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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가 최근 비밀을 해제한 ‘1959년 핵무기 구비연구(Atomic Weapons Requirements Study for 1959)’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에만 90개 핵무기 타격목표를 설정하였다. 도시는 28곳이며 청진에만 6개의 핵공격 목표가 있었다.
▲ 1956년 기준 미국이 핵무기로 공격할 북한의 목표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가 최근 비밀을 해제한 ‘1959년 핵무기 구비연구(Atomic Weapons Requirements Study for 1959)’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에만 90개 핵무기 타격목표를 설정하였다. 도시는 28곳이며 청진에만 6개의 핵공격 목표가 있었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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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 것은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이다. 미국은 코리아전쟁 때부터 조선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공공연히 밝혔고, 조선은 이로 인해 핵무기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즉 조선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의 대 조선 정책이 실패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코리아전쟁 당시 맥아더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해 핵폭탄을 투하할 것을 트루먼 정부에게 요청하였으며, 트루먼 정부 역시 내부적으로 이러한 제안을 검토하였다. 이런 이유로 조선은 미국의 핵공격을 우려하였고 1954년 인민군 내에 '핵무기 방위부문'을 설치하였다.

미국은 코리아전쟁 이후 1958년부터 전술핵무기를 조선반도에 배치함으로써 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시켰다. 베트남 공산화 직후 1976년 포드 행정부의 슬레진저 국방장관은 "전략핵은 물론 전술핵을 조선반도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공언하고, 핵전쟁을 전제로 한 한미군사훈련인 '팀 스트리트' 훈련을 정례화 하였다.

소련의 핵우산을 불신하여 영불처럼 핵무기 독자 개발

조선의 입장에선 "미국이 조선에 대해 핵무기 공격을 하더라도 소련이 미국에게 보복하는 핵우산 정책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핵무기를 개발한 것 역시 유럽이 핵무기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소련에게 보복하는 핵우산 정책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의 입장에선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이 미국과 전면적인 핵전쟁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조선은 중소분쟁 이후 등거리 정책을 취하여왔는데 이로 인해 "중소에게 안보를 의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김일성 주석이 1967년 군 지휘관 회의에서 원자탄 보유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며, 1970년 박성철 부총리는 일본 사회과학 대표단에게 "1972년까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조선은 내부적으로 꾸준히 핵무기 개발에 나서면서도 1974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하였다.

1990년 들어 한국이 소련과 중국과 수교하는 반면 조선은 미일과 수교는커녕 서방으로부터 제재와 고립을 당하자 체제보장수단으로 더욱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선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에 패권국가인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는 편승(便乘) 정책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는 서구화되어 이들과 동맹을 맺어 미국에 대항하는 대외균형화정책도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중국이나 러시아는 조선에게 핵우산을 제공하지 않았다.

핵무기 포기한 후 침공당한 후세인과 가다피를 반면교사

따라서 조선은 자체 무장을 하는 내부 균형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소련 붕괴 이후 핵무기를 조속히 실전에 배치하고자하였으며, 그에 따라 핵탄두뿐만 아니라 이를 운반하는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가속화하였다. 조선은 1998년 장거리미사일 기술을 과시할 수 있는 인공위성인 '광명성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 경제협력체계가 와해되자, 조선의 경제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은 계속해서 조선에 대해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견디기 힘들 정도의 군비 경쟁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은 핵무기를 보유하여 재래식 무기경쟁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은 핵무기 개발 이후 군비경쟁에 쏟아 부었던 국가자원을 경제개발에 투하하고자 하였다.

2001년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조선을 이라크, 리비아, 이란과 함께 '악의 축' 국가로 설정하였다.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이라크, 리비아를 침공하자, 조선은 핵무기 개발에 더욱 주력하여 2010년대에 이르러 핵탄두와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사실상 완료하였다.

소련은 북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막고자 핵에너지 기술 제공

소련은 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막고자 핵발전소에 대한 협력을 제공하였다. 조선은 소련과 1956년 '핵연구기관 설립조약'을 맺은 직후 30여 명의 물리학자를 소련의 '드부나 핵 연구소'에 파견하였다. 조선은 1959년 소련과 핵 개발에 대한 협력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조소원자력협정'을 맺었다. 조선은 1962년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1965년 소련으로부터 IRT-2000 원자로를 도입하여 핵원자로를 건설하였다.

