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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에서 비엔나까지 가는 버스는 5시간 정도가 걸린다.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가장 편한 상태로 앉아 창 밖을 계속 감상하기로 했다. 단아한 성당이 자리잡은 작은 마을들이 차창 밖으로 지나갔다.

크로아티아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국경은 슬로베니아로 가는 국경만큼 차들이 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EU국가로 들어가는 국경이어서 모든 승객들이 내려서 여권 검사를 받았다.

버스는 중간에 한번 휴게소에서 멈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쉼 없이 달렸다.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의 국제버스터미널에는 밤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주변이 예상 외로 어두운 터미널이었지만 다행히 터미널 밖으로 나오자 택시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비엔나 중앙역 앞의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역으로 다시 나왔다. 역에서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가는 티켓을 산 후 잠시 역을 둘러보았다. 발칸반도 여행 후 오스트리아의 역 안에 들어서니 부유한 국가의 세련됨이 물씬 풍겼다.
 
비엔나 다뉴브 강. 비엔나를 흐르는 젖줄과 같은 물줄기이다.
▲ 비엔나 다뉴브 강. 비엔나를 흐르는 젖줄과 같은 물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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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아내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비엔나 중앙역을 출발했다. 차창 밖 철교 교각 사이로 아름다운 다뉴브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차는 예상 외의 넓은 평원지대를 꽤 달렸다. 수확물을 실은 트랙터가 작은 길을 달리고 수많은 풍력발전 바람개비가 평원의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기차가 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자 소박한 마을과 집들에서 다시 동유럽의 투박함이 묻어났다.
  
브라티슬라바 역의 왜소한 모습은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브라티슬라바 역은 우리나라 작은 중소도시의 1970년대 버스터미널을 연상시키는 시멘트 건물 외관을 하고 있었다. 역 안의 가게와 식당들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과거 동유럽의 한 역에 떨어진 기분이 들게 한다.
 
브라티슬라바 역. 마치 1970년대의 중소도시 버스터미널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다.
▲ 브라티슬라바 역. 마치 1970년대의 중소도시 버스터미널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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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 앞에서 곧장 브라티슬라바 성(Bratislava Castle)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이 택시기사가 미터기를 손님들이 볼 수 없는 차 아래에 숨겨두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나는 택시기사에게 바가지 씌울 생각하지 말고 미터기를 바깥에 빼 놓고 미터기를 다시 눌러달라고 했다.

브라티슬라바 성으로 가는 언덕길은 그리 높지 않아 산책하는 느낌으로 올라가기에 좋았다. 성 입구의 승리의 문을 지나자 언덕 위에 눈부시게 빛나는 브라티슬라바 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성의 벽면과 밝은 주황색 지붕의 대비가 무척이나 깔끔했다. 성의 지붕 위에는 새로 독립한 국가, 슬로바키아의 국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브라티슬라바성. 테이블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 브라티슬라바성. 테이블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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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은 테이블 캐슬이라고도 불리고 있어. 자세히 봐봐. 마치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의 고립된 남쪽 바위 언덕에 자리한 브라티슬라바 성은 다뉴브 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 브라티슬라바 성은 모라비아(Moravia) 왕국과 헝가리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성이다.

9세기에 처음 건설된 이 성은 1809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1811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953년~1964년에 재건되었다. 새로 복원된 성이어서 고색창연한 맛은 없지만 네모 반듯한 성이 무척이나 현대적이고 깨끗해 보인다.
 
브라티슬라바성 앞 풍경. 다뉴브 강과 브라티슬라바 구시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 브라티슬라바성 앞 풍경. 다뉴브 강과 브라티슬라바 구시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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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앞은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해발 150m의 성 앞으로 다뉴브 강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구도시를 바라보는 전망은 무척이나 고즈넉했고, 다뉴브 강 건너에는 우주선과 닮은 UFO 타워가 구시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 외곽에는 공산주의 시절에 지어진 사각형의 아파트들로 회색빛 도시이지만 이제는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는 듯 했다.
  
