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

 
"산다는 건 대체 뭘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왜 이리 다른 걸까."

30년 넘게 외길 인생을 걸은 배우 정진영의 오랜 꿈이 영화감독이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가 출연해 온 영화에 울고 웃은 관객들이라면 '감독' 정진영의 모습을 상상하긴 어려울 듯 하다. 

그랬던 그가 영화를 연출했다. 50대 후반을 바라보는 시점에 내놓은 그의 데뷔작은 미스터리 요소와 스릴러, 코미디 요소가 곳곳에 담긴 <사라진 시간>이라는 작품이다. 배우 조진웅이 기억을 잃어버린 형사 형구 역을, 배수빈과 차수연이 도시에서 시골 마을로 이사 온 교사 부부 역을, 정해균, 장원영 등이 마을 이웃 역을 각각 맡았다.

특별한 사연으로 시골 마을에 자리잡은 교사 부부가 어느 날 사망한 채 발견된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구는 조사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술을 마신 뒤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 이후 그는 형사가 아닌 시골 학교 교사로 생활하게 된다. 마을 사람은 물론이고, 그를 알던 지인들이 하나같이 그를 교사로 대하고 그렇게 칭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살인사건은 이 영화에선 하나의 미끼다. 흔히 한국상업영화에서 발견되곤 하는 스릴러성은 대부분 이런 사건 사고에서 발휘되곤 했다. <사라진 시간>은 형구의 시선으로 마치 교사 부부 사망의 전말을 파헤칠 것처럼 관객을 유도했다가 정작 다른 방향으로 선회한다. 

그 방향은 영화 중반부터 드러난다. 이는 곧 형구가 '왜 기억을 잃게 됐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형구가 겪은 일들이 과연 진실일까'라는 질문으로 끝나게 된다. 후반부에 이르러선 왜 기억을 잃었는지조차 중요하지 않게 된다. 과연 형구가 겪은 일들이 진실일까, 형구는 대체 교사였을까 형사였을까라는 질문만 남게 된다.

이 영화는 정진영이 평소 품고 있던 질문, 즉 인생과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Me And Me'라는 데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영제엔 두 개의 괄호가 생략돼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로 풀어쓸 수 있다. 어쨌든 그 추상적 질문을 영화화하려 했다면 그의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영상과 캐릭터로 탄탄하고 설득력 있게 구축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타협'보다 '정직함' 택한 감독 정진영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

 

결과적으로 <사라진 시간>은 '영화적'으로 투박할지언정 기존 상업영화에서 찾을 수 없던 도전의식이 엿보인다. 환갑을 바라보는 배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패기다. 그 누구보다 내러티브와 캐릭터성을 간파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기성배우가 이런 실험을 했다는 것 자체에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정진영 감독 스스로도 이미 완성했던 또다른 시나리오를 폐기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도 모르게 관습적인 영화 문법이 가득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상업영화, 대중성을 놓고 보면 <사라진 시간> 보다 아마도 그 작품이 인기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평생 한 작품만 할 수 있다면, 일생일대의 기회라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하는 법. 감독 정진영은 타협보단 정직함을 택했다.

물론 <사라진 시간>은 약점이 꽤 많다. 이미 관객은 인생과, 자기 존재를 묻는 많은 명화들을 알고 있다. 시작이 추상적일지언정 그 영화들은 장르와 사건, 캐릭터를 저마다 변주하며 자기만의 세계관을 영화 안에서 완결시켜 놓았다. 대놓고 그런 영화들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사라진 시간>은 영화적 호흡이나 장면 연결, 편집 면에서 균질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까진 힘이 약해 보인다. 

이런 약점 때문에 일반 관객 다수가 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긴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최근 흥행작들이 철저한 코미디 요소, 분명한 주제의식, 그럴싸한 미장센을 내세운 영화들 일색이지 않았나.

그럼에도 <사라진 시간>을 봐야 한다면, 곧 신인 감독이 평생 품고 있던 질문에 대한 진지하고 꽤 열정적인 성찰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진정성을 품고 시작한 모든 도전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자아와 타아의 간극을 한 번이라도 고민했던 영화팬이라면 극장을 찾아 이 영화를 보길 추천한다.

한 줄 평: 신인이 된 베테랑의 평생 숙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점: ★★★☆(3.5/5)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정보

연출: 정진영
출연: 조진웅, 배수빈, 정해균, 차수연 등
제공/배급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작 : ㈜비에이엔터테인먼트, ㈜다니필름
러닝타임 : 105분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 2020년 6월 18일
사라진 시간 정진영 조진웅 배수빈 정해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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