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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 위령제에서 제문낭독을 하는 이종덕(단상 우측에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이종덕)
▲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 위령제에서 제문낭독을 하는 이종덕(단상 우측에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이종덕)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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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이협우 잔당들아 이 땅 위에서 물러가라'

1960년 11월 13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자 위령제가 열리는 경주시 계림국민학교 교정에는 단상이 만들어지고 모두 6개의 현수막이 걸렸다. 가운데 상단에 걸린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 현수막 아래에는 '영세불망합동영위'라는 글귀가 적힌 간판이 걸렸다.

간판 왼쪽에는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 주리라', '학살관련자는 모든 공직 및 정치에서 물러가라' 라는 현수막이, 오른쪽에는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살인마 이협우 잔당들아 이 땅 위에서 물라가라' 는 현수막이, 간판 아래에는 '학살자 처벌을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한국전쟁 전후 경주에서는 민보단 이협우 일당에 의한 민간인 200여명 학살 등 총 86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위령제에 모인 유가족과 4천여 경주시민의 염원이 6개의 현수막에 모두 응축돼 있었다. 단상에는 경주유족회 김하종 회장과 내빈이 착석했다. 18육군병원장 출신의 오정국 국회의원을 비롯해 김종해(감포, 전직 도의원), 황한수(안강, 육군사관학교 졸) 의원도 참여했다.

이날 위령제에는 참의원 김철과 변호사 최근식·김봉태, 한학자 김창준이 참여했으며 경주경찰서장, 이채우 경주시장과 교육장, 법원장과 대구지검 권오택 경주지청장 등 경주의 기관장과 유지들도 모두 자리를 지켰다.

경주중·고등학교 교사 임위혁이 검정 양복에 '근조' 리본을 달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단상에 올랐다.

"지금부터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를 거행하겠습니다. 모두 일어나셔서 희생자에 대한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한국전쟁 전후에 경주군(현 경주시)에서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 민보단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령들을 위해 묵념하겠습니다. 일동 묵념."

이날 사회를 본 임위혁은 위령제 몇 주 전 경주유족회 사무실로 김하종을 찾아왔다. "회장님, 제가 위령제 사회를 보면 안 되겠습니까?" 임위혁은 산림조합장을 하던 자신의 부친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었다고 고백했다. 이에 김하종 회장이 흔쾌히 동의해 사회를 맡게 됐다.

고등학생 추도사에 식장은 울음바다

묵념이 끝나고 제문(祭文) 낭독이 이어졌다. 그런데 단상에 등장한 이는 하얀 소복을 입은 여성 이종덕이었다.

"유세차, 1960년 11월 13일 경주유족회원 일동은 무릎 꿇고 머리 숙여 삼가 아뢰옵니다. 청사에 빛날 4.19혁명으로 민주반역도당인 이승만 전제정권 하에서 불법과 부정을 감행한 유례없는 동족 대학살극의 희생자인 순박한 양민을 적색분자 또는 반국가적인 존재로 조작되어 집단적인 학살을 당하고...(경주유족회,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 취지발기서. 1960.10.1> 중에서 발췌)"

발 디딜 틈도 없는 식장 곳곳에서는 울음이 터졌다.

"무고한 생명과 재산약탈과 방화를 자행한 때를 회고하면..." 이 대목에서는 운동장에 있는 유가족들 모두가 통곡했다. "삼가 구천을 헤매는 영현님들 해원 안식하옵심을 축원하옵니다. 상향."

제문 낭독을 마친 이종덕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했다. 6.25 직후 남편 조인환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겪은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일거에 떠올랐다. 식장에 참가한 수천여 명의 유가족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이어서 불국사를 비롯한 경주 시내 사찰 스님들의 독경이 있었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의 해원, 안식을 위한 것이다. 이 독경은 재가불자인 조인자가 동분서주하면서 준비했다.
 
 경주공업학교 시절의 조희덕
 경주공업학교 시절의 조희덕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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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과 경주시장의 추도사에 이어 유족 추도사 순서가 왔다. 그런데 단상에 등장한 이는 짧은 스포츠 머리에 검정색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쟈가 누구인교?" "쫌전에 제문 낭독한 집 아들래미 아닌가베!" "아! 경주공고 다닌다는 갸여?"