1970년대 이후 20여 개국이 핵무기 개발에 나섰는데, 남아공이나 이스라엘 등 주로 친미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소련은 이들 나라들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시키고자 먼저 조선이 NPT에 가입하기를 원하였다. 소련은 조선에 대해 추가적인 핵기술의 이전,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고 조약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조선은 1985년 NPT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NPT 가입 이후 핵사찰의 전제가 되는 핵안전협정의 체결을 거부하였다. 이에 미국은 1989년부터 조선에 대한 정찰을 강화하고 조선의 플루토늄 생산을 문제 삼았다. 1994년 6월 미국은 북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고려하였으나 조선의 반격에 대한 우려와 한국정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행정부의 제네바 합의를 무산 시킨 미국 의회, 비핵화 마지막 기회 놓쳐

미국은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서거로 인해 조선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상황을 통제하고자 조선과의 협상에 힘을 쏟았다. 같은 해 10월 조선과 미국은 "조선이 핵 개발을 중단하는 대신 경수로 건설 지원과 중유를 제공받는다"는 제네바 핵합의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미국 의회는 이 합의 이행에 필요한 재정지출을 거부하여 합의가 파기되었다.

1999년 아미티지 보고서는 협상을 강조하였고 1999년 페리보고서 역시 제네바합의의 이행을 강조하였다. 두 보고서 모두 "제네바 합의로 북 핵을 포기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올브라이트 장관 역시 조선의 비핵화는 경제적 보상이 아니라 전쟁 위험을 제거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고 이를 위해 미국과 조선의 직접적인 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선과 미국은 1999년 페리의 방북, 올브라이트의 방북으로 미사일 개발 중단까지 거의 합의하였다. 조명록 조선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2000년 10월 미국을 방문하여 제네바 합의 준수, 북의 미사일 발사 중단, 정전협정의 평화보장체계로의 전환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미공동콤뮤니케'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200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 대통령 소속의 민주당이 정권재창출에 실패함에 따라 협상이 중단되었다.

9.11테러 이후 러시아가 아닌 가상국가가 필요한 미국이 북핵을 방치

새로이 등장한 부시 대통령이 조선과의 협상을 미루는 사이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대통령은 대외정책을 더욱 강경한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은 "조선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하고 적대적 의도가 없다"는 2000년의 공동발표문을 재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에 조선은 제네바협정의 파기를 선언하였다.

2002년 캘리 특사가 방북 후 "조선이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핵무기를 계속 개발하여왔다"고 보고하면서 제네바 합의는 최종적으로 파탄됐다. 그 이후에도 조선은 핵 포기의 대가로 주권인정, 불가침조약, 제제 해제 등을 계속 요구하였다. 2003년 국제원자력기구가 조선에 대하여 다시금 핵 시설에 대한 감시를 요구하고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에 대한 해명을 촉구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하자, 조선은 NPT 조약을 탈퇴하였다.

2005년 6자회담이 시작되었지만 경수로 건설과 핵무기 포기의 선후를 놓고 이견이 발생하였다. 2006년 북미는 합의문을 도출하였으나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예치된 조선의 자금에 대해 제재를 풀지 않아 합의문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조선은 2006년 7월 5일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를 시험 발사하였고, 같은 해 10월 9일 첫 번째 핵탄두 폭발 실험을 하였다. 미국은 조선의 공세에 양보하여 조선의 요구대로 BDA에 동결된 2천500만 달러를 미국 내 은행을 거쳐 러시아 극동상업은행의 조선계좌에 송금하도록 허용하였다. 조선이 직접 송금 받는 것이 아니라 BDA가 미국 은행에 송금한 후 미국 은행이 다시 조선에 송금하도록 한 것은 조선이 국제금융결제시스템의 제재를 무력화하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반도를 뒤흔든 백년의 국제정세>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태그:#바이든의 대북정책, #제네바합의, #북한 핵무기, #조미공동콤뮤니케,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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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12년간 기관지위원회와 정책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연방제 통일과 새로운 공화국』,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등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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