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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의 섬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는 진리선착장
 홍매화의 섬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는 진리선착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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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사이로 흰 물체가 보였다. 거북이가 느린 걸음으로 육지 나들이를 하는 듯 슬로우모션이었다. 거북이 같은 흰 물체는 하나, 둘, 점점 늘어나더니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물체가 해안가로 다가왔다.

진리선착장 근처 집에서 갑자기 나타난 물체를 신기한 듯 쳐다보던 구철수(가명. 1939년생)는 엉덩이가 들썩여 방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흰 거북이로 생각했던 물체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천천히 걸었던 이유는 광목천으로 손이 뒷결박 당했기 때문이었다.

방문을 열고 고무신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립문을 나서려는 순간 엄마가 "어디 가냐?"하면서 철수의 귀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밖에서 숟가락을 방 문고리에 걸며, "방에 콕 쑤셔박혀 있어라"고 했다. 굳이 엄마가 엄포를 놓지 않았어도 돌아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음을 소년 구철수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엄포도 소년의 호기심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구철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동무들, 군가 준비. 반동에 맞춰 노래한다. 노래는 인민항쟁가" 앞에 선 이의 지시에 따라 일렬로 서 있던 젊은이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함성을 지르는 듯이 노래를 불렀다.
 
"원쑤와 더불어 싸워 죽은 /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어라 깃발을 덮어다오 / 붉은 깃발을 그 밑에 / 죽기를 맹서한 깃발"
 
소주병에 신나 담은 이들
 
농협창고에 구금된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진리선착장에서 실려나간 바다
 농협창고에 구금된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진리선착장에서 실려나간 바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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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끝나자마자 청년들은 소주병에 뭔가를 담았다. 나중에야 신나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 소년은 '왜 빈 병에 술을 담지'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자제력은 없었다. 소년은 쪽방 뒷창문을 넘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도둑고양이처럼 다가갔다.

소주병에 신나를 담은 이들은 소주병 주둥이를 광목천으로 막아 심지를 만들었다. "준비"하는 소리와 동시에 성냥불이 그어졌다. 광목천에 불이 붙었다. 뒷결박을 당해 다섯 명씩 줄지어 선 이들은 앞에 선 이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를 예감하고 공포에 떨었다.

"던져"라는 소리와 함께 불붙은 소주병이 묶여 있는 이들을 향해 돌진했다. 머리와 가슴, 무릎에 맞자 순식간에 흰옷 입은 이들의 전신에 불꽃이 튀었다. '악' 소리와 함께 몸부림을 쳤지만 도망가지 못하게 다섯 명을 연이어 묶었기에 제자리에서 뒹구는 수밖에 없었다.

살이 타는 냄새와 동시에 얼굴이 이그러지고 콧물, 눈물과 동시에 몸뚱아리의 모든 구멍에서 물과 피와 오줌, 똥이 쏟아져나왔다. 악마들의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불꽃이 사그라지자 소주병을 던진 이들은 대나무로 만든 창으로 쓰러져 있는 이들을 쑤셨다. 이른바 '확인 사살'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피의 제전은 오전부터 시작해서 종일 걸렸다. 소년이 어림짐작으로 셈을 해 보았을 때, 선착장에서 소년의 집까지 60미터 거리였는데 묶인 사람들로 북적였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200~300명은 족히 될 인원이었다.

화염병에 화상을 입고 대나무창으로 확인 사살 당한 이들이 10명이 되자, 젊은이들은 시신을 선착장에 있던 낚시배로 옮겼다.
 
낚시배에 담긴 시체

원래 임자도는 낚시배를 이용해 민어를 잡기로 유명했다. 그랬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조업 중단이 결정되어 낚시배는 진리선착장에 묶여 있었다. 그렇게 묶여 있던 배가 80일 만에 첫 항해를 나선 것이 시신을 옮기기 위해서였다.

낚시배는 폭 2미터에 길이가 10~15미터 정도였고 돛도 달았다. 낚시배의 임자들이 왕방울만 한 눈을 한 채 노를 젓기 시작했다. 10구의 시신을 애써 외면했다. 같은 마을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고, 다른 마을 사람이라지만 평소 임자면 소재지인 진리시장에서 오다가다 마주친 이들이었다.

더군다나 지역 유지들이라 목포를 자주 오갔기에 선착장에서 수시로 스쳐 지나가며 눈인사를 했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얼굴 형체는 이그러진 채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화염병을 던진 이들 중에 일부가 낚시배에 승선했다. 그들은 사전에 배에 실어놨던 큰 돌맹이를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시체들의 가슴에 매달았다. 노를 젓는 이들은 저들이 하는 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지만 만류할 수 없었다.

임자도를 출발한 배가 수도가 보일락 말락 할 지점에서 멈췄다. 청년들이 2인 1조가 되어 시체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헹가래를 치더니 끝내 바다로 던졌다. 10구의 시신이 물고기 밥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수백 명의 임자도 주민들이 물고기 밥이 된 것은 1950년 10월 4일 경이었다. 후퇴했던 대한민국 경찰이 임자도에 오기 보름 전이었다. 군경이 목포에 도착한 것은 10월 2일이었지만 신안군 임자면에 도착한 것은 10월 19일이었다.
 
