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 포스터

영화 <조제>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 영화로 남아 있을지 모를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원작으로 2003년 이누도 잇신 감독이 장편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시 담담한 조제와 아련한 츠네오가 숱한 명장면을 만들어내,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멜로 영화 중 하나다. 이를 리메이크 한다는 일은 창작자에겐 무거운 짐일 것이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은 17년이라는 세월과 공간을 뛰어넘어 리메이크라는 큰일을 해냈다. tvN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이미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한지민, 남주혁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김종관 감독은 "원작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본인도 배우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원작 본연의 감정을 지킨 채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탄생한 영화가 바로 오는 10일 개봉 예정인 한국 영화 <조제>다. 사람에 대한 깊은 시선과 인간애가 감도는 멜로와 휴머니즘의 결합이다.
 
고물성(城)에 찾아온 남자
 
 영화 <조제> 스틸컷

영화 <조제>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극 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조제(한지민)는 몸이 불편해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밖으로 나가는 일도 없다. 자신만의 고립된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던 조제 월드에 입성한 영석(남주혁). 두 사람의 만남은 조제의 사고를 목격한 영석이 먼저 다가와 시작된다. 친절의 대가를 밥값으로 대신하는 조제는 번데기탕, 스팸 구이를 내어주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아르바이트와 학교 수업, 취업 준비를 병행하며 평범하게 지내던 대학생 영석은 조제가 신경 쓰여 가끔 들여다본다.
 
그때마다 조제는 진짜처럼 들리는 숱한 공상의 나래를 펼친다. 조제의 부모님은 1986년 베를린에서 만나 1987년 부다페스트에서 자신을 낳았다고 했다. 그 밖에도 아빠는 경찰이었다는 둥, 자기는 세상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지금은 잠시 쉬고 있다는 둥. 때때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읽은 책의 어느 구절에 자신의 이야기를 보태는 조제를, 영석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맞장구치며 들어준다. 처음 만나는 사랑의 특별함을 간직하고 싶은 여자와 이런 여자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겨버린 남자는 시나브로 가까워진다.
  
 영화 <조제> 스틸컷

영화 <조제>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TV도 핸드폰도 없이 다 쓰러져가는 철거촌에서 사는 조제가 세상과 이어지는 끈은 책이었다. 누가 내다 버린 책을 할머니가 주워오면 닥치는 대로 읽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스스로 붙인 이름 조제 또한 프랑수아 사강의 소설을 좋아해 만들었다. 은둔형 외톨이에 까칠한 성격이지만, 책에서 나와 좀 더 밝고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있게 된다. 영석의 도움으로 집도 고치고 읽고 싶었던 사강의 책도 읽어볼 기회를 누린다. 죽을 때까지 하지 못할 것 같았던 놀이동산 데이트도 해보고, 물고기도 보러 갔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장애'라는 벽이 높게 드리워져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조제는 영석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조제의 고물성(城)은 짝이 맞지 않는 신발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신고 있는 사람은 아무 불편함 없다. 이런 장면은 웃풍이 심한 한기에 익숙한 조제와 이를 참지 못해 난로를 피우는 영석의 행동으로 발화된다. 화려했던 꽃이 지고 단풍이 떨어지는 계절의 순환처럼. 꽃들이 예쁘고 조용하게 죽어가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다짐한다. 다시 봄이 올 날을 기약하며 작은 희망을 품어 봐도 좋으니까 말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설정
 
 영화 <조제> 스틸컷

영화 <조제>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조제>는 어쩔 수 없이 원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일본판 조제가 요리에 소질이 있고 책을 좋아했다면 한국판 조제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차린 밥상이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전한다. 그도 그럴진대 소설과 영화, 한국과 일본의 상황, 그리고 17년이란 세월을 메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조제>는 한국식 각색에 힘을 더해,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춘의 고민과 사랑을 톺아본다. 끝이 보이더라도 후회 없이 사랑했던 낭만은 온전히 가슴 속에 남아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지방대, 취업 준비, 인턴, 아르바이트, 연애, 결혼 그 무엇도 만만하지 않은 영석의 장애물은 다리가 불편한 조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산이다. 그래서일까. 섣불리 위로한다거나 거들지 않고 서정적이고 담담하게 그리고, 지긋이 흘러간다. 일본판이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의 시선으로 조제를 신비롭게 다뤘다면 한국판은 조제는 전지적 시점을 차용해 캐릭터의 빗장이 단단히 채워져 있다.
 
대신 사물에도 온기를 투영하는 카메라의 느린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오길 두려워하는 조제처럼 낡고 먼지 덮인 골방에 쌓여있는 물건의 시간이 각자의 사연을 가진 것 같이 보였다.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할머니가 동네 이곳저곳에서 주워 온 온갖 잡동사니는 조제의 집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시력검사표는 조제의 앉은키에 맞게 만들어진 찬장의 덮개가 되어준다. 접이식 양은 밥상에 바퀴를 달아 이동을 편리하게 했고, 다리미는 프라이팬 겸용이 된 귀여운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그리고 장소 헌팅에 꽤 공들인 듯한데, 오래된 아늑한 단층 조제 집부터, 헌책방, 고물상, 유원지, 아쿠아리움, 스코틀랜드까지. 공간이 주는 느낌을 섬세하게 잡아냈다. 거기에 구글 어스를 이용한 다각화된 공간 확장은 감정의 진폭을 거드는 새로운 기폭제로 작용한다.
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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