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낙인> 포스터

<낙인> 포스터 ⓒ (주)뉴플러스오리지널

   
제40회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언급을 수상한 <낙인>은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낙인>은 독특한 실험영화다. AI(인공지능)와 페미니즘을 SF라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AI와 페미니즘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실존'이다. 실존은 구체적·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철학에서의 실존은 인간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며 존재하는 주체적인 상태를 말한다.

영화 속 주인공 백조경은 젊은 나이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 셀럽이다. 그녀의 작품이 영화화가 결정되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다. 하지만 또 다른 사건이 그녀를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다.  

그녀의 몰래카메라가 유출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백조경에게는 '낙인'이 찍힌다. 영화의 영제 'Fallen'처럼 추락하게 된다. 피해자는 백조경이지만 사회적인 시선은 온전한 동정을 내포하지 않는다. 백조경이 동성애자라는 점과 어머니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점이 추가로 알려지면서 제작자는 사과를 강요한다. 백조경은 피해자인 자신이 사과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거부한다. 파티장의 그녀는 기자와 문화평론가의 냉소적인 시선과 제작자의 분노를 홀로 견뎌낸다.   

창고 드럼통에 갇힌 백조경
 
 <낙인> 스틸컷

<낙인> 스틸컷 ⓒ (주)뉴플러스오리지널

 
그리고 다음 장면, 백조경은 한 창고의 드럼통 안에 갇혀 있다. 파티장에 잠입한 이들은 백조경을 비롯한 파티 참석자들을 납치해 가둔 것이다. 그들이 나간 뒤 드럼통을 빠져나온 백조경은 탈출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파티장에서 만난 사람들, 과거의 백조경과 연인, 그녀의 어머니는 내면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작품은 백조경을 납치한 인물들의 정체와 그 이유를 회의실이라는 장소와의 교차편집을 통해 밝힌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의 회의실에는 국내외 주요기관의 대표들이 모인다. UN, CIA, 국정원 등 이 기관들이 대표를 보낸 이유는 협상을 위해서다. 싱크홀 현상이 생기면서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인간에 의해 태어난 인류가 아닌 AI가 만든 신인류다. 그들은 미래의 기술을 현재의 인류에 알려주는 대신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그 조건이 백조경의 목숨이다.  

이들이 과거로 온 이유는 미래는 인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 높은 기술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황폐화 되어버린 지구에서 인류는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에 과거로 온 AI가 만든 인류는 신인류와 현인류 사이의 공존을 제안한다. 다만 그 선택에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작품은 이 두 가지 코드를 실존과 합의를 통해 찾는다. 먼저 회의실에서 이 문제를 상의하는 각국 대표들의 문제는 인류가 지닌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존엄이란 문제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낙인> 스틸컷

<낙인> 스틸컷 ⓒ (주)뉴플러스오리지널

 
창고에서 백조경 앞에 나타난 인물들은 백조경의 공상이다. 그 인물들은 백조경의 내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몰카 피해에 목소리를 내는 여배우는 감정적인 측면을, 무조건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제작자는 이성적인 측면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답답한 현실을 이겨내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만큼 낙인이 찍힌 백조경의 현실과 공감되는 지점이 있다. 백조경은 낙인이 찍힌 자신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마음 속 이들과의 합의를 이뤄야 한다.  

백조경에게 창고란 낙인 때문에 갇혀버린 어둠이다. 그녀는 이 창고에서 나가기 위해 내면의 수많은 생각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도, 긍정적인 생각도 모두 그녀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을 품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희망찬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사회가 낙인을 찍었다고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실존은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는 남이 판단하는 게 아닌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3대에 걸쳐 여성을 등장시키며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강화한다. 백조경이 어머니의 과거에 짠한 감정과 함께 답답함을 느끼는 것처럼, 미래의 백조경 딸은 창고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백조경에게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낙인> 스틸컷

<낙인> 스틸컷 ⓒ (주)뉴플러스오리지널

 
AI 역시 이런 실존의 문제와 연결된다. AI는 인류와 같은 지능을 지닌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인류의 동반자가 될지, 아니면 적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백조경이 공상으로 만든 내면의 캐릭터들과 합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갔듯, AI의 문제 역시 수많은 논의와 토론이 필요함을 작품은 보여준다. 실존은 그 존재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 인정했을 때 발현되기 때문이다.   

영화 <낙인>은 AI와 페미니즘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실존의 문제로 엮는 통찰력을 선보인다. 실험적인 스타일에 있어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현재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를 장르적인 매력으로 묶어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특히 여성 캐릭터란 점을 강조하지 않은 백조경을 비롯해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작품의 캐릭터 표현은 시대적인 흐름에 맞춘 섬세함으로 눈길을 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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