민간인 학살 터 된 이유
 
진리선착장에서 배에 태워져 수장된 돗
 진리선착장에서 배에 태워져 수장된 돗
ⓒ 네이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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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서는 신안군을 천사의 섬이라 명명한다. 1004개의 섬이 있다고 해서 이를 홍보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는 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로 총 1,025개의 섬이 있다. 하늘에서 목포 앞바다에 흙을 뿌려놓은 듯한 전경이다.

우리나라 섬의 1/4이 있는 복잡한 지형만큼 신안군의 역사는 복잡하다. 현재의 전라남도 신안군은 1896년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지도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에 무안군에서 분군되어 지금의 신안군이 되었다. 신안군청이 목포에서 현재 신안군 압해읍으로 이주한 것은 불과 13년 전인 2011년도였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당시 임자도를 포함한 신안은 무안군에 속해 있었고, 당시 무안군청과 무안경찰서는 목포에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더욱 복잡한 것은 무안경찰서가 육지부 지역만을 관할하고 무안의 도서지역은 목포경찰서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임자도는 목포경찰서의 관할이었다.

신안군 임자도가 한국전쟁기 전남 영광군과 더불어 최대의 학살 터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전남 영광과 신안군, 그중에서도 임자도가 지방 좌익에 의한 최대 민간인 학살 터가 된 데에는 전통적인 계급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주와 소작 간의 계급 갈등은 조선 전 지역에 해당하지만 특히 신안군에서는 그 갈등이 최고점에 이르렀다. 그 갈등으로 1923년도에 암태도 소작쟁의가 전국적 조명을 받으면서 다음 해까지 이어졌고, 1924년에는 지도에서, 1925년에는 자은도에서 진행됐다.

암태도의 경우 최대 지주 문재철이 소작인들의 요구에 경찰력을 동원해 탄압 일변도로 나가자 암태도 소작인들은 두 차례에 걸친 목포 원정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아사(餓死) 투쟁을 전개해 목숨을 건 소작쟁의를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농민들의 적극적인 권리 증진 운동은 농민들의 삶을 개선시킨 반면에 전통적인 계급 갈등이 격화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공(人共)시절에는 그 갈등이 극점을 이루었다.
 
최대 지주의 아들, 타깃이 되다
 
진리 앞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다가 백산에서 학살당한 김장백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
 진리 앞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다가 백산에서 학살당한 김장백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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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제6사단은 1950년 7월 24일 목포를 점령하였다. 인민군은 소규모로 신안군의 지도읍, 압해면을 거쳐 자은면, 임자면 등지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목포로 돌아갔다.

이후 지방 좌익이 신안군 각 지역을 관할했다. 인민군이 목포를 점령한 직후 신안, 무안지역에서는 목포 앞바다에서 희생당한 보도연맹원 가족들에 의해 경찰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또 신안, 무안 일대의 지방 좌익은 군·면·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익인사들을 체포·구금·살해하였다. 임자도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우익인사, 경찰 가족, 지역 유지들을 임자면 소재지에 있는 농협창고에 구금했다.

그러다가 경찰이 임자도에 수복하기 보름 전인 1950년 10월 4일 창고에 구금된 이들 중 일부는 석방시키고, 나머지 인원을 1km 떨어진 진리선착장으로 이송한 것이다.

임자면 대기리 출신 김장백은 그 아버지가 임자도 최대의 지주였다. 또한 김장백의 아들 한 명이 전쟁 당시 경찰이었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장백은 지방좌익의 타깃이 되었다.

인공 초기에 분주소에 구금된 김장백은 진리선착장으로 끌려가서 낚시배에 실려 바닷물에 던져졌다. 앞서의 진리선착장 사건보다 2개월여 이른 시점이다.

창에 찔려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도 의식을 잃지 않고 있던 그는 온갖 힘을 다해 광목천을 풀었다. 가슴에 메달은 바위보다 살려는 그의 의지가 더 강했다. 헤엄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던 그는 죽기 살기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간신히 도착한 곳이 수도였다.

그는 2개월간 수도와 임자면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본가인 임자면 대기리에서 지방좌익에게 붙잡혔다. 그는 소나무숲인 회산마을 백산(모래산)으로 끌려가 창과 칼에 찔린 후 생매장됐다. 구사일생으로 진리 앞바다에서 살아난 김장백은 그렇게 모래산에서 허무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장백 집안에서는 그만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김장백이 백산에서 죽임을 당할 때 그의 둘째 부인인 조수일도 같이 생매장당했다. 또한 경찰이었던 자식은 6.25가 나자 육지에서 임자도로 피난 온다는 것이 범의 아가리로 들어온 격으로 지방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김장백 부부와 아들 5형제를 포함한 10여 명(12~14명)이 진리 앞바다와 모래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지주 집안이라는 이유로,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들의 죽음 앞에는 법이나 절차라는 규정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저 광기에 사로잡힌 지방좌익들의 충혈된 눈자위만이 있을 뿐이었다.

1950년 10월 4일 진리 앞바다에서 살아남은 이가 또 한 명 있었다. 임자면 삼두리 저동마을 김아무개였다. 앞의 김장백처럼 그는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났다. 이후에도 지방 좌익에게 추가적인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1950년 겨울에 익사한 것이다.

매년 3~4월이 되면 임자도는 붉게 변한다. 홍매화와 튤립으로 섬이 온통 뒤덮이기 때문이다. 74년 전 '피바다'였던 진리 앞바다 인근에도 '홍매화의 섬'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뿐이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을,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던 광기(狂氣)의 시대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글 바랄 뿐이다.

태그:#임자도, #진리선착장, #지방좌익, #지주, #농협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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