식장 전체가 웅성거렸다. 4천여 명이 모인 합동위령제에 유족을 대표해 추도사를 하는 이가 다름 아닌 고등학교 3학년생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내 곧 조희덕(당시 만 18세)은 꼿꼿한 자세로 추도사를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덟 살 때 경찰에 끌려가 학살 당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한을 푸는 심정으로 추도사를 했다.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난, 60년 전 경주 계림국민학교의 슬픈 풍경이었다.

시동생 대신 끌려가 처형당해

"조국환 있냐?" 경주경찰서 강동지서 순경들이 구두를 신은 채 마루에서 고함을 질렀다. "국환이는 지금 집에 없소. 근디 와 그러시오?" "네 놈이 국환이 형이냐. 잘 됐다. 너라도 대신 가자"라며 경찰들은 조인환(당시 33세)의 소매를 끌었다.

조인환의 아내 이종덕이 경찰 앞을 가로막았다. "왜 죄 없는 사람을 데려갑니까?" "물어볼 말이 있어 그러는 거요. 잠시면 됩니다." 소리를 꽥꽥 지르던 경찰과는 달리, 다른 경찰은 이종덕에게 정중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경찰에 끌려간 조인환은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1950년 8월 1일의 일이었다.

조인환의 아들 조희덕(당시 8세)은 다음 날 부조역에서 아버지를 연행해 간 경찰들을 만났다. "와, 울 아버지를 돌려주지 않는교?" "며칠 있으면 돌아갈 것이다." 경찰은 희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경찰의 그 말은 허언이 되었다. 강동지서에 3일간 구금되었던 조인환과 보도연맹원들은 이후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로 끌려가 집단학살 당했다. 처형된 이들은 당시 경주군(현재의 경주시) 강동면, 안강읍, 천북면 보도연맹원 약 100명이었다.

이후 이종덕이 남편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신당리 현장에 갔지만,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 시동생이 없다는 이유로 대신 끌려가 학살된 남편을 생각하면 이종덕은 밥 한 술 떠넘기기 힘들었다. 그렇게 살아온 10년 세월이 지났다.

이날 합동위령제에서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은 이종덕은 '조만간 특별법이 생겨 남편의 명예회복이 되겠지'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산부도 경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이종덕이 나와!" "누구신교?" "당신을 반국가 혐의로 체포한다."

위령제 거행 후 반년이 지난 1961년 5월 18일. 갑작스레 이종덕이 끌려간 곳은 경주경찰서 유치장이었다. 5.16 쿠데타 직후 군인들 세상에서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유치장에 끌려온 이들은 모두 이종덕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유족회 부회장 김성학과 부녀위원 유두리가 있었는데, 유두리는 내남면 사람으로, 남편 이종개가 1949년 5월 3일 학살되었다. 최갑연은 경주시 유족으로, 1950년 8월 11일 남편 권복술이 내동지서로 끌려가 행방불명되었다.(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

임산부도 있었는데, 바로 현정숙으로 합동위령제 준비위원이자 연결위원이었다. 이외에도 오창섭과 손화익, 사회를 본 임위혁이 있었다. 이렇게 총 8명이 경주경찰서에서 4개월 동안 구금되어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하루는 경찰이 "트럭 탈 준비해라"는 소리에 모두 '죽으러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한참이 지나도 호출하는 소리가 없자 이종덕과 유치장 동료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넉달 동안 매일 아침 조희덕이 어머니 이종덕을 면회하기 위해 경주경찰서로 달려갔지만 어머니를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4개월 후 이들은 석방됐지만 모두 몸이 퉁퉁 붓고 운신을 할 수가 없는 만신창이 상태였다. 임산부 현정숙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경주 중·고등학교 교사로 위령제 사회를 맡았던 임위혁은 석방 후 파면 당했다(이들 중 이종덕과 김성학, 최갑연, 오창섭은 경찰서에서 당한 쿠타와 고문 후유증으로 50대 중반을 못 넘기고 생을 달리한다).