성 앞 광장에는 모라비아 왕국의 스바토플록(Svatopluk) 1세의 기마동상이 있다. 그는 모라비아 왕국을 통해 서슬라브인들을 사실상 최초로 규합한 위대한 왕이었다. 스바토플록 1세는 오른 손에 칼을 치켜들고 그의 애마와 함께 지금이라도 바로 뛰쳐나갈 듯한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 마당으로 들어가보니 건물 구조는 상당히 단조롭다. 건물 외벽에는 장식이 전혀 없고 순백색 벽면만이 이어진다. 슬로바키아 의회로도 이용되는 성의 내부는 역사박물관과 보물관,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어서 브라티슬라바의 역사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여행정보가 많지 않은 곳이라 더 흥미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1층인 박물관 지상층은 브라티슬라바성의 복원 과정과 복원 후의 모습이 상세한 사진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나는 새로 복원된 계단을 따라 1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의 천장에는 새로 지어진 궁전의 화려한 장식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1층의 공간은 현대적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음악당이었다. 깔끔한 이 음악당의 벽면에는 예수 승천상이 걸려있어서 예배공간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는 듯한 샹들리에가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는 한동안 음악당 좌석에 앉아 있었다.
 
브라티슬라바성 갤러리. 슬로바키아의 고즈넉한 풍경들을 만나볼 수 있다.
▲ 브라티슬라바성 갤러리. 슬로바키아의 고즈넉한 풍경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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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2층 갤러리에서는 그림과 인쇄물 속에 남은 브라티슬라바 성의 과거 모습을 만난다. 다뉴브 강 앞의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모습으로 그려진 브라티슬라바성의 과거 모습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1940년대 이후의 슬로바키아의 회화들에서는 마치 소박한 마을 속에 들어선 듯한 훈훈한 감성이 느껴진다.

3층에는 슬로바키아의 현대 역사가 잔뜩 전시되어 있다. 현미경 같은 작은 구멍을 통해 보니 1960년의 브라티슬라바가 아스라히 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여러 생필품들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도 느껴볼 수 있다. 책과 인쇄물의 방에는 과거에 사회주의 사상을 심어주던 책들이 전시 중이다. 당시 시대를 지배했던 이념들이 이제는 박물관 속의 유물이 되어 있다.
 
브라티슬라바성 박물관. 현대 역사 전시실에서는 슬로바키아 인들의 생활상을 만난다.
▲ 브라티슬라바성 박물관. 현대 역사 전시실에서는 슬로바키아 인들의 생활상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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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화장품을 판매하는 광고만으로 가득 채워진 방 안으로 들어서니 슬로바키아의 과거 문화가 그대로 전해진다. 광고 포스터도 시간이 지난 후 이렇게 한곳에 모아 놓으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역사적 유물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당시 느낌으로 제작된 가게 안에 유물들이 전시 중이어서 친근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다.

공산주의 시절의 우표와 지폐, 원피스, 제복들은 불과 몇 십년 전에 사용되었던 것들이지만 아주 오랜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무기들이 흥미로워 계속 보고 있는데 아내는 이 방면에 관심이 없어서 다른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청동기 역사실의 펜던트. 누구의 목 아래 걸었던 펜던트였을지 궁금하다.
▲ 청동기 역사실의 펜던트. 누구의 목 아래 걸었던 펜던트였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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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 유물들의 정수를 보관해 둔 보물관에는 청동기 시대의 컬렉션들이 일대 장관이다. 기원전 4천년 전에 만들어진 마치 모기향같이 생긴 나선형의 청동 목걸이는 슬라브족의 앞선 기술력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청동검은 수많은 전장에서 실전에 사용된 듯 표면에 거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내려가는 계단의 창문 밖을 보니 예쁘게 정리한 바로크식 광대한 정원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푸르른 녹음이 어찌도 이 성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성 안내원이 성 안의 마당에서 들어가는 지하 우물을 꼭 내려가 보라고 한다. 높은 지대에 자리한 성이라서 그런지 우물의 끝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우물은 마치 저 아래에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다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성 앞 잔디 공원 의자에 앉아 브라티슬라바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성 아래에는 좁은 골목길이 이어지고, 아기자기한 집들과 작은 가게들이 사랑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오버 투어리즘이 성행하는 유럽의 땅에서, 이곳만은 조용히 즐길 수 있는 유럽의 마지막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독일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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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