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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서연씨의 봉제공장.
 정서연씨의 봉제공장.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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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는 엄청 바빴죠. 옛날에는 봉제공장에다가 다락을 만들어놓고, 다락 위에서 잤으니까요. 밑에서는 일하고 위에서는 자고요. 14살짜리가 다락에서 잘 때 화장실을 못가서 밑으로 오줌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죠.  그때는 오히려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했지."

17살 때 미군부대 옆 을지상가에서 시다로 봉제일을 시작했던 정서연(61)씨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외침에 작게나마 '수혜'를 입은 당사자다. 전태일 열사가 사망하고 뒤이어 그의 정신을 계승한 청계피복노조가 등장하자 새벽까지 일을 시키는 게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원래는 일을 그렇게 시켰다는데 내가 일 시작했던 1976년도에는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서 오후 8시에 강제로 상가 문도 닫고 그랬어요. 그런데 사장들이 오히려 더 일찍 출근을 시켰죠. 새벽 6시에 나오라는 식이었어요."

정서연씨의 이야기는 이정기 서울봉제인지회 지회장에게 이어진다. 이 지회장은 청계피복노조에서 '시간단속반'으로 활동했다.

"전태일 열사가 사망하고 나서는 노동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청계피복노조에서 시간단속을 했어요. 오후 8시만 되면 시간단속을 하러 나갔죠. 처음에는 사업주의 저항이 심했죠. 그런데 어린 시다들의 호응이 엄청 났어요. 우리가 가면 공장이 문을 닫는구나 싶으니까요."

시다였던 정씨는 이제 봉제공장의 사장이 됐다. 그는 그 사이에 결혼을 했고 남편과 함께 창신동에 들어온 지는 16년이 됐다. 창신동에서 객공(정해진 단가에 따라서 삯을 받는 노동자)으로 일하다가 아예 봉제공장을 차렸다.

정씨가 일하는 봉제공장에는 더 이상 다락이 없다. 그는 질 좋은 독일제 미싱을 들여놓았고 이전보다는 나은 공장에서 남편과 함께 일한다. 하지만 정씨를 비롯한 봉제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이 쉽게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일감 없어 아예 공장 문 닫기도   
 
 창신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토바이.
 창신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토바이.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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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창신동 인근에는 봉제공장이 1000여 곳 정도 남아있다. 가정집처럼 보이는 곳도 들어가 보면 봉제공장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다. '공장'이라고 말은 하지만 대체로 5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이다. 이곳에는 10인 미만 사업장이 90% 이상으로 봉제노동자 한 명이 봉제공장을 차려서 여러 종류의 미싱을 놓고 일하는 경우도 있다.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에 있던 봉제공장 중 상당수가 동대문에서 멀지 않은 창신동으로 옮겨졌다. 봉제노동자들은 동대문에서 창신동까지 오토바이를 이용해서 원단을 실어 나른다. 옷 하나를 만들려면 오토바이가 15번 이상 오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일대에서 오토바이는 경제 지표나 다름없다. 하지만 오토바이가 최근 창신동에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좋을 때는 창신동 인근에 봉제공장이 3000여 곳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미얀마, 인도네시아와의 단가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서, 창신동은 지속적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내리막길을 걷던 창신동 봉제공장은 코로나19 이후로 더 어려워졌다. 일감이 들어오는 날에는 주로 대량으로 들어오니 날밤을 새우면서 일을 하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아예 일감이 없어서 공장문을 닫는다.

일이 언제 또 들어올지 모르니, 원청이 요구하는 시간 내에 맡겨진 일을 소화해야 한다. 노동시간은 한도 없이 늘어난다. 생산품의 질은 자연스럽게 저하된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창신동은 점차 갈곳을 잃고 있었다. 재단부터 완성품 납품까지 단 하루면 된다는 '원데이 생산체계'는 창신동이 말하는 경쟁력이지만, 사실 이 말은 고숙련 봉제노동자의 값싼 노동에 기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30~40년 된 숙련공들마저도 모두 최저임금에 준하는 돈을 받으면서 일한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단가 차이가 나지 않는 탓이다.