석방된 후에도 이들은 경찰의 감시와 연좌제로 고통 받았다. 이종덕 역시 '빨갱이'로 낙인 찍혀, 경찰이 집으로 수시로 찾아와 괴롭혔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고, 친정아버지와 오라버니만 왕래했다. 한때 양반 집안으로 소문 났지만, 이제는 동네에서도 고립된 신세가 되었다.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받은 편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받은 편지 봉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받은 편지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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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왔습니더." 우편배달부가 전해준 편지봉투를 든 이종덕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봉투 뒷면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1963.7.12.~1969.10.20.)이라고 쓰여있는 게 아닌가. 자신이 한 달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쓴 편지의 답신이 온 것이다. 1967년의 일이었다. 

편지에는 안부인사 후에 "귀하께서는 8.15해방 후 우리민족이 국토분단의 비운과 예상치 않았던 6.25 괴뢰 불법 남침 등으로 당시 일부 불순세력의 선전선동과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본의 아닌 일시적 과오로 요시찰 대상자로서 수일에 이르렀으나..."로 이어졌다. 다행히 결론은 이종덕이 국가시책에 적극 협력했기에 요시찰대상에서 완전삭제 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시찰대상에서 삭제한다는 편지
 요시찰대상에서 삭제한다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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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덕은 뛸 듯이 기뻤다. 경찰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장남 조희덕마저 신원조회에 걸려 취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이종덕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종덕은 부산 태화고무신공장에서 고무신을 받아 와 경주 안강시장에 내다팔고, 또 한편으로는 사과농사를 지어 부산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종덕의 머릿속은 아들 취직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 이런 사연을 들은 이종덕의 먼 친척 뻘인 권상홍이 후일 중앙정보부장을 하게 되는 이후락(제6대 중앙정보부장, 1970.12.21~ 1973.12.3.)에게 의견을 구했고, 이후락은 "이종덕 여사 보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탄원서를 쓰라고 해보시오"라고 조언한 것이다.

그런데 육군 대위 출신인 권상홍은 왜 이종덕의 사연을 이후락에게 전했을까? 거기에는 동병상련의 입장이 있었다. 권상홍 아버지 권오석은 경주경찰서장과도 교분이 있는 이로, 차량 사업을 하던 지역 유지였다. 그런데 1949년 권오석은 딸을 외동읍에 출가시키고 하룻밤 자고 내남면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협우 내남면 민보단장에게 붙잡혀 학살 당하고 말았다. 당시는 한국전쟁도 일어나기 전으로 이협우가 내남면의 악귀로 소문난 때였다. 권상홍 역시 피학살자 유족이었던 것이다.

이후락의 조언을 용감하게 실천한 이종덕은 결국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정치적 사면장을 받을 수 있었다. 여덟 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다니다 근근이 강동국민학교, 안강중학교, 경주공고를 졸업한 조희덕에게 한 가닥 빛이 비쳤다.

을지훈련 때마다 비밀인가 못 받아

이후 조희덕은 1968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강동면사무소 근무를 시작으로 월성군청을 거쳐 1976년에는 경주보훈지청에서 일했다. 하지만 조희덕은 1998년 명예퇴직 때까지 32년간의 공직생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완전히 끊어진 줄 알았던 '빨갱이'라는 꼬리가 평생을 뒤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을지훈련은 민간, 관청, 군인이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훈련으로 민방공 훈련, 등화관제, 야간 통금 훈련, 교통 통제 따위의 훈련을 한다. 그런데 을지훈련 때마다 조희덕에게는 '비밀인가'가 나오지 않았다. 즉, 대한민국 정부에게 조희덕은 영원히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조희덕은 그게 서운했다. 자신이 아무리 공직생활을 열심히 해도 국가는 자신을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는 그 사실이...

조희덕(79세, 경주시 강동면)은 앞으로 출범할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청할 예정이다. 그는 "부친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국가가 유족에게 응분의 배·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60년 전 고등학생 신분으로 4천여 명의 군중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던 그의 기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1960년도 경주유족회 회칙을 들고 서 있는 조희덕
 1960년도 경주유족회 회칙을 들고 서 있는 조희덕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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