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잔칫날> 포스터

영화 <잔칫날> 포스터 ⓒ (주)트리플픽쳐스

 
우리는 날마다 죽음을 향해 전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루하루 늙어간다. 그렇게 죽음을 마주치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본인이야 죽고 나면 끝나지만 이때부터 가족들은 분주해진다. 죽음에도 돈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돈이 없으면 장례도 초라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도리, 자식 된 도리도 돈이 없으면 하기 힘든 게 요즘 세상이다. 영화는 차라리 허구이길 바라는 적나라한 상황이 연속으로 등장한다. 러닝타임 동안 내 이야기 같은 서글픈 상황이 기가 막힌다. 슬픈데 웃어야 하고, 아픈데 일해야 하는 현대인을 대변하는 심심한 위로 같다.
 
웰다잉도 돈이 있어야 하는 시대
 
무명 MC 경만(하준)은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아버지의 오랜 간병으로 심신이 지쳤지만 집안의 가장답게 묵묵히 고군분투한다. 가끔 티격태격하지만 동생 경미(소주연)와 경만은 의좋은 남매다. 답답한 병원 생활을 오래 한 아버지의 기분 전환을 위해, 몸이 나아지면 가족끼리 낚시라도 가자며 운을 뗐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영화 <잔칫날> 스틸컷

영화 <잔칫날>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남매는 장례를 치러야 하는 시련에 부딪힌다. 충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식장에 내던져진다. 이미 병원비를 대느라 주변의 돈을 끌어 쓴 상태인지라, 장례를 치를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문상객 음식, 제단 장식, 입관식도 다 돈이었다.
 
황망함도 잠시, 경만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친한 형 대신 팔순잔치 사회를 맡게 된 것이다. 무명 MC지만 원래 받기로 한 보수에 보너스까지 두둑이 챙겨 준다고 했다. 그렇게 경만은 장례비 마련을 위해 홀로 행사길에 오른다. 목놓아 통곡하고 싶은 날 가장 큰 웃음을 지어야만 하는 직업적 역설과 마주한다.
 
작은 시골 마을에 큰 잔칫상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웃음을 잃어버린 어머니를 기쁘게 해 달라는 아들 일식(정인기)의 간곡한 부탁에 경만은 최선을 다한다. 드디어 할머니를 웃게 만들었고 마을 사람들도 흥에 겨워 즐거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필사적인 노력(?)이 역효과를 낸 걸까. 즐거운 잔칫집은 돌연 초상집으로 변한다. 혼란스러운 경만은 받기로 한 금액을 받고 급히 떠나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몰아세운다. 난감한 상황이 이어지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이 묶인 경만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남겨진 자의 슬픔, 치유되지 않는 고통
  
 영화 <잔칫날> 스틸컷

영화 <잔칫날>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한편, 경미는 감정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여러 사람의 등쌀에 시달린다. 쓸쓸한 장례식장에 제일 먼저 경만의 친구들이 왔다. 와준 건 고맙지만 그들의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서로 조의금을 맞추며 돌아올 결혼식을 따져 묻는다. 밤새워 도박판을 벌일 카드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거나, 소개팅을 운운하며 홀로 빈소를 지키는 경미를 힘겹게 만든다. 거기에 떼인 돈을 받으러 온 친척, 위로 대신 훈수 두는 고모, 비용을 독촉하는 장례식장 직원 등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유일하게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고모는 한술 더 떠, 오빠 경만을 나무라며 들들 볶는다. 왜 머리 고기를 하지 않았는지, 곡소리를 왜 내지 않는지, 끊임없는 잔소리로 빈축을 산다. 장례식장의 모든 사람이 오빠만 찾는다. 같은 자식인데 왜 상주는 장남인 남자여야만 할까. 경미는 떠오르는 숱한 물음을 그저 마음속에서만 꾹꾹 눌러 담으며 오빠가 오기를 기다린다.
 
흔히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르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가 보인다고 한다. 죽음마저도 평가되는 인생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고인을 되돌아보고, 상주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장례문화가 사라진 지 오래.

상업화된 장례는 한 시간도 안 돼 끝나버리는 결혼식처럼 제도화되었다. 보여주기 바쁜 결혼식 때문에 결혼하자마자 웨딩 푸어로 전락한 사례도 비슷한 맥락이다. 언젠가부터 살아온 이력 보다 죽은 후에 치장되는 모습이 고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과연 화려한 장례식은 고인이 원했던 것일까. 씁쓸함이 커질수록 남겨진 자의 슬픔도 더해간다.
  
 영화 <잔칫날> 스틸컷

영화 <잔칫날>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잔칫날>의 역설은 깊고 묵직한 울림을 준다. 잔칫집을 떠돌며 웃음을 파는 경만의 비애가 피부로 와닿는 제목이다. 누구 하나 아버지의 근황을 묻거나 남매의 심정을 보듬어 주지 않고 오로지 이해관계만 치중한다. 따라서 잘 죽는 것은 비싸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짊어진 짐도 내려놓을 수 없어 서글프다.
 
<잔칫날>은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4관왕에 빛나는 작품이다. 작품상, 관객상, 배우상, 배급 지원상을 받았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담았지만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 줄 감동을 선사한다.

이 영화가 인상적이라면 <아워 바디>를 연출한 한가람 감독의 <장례난민>을 추천한다. 엄마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는 열네 살 소녀와 동생, 아빠가 겪는 순탄치 않은 여정을 담았다. 소중한 누군가를 애도하는 것조차 자본주의 사회 속 비용을 내야 하는 현실이 따스하게 담겨 있는 24분짜리 단편이다.
잔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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