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누가 라디오를 들어?"

그런데 듣는 사람-청취자가 있으니 MBC FM에는 30주년 장수DJ의 방송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매일 밤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CBS음악FM 93.9MHz에도, 청취자들이 귀한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라디오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국보급 미스터 디제이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루의 끝과 시작, 함께 합니다. 김형준입니다"라는 인사로 시작하는 김형준의 레인보우 스트리트. 내일 모레 월요일로 넘어가는 일요일 자정이면 1651번째로 막을 내리는 심야방송의 제작자이자 진행자, 프로듀서디제이입니다.

미스터 디제이와 경주현 작가, 두 명의 프리랜서가 꾸려온 이 심야 음악방송이 청취자들과 쌓아온 유대감은 유별나서, 개편을 2주 앞두고 알려지기 시작한 프로그램 폐지 소식에 청취자들은 몹시 당황하고 흥분했습니다.

개편 사유가 궁금했고, 납득할 수도 없어서, 미스터 디제이의 방송을 계속 듣고 싶은 청취자를 위한 대책을 기대하며 방송국에 전화, 메일을 보내고 있던 중에, <조선일보>에 실린 후속 방송 진행자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미스터 디제이가 방송에서 개편 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4일 전 새벽에 등록된 기사였습니다. 
 
미스터 디제이 김형준님은, 어느 청취자의 표현처럼 "결과 진동이 다른" 디제이입니다. 1992년 CBS FM 라디오 프로듀서로 입사, 두 번의 파업을 거치며 제작 현장에서 떠나 있기도 했었고 2001년 봄에는 SBS FM에서 팝 음악방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미스터 디제이로 다시 돌아온 것이 2015년 9월 15일. 지금 그의 방송을 듣는 이들 중에는 15년 전, 그보다 더 10년 전 그의 방송을 듣던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파업으로 방송을 손뗀지 벌써 한달이 넘어가는군요.... 그간 이곳 사이트에는 거의 매일 들어와서 여러분들의 사는 모습을 훔쳐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이트에 들어오지만 신청곡을 올리지 않는 분들을 이해하게도 되구요. 2시와 4시사이에는  돌아다녀볼 기회가 없는 저로서는 그시간에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웬지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평소 가보고 싶던 곳도 가보고(보길도를 비롯한 남도 여행등등..) 읽고 싶던 책도 좀 보고 그렇게 소일하며 지내고있습니다. 파업 한달이 지나니까 방송하고 싶어 좀이 쑤시기도 하고 그렇네요.. 다시 방송을 통해서 여러분을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   (김형준, 2000.11.07)


15년 전 미스터 디제이가 진행했던 방송, 지난 청취자 게시판에 어느 청취자가 옮겨놓은 20년 전 그의 글, "방송하고 싶어 좀이 쑤시고 청취자 사는 모습을 훔쳐보곤 하는" 그가 보입니다. 

꿀보이스, 마성의 보이스라 칭송받는 목소리로, 청취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는 다감함으로, 언어와 말투에서 느껴지는 인간미로, 미스터 디제이는 청취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둠 속에 빛처럼, 얼어붙은 영혼들을 한밤 중에 라디오 앞으로 불러 모아 깨어 있게 만들었습니다. 달변이라기 보다 감각적으로 말하고, 말보다는 음악으로 소통할 줄 아는, 전문성과 연륜을 갖춘, 세련되고 멋진 디제이입니다. 그가 부르는 이름들과 그 이름들이 보내온 사연을 통해 함께 방송을 듣는 사람,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레인보우 스트리트는 주말부부 남편이 와도 이어폰으로 방송을 듣게 만드는 개인적인 시공간이지만, 동시에 음악과 이야기, 시간과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 중심에 미스터 디제이가 있습니다. 

청취자들은 소소한 일상사뿐 아니라 사별과 이혼의 아픔, 자살 충동, 견디기 힘든 몸의 통증, 먹고 사는 눈물겨움 등등을 토로합니다. 야간운행 중인 기사님들이 인사를 전해옵니다. 두바이, 미국, 독일, 세계 각지에서 시간대를 달리하는 청취자들이 함께 하는 국제방송이기도 하구요. 
 
방송 홈페이지나 방송 중 청취자간 실시간 채팅이 이루어지는 레인보우 어플 게시판을 이용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하는 청취자들이 개편 소식을 접한 건, 이번 주 화요일로 넘어가는 월요일밤이었습니다. 놀라움과 아쉬움이 담긴 청취자들 사연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절한 청취자들의 작별 인사 소개 끝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제가 부족해서 여기까지밖에는...죄송한 마음입니다."

개편사유를 묻는 청취자에게 개편 관련 의사결정권이 있는 관리자는 미스터 디제이의 역량이나 청취율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청취층의 고령화와 그로 인한 채널 이미지의 노후화에 따라,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개편의 배경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청취자들이 늙어가는 게 미스터 디제이 탓이겠습니까, 세월 탓이겠지요.

청취자들 일상에 자리잡은, 특별하고 소중한 방송을 떠나 보내며, 많은 이들이 "힘들 때 마음을 기대기만 하고,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해 하며 미스터 디제이와의 이별을 슬퍼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가족에게도 내보이지 못하는 속얘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던, "내가 보이는구나" 느껴지게 내 사연과 내 이름을 대하던 고마운 미스터 디제이가 없는 밤은, 어둡고 외롭겠지요.

"흘려 듣는 방송이 아닌 꼭 듣고 싶은 방송", "깨어 있어서 듣는 방송이 아니라 들으려고 깨어 있는 방송", "마음의 일기장 같은 방송" "이런 방송 처음"이기 때문에 꼭 유지해 달라는 청취자들의 간구는 늘 그랬듯, 아무 힘이 없습니다.

청취자들과 음악으로 소통하며, 친구, 연인, 오빠, 형님, 삼촌, 아저씨, 때로 고해사제까지 되어주던 미스터 디제이 김형준님, 자정 생방송을 위해 달려오고 달려가신 밤길을 생각합니다. 남들 다 쉬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종종 생방송으로 만나지던 날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청취자들과 실시간으로 만나기 위해 쏟으신 수고와 정성에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떠나시는 길, 청취자들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만든 배너는 사전 승인 주무부서인 홍보부에선 처음엔 문제될 게 없는 분위기였는데, 개편 결정권이 있는 제작편성부와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시간을 끌더군요. 제작편성부의 답변은, '마지막 방송 전후로 4시간, 오직 방송 제작진만 보게 될 생방송부스 앞 게시는 무방하다'였습니다. 미스터 디제이와 그의 방송이 지닌 가치, 대접받아야 마땅한 가치를 알리고 싶었던  청취자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1651번의 "하루의 끝과 시작"에 계셔 주셔서 행복했습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내일, 모레, 이제 3번 남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작부와 협의가 필요해 설치하지 못한 배너 시안

▲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작부와 협의가 필요해 설치하지 못한 배너 시안 ⓒ 이소연

 
 
김형준 음악방송디제이 레인보우스트리트 심야방송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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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기 기자만들기 과제 수행을 위해 가입함. 일기체, 수필체로 할 수 있는 잡다한 이야기. 주관심사는 사람과 문화. 근성이나 사명감은 거의 맹물 수준. 훈련을 통해 오마이뉴스의 다양성과 열린 진보 사회를 위한 실뿌리로서 역할을 다하며 의미있게 살다죽길 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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