힌다.

A대표팀의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U20월드컵 준우승, U23팀의 아시안게임 2연패와 도쿄올림픽 본선 진출 등 각급 대표팀들이 저마다 준수한 성과를 올렸다. 홍명보 본인은 축구계 대표적인 주류 인사로 꼽히지만 김판곤 부회장겸 전력강화위원장 등 비주류 인사들을 적극 등용하여 축구협회의 외연을 넓힌 것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게 행정가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던 홍명보였지만 '지도자로서의 명예회복'은 여전히 한으로 남아있던 마지막 숙제였다. 행정 분야의 최고위직까지 올라갔던 인물이 현장 지도자로서 다시 복귀하는 것도 드문 사례다. 비슷한 경우로는 야구의 김응용 회장(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이 삼성 야구단 사장을 역임한 이후 2013년 한화 감독으로 복귀한 사례가 있다. 홍명보 감독이 클럽팀을 맡은 것은 개인적으로 항저우에 이어 2번째이지만, K리그는 울산이 처음이다.

울산은 올해 정규리그와 FA(축구협회)컵 결승에서 라이벌 전북 현대에 밀려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2020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에서 2012년에 이어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명가의 자존심을 회복했다. 울산은 ACL 우승에도 불구하고 김도훈 감독과 결별하고 또다른 스타 출신 사령탑인 홍명보 감독과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축구 팬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누가 뭐라해도 한국축구의 전설인만큼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과 중국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 지도자로서도 재기를 기대하는 팬들도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 다음 시즌 K리그 우승에 도전해야하는 울산이 클럽무대에서 성공한 경험이 아예 없는데다 현장 공백기가 길었던 홍명보를 영입한 것에 의구심의 시선도 있다.

비록 선수 시절에는 나무랄 데 없는 레전드였지만, 오히려 은퇴 이후 홍명보 감독의 축구 인생은 팬들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연령대별 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이미 전임 감독이 기반을 닦아놓은 강팀을 물려받았고 축구협회의 전례없는 전폭적인 지원과 장기 프로젝트 속에서 런던올림픽의 '황금 세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A대표팀에서도 이미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한 뒤에 지휘봉을 잡았고, 지도자로서 실패이후 다시 축구협회 전무를 맡아 행정가로 깜짝 재기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반적인 축구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특별한 혜택'의 연속이었다.

한국축구를 주도하는 현대가의 일원인 울산 역시 홍명보 감독이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완성된 강팀에 가깝다. K리그에서 2년연속 준우승팀이었고, ACL에서는 아시아 챔피언까지 등극했다. 지도자라면 지금의 울산 감독직은 어떤 명장이라도 탐낼만한 자리였지만, 구단은 굳이 홍명보라는 '이름값'을 선택했다. 홍명보 감독은 2005년을 끝으로 리그 우승과 인연이 없는 울산을 다음 시즌 정상에 올려야한다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됐다.

2014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탈락 당시 "좋은 경험이 됐다"고 애써 위안하던 홍명보 감독에게 후배인 이영표 해설위원(현 강원FC 대표이사)이 "월드컵은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다"라고 쓴소리를 날린 장면은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지도자로서, 또 울산의 사령탑으로서 새 출발하는 지금의 홍명보 감독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다. 지도자 인생 2기를 시작하는 홍명보 감독은 이제 '경험이 아니라 증명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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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울산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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