"40년도 넘었는데 생산량은 되려 떨어지고 단가는 그대로예요. 봉제공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공장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은데 여기 자기 공장 갖고 있는 사람 몇 명 없어요. 다들 세 얻어서 하는 거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일은 무지개를 좇는 일이 되었다. 일감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창신동에는 부부가 같이 작은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감이 많을 때는 부부도 손이 부족해 자식마저 뛰어든다. 창신동에서 시아게(마무리 손질)집을 하는 이경미(54)씨도 그런 경우였다.

"잘 될 때는 공장에 6명도 있었어요. 지금은 3명 있어요. 먼지구덩이에 아들 재워놓고 살면서도 돈이 들어오는 보람이 있었어요. 지금은 하루하루 큰일이에요. 여기서 데모하고 그런 건 어림도 없어요.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2시간 넘게 일해도 좋으니 인건비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루에 16시간을 일하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아예 일이 없어요. 차라리 가격이라도 정해져있으면 좋을 텐데 바지 하나에 500원 받더라도 옆집에서 '450원에 해드릴게요. 저희 (일감) 주세요'라고 하면 바로 넘어가 버려요. 30년 전 단가하고 지금 별로 차이가 없어요. 물가는 엄청 올랐거든요. 달라진 점이요? 예전에는 가끔 돈을 안 주는 집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돈은 주더라고요."


1970년대 봉제노동자들의 주된 투쟁 상대가 봉제공장 사업주였다면, 이제는 봉제노동자들 자신이 사장이 됐다. 투쟁 상대가 불명확해지니 누군가를 탓하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봉제노동자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건 당장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단가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단가를 내려서라도 어떻게든 일감을 받아내려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일감을 따내려면 옆 공장과의 단가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수갑을 채우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봉제인의 처우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으니 창신동을 찾으려는 젊은 봉제인은 많지 않다. 요즘 40~50대도 창신동에선 '청춘'이다. 미싱사 김명선(55)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택배노동자랑 똑같아요. 택배도 개인사업자라서 문제가 되는 거 아니에요? 봉제업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바꿔보긴 해야할 것 같아요. 다들 나이가 많고 옆에다가 약을 쌓아놓고 있어요. 창신동에 살면서 미싱 돌리다가 고꾸라져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동대문에서 주는 일감을 시간 맞춰서 처리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면 무리하게 되니까요.

한 대학에 미싱 강의를 간 적이 있는데 학생이 손을 들고 선생님처럼 미싱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해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지금 당장 공장에 가서 3000원짜리 블라우스 50개를 박을 수 있어야 겨우 밥 먹고 산다고 말해야 하나요?"
 

과거 어린 여공들이었던 이들은 '사장님'이 됐지만 여전히 단가를 두고 다퉈야 하는 처지다. 나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창신동에서 노동자들은 봉제업과 더불어 늙어가고 있다.

오히려 지금이 전태일이 일했던 1960년대 무렵보다 더 열악할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1969년 무렵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했던 이숙희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은 '전태일이 꿈꾸었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기업'이 창신동에 있느냐'는 질문에 쓸쓸하게 웃었다.

"모범기업, 저는 아직 못 찾은 것 같은데요. 그때랑 지금이랑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요? 글쎄요. 전기다리미가 스팀다리미로 바뀌고, 기계가 반자동이 됐다는 것? 50년 전에 전태일은 이미 가진 자들의 횡포가 횡행한 지금의 세상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이 기사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제작된 <전태일50> 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전태일50> 신문 제작에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전태일' 이야기를 신문으로 만들겠다는 현직 언론사 기자, 사진가, 활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 구독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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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은 쪽지나 메일(alreadyblues@gmail.com)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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