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또 고개 숙이고 인사를 나눴지만 마음 속은 그리 편하지 않았을 만남이었다. 골을 먼저 넣거나 한쪽이 이겨도 특유의 세리머니를 펼치거나 환호성을 지르기에는 껄끄러운 자리였기 때문이다. 17년 전 한국 남자축구대표팀을 이끌고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두 인물이 각각 중국과 베트남의 차세대 주역들을 데리고 평가전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 결과 박항서 감독이 먼저 미소지었다.

박항서 감독이 이끌고 있는 22세 이하 베트남 남자축구대표팀이 한국 시각으로 8일 오후 7시 중국 후베이성에 있는 황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중국 U-22 대표(감독 : 거스 히딩크)와의 평가전에서 2-0 완승을 거뒀다.

같은 패턴으로 2골 만들어낸 베트남, 놀랍다

축구로 맺은 끈끈한 인연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과 박항서 감독은 서로 다른 팀을 이끌고 이렇게 묘한 자리에서 마주섰다. A대표팀은 아니지만 2020 도쿄 올림픽 본선 무대를 노리는 중국과 베트남의 22세 이하 대표 선수들을 이끌고 나왔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중국 U-22 대표팀만 지휘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박항서 감독은 A대표와 U-22 대표팀까지 동시에 지휘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 몸이 하나로는 모자라다. 지난 5일에는 태국과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어웨이 게임(태국 0-0 베트남)을 치렀다.

중국 U-22 선수들은 대부분 소속 팀에서 주전 멤버로 뛰지 못하는 입장이라 게임을 풀어나가는 감각면에서 베트남 선수들에 비해 투박한 면이 드러났다. 게다가 베트남 선수들은 박항서 감독이 지시한 대로 3-5-2 또는 5-4-1 포메이션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탄탄한 수비 조직력을 맘껏 자랑했다. 
 
 20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알 막툼 경기장에서 열린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요르단과의 16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승리를 거둔 베트남 박항서 감독이 기뻐하고 있다. 2019.1.20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자료사진) ⓒ 연합뉴스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은 중국 선수들은 베트남의 효율적인 압박 축구를 좀처럼 벗겨내지 못했다. 오른쪽 측면에 비해 왼쪽 측면 공격을 주로 활용하여 크로스를 시도했지만 대부분 가운데 쪽에서 공격을 차단당하는 흐름이 계속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베트남의 첫 골이 나왔다. 18분, 중국 수비수들이 방심한 틈을 타 오른쪽 측면으로 빠져들어간 베트남의 윙백 호 탄 타이가 컷 백 크로스를 내줬고 골잡이 응우옌 띠엔 린이 오른발 감아차기로 골문 왼쪽 톱 코너를 시원하게 뚫어버린 것이다.

첫 골 장면만으로도 중국과 베트남의 수비 조직력을 단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선수들이 감독의 전술 지시를 얼마나 이해하고 함께 움직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확실하게 드러난 상징적 순간이었다.

베트남은 이렇게 역습 기회가 생기면 2~3명의 핵심 선수들이 효율적인 패턴 플레이로 중국 수비수들을 모두 멍하게 만들었다. 이 흐름은 후반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트남 공격형 미드필더 은고 홍 푸옥은 매우 폭넓은 활동량을 자랑하며 중국 선수들을 마음껏 따돌렸다. 중원에서 공격 방향을 빠르게 바꿔서 상대가 예측하기 힘든 전진 패스를 넣어주는 플레이 메이킹 능력이 탁월한 것은 물론, 자신이 직접 빈 공간을 찾아서 돌아들어가며 반 박자 빠른 슛으로 골문을 위협할 줄도 안다.

55분, 오른쪽 측면 좁은 지역에서 역습 기회가 왔을 때 동료 선수 둘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패턴 플레이를 펼친 뒤 은고 홍 푸옥이 직접 왼발 발리슛으로 중국 골문을 아찔하게 위협한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술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모자란 중국 선수들은 58분에 추가골을 내주며 완전히 주저앉았다. 베트남의 득점 패턴이 전반전의 그것과 흡사했지만 또 한 번 알면서도 당한 셈이었다. 오른쪽 윙백 호 탄 타이가 오른쪽 끝줄 가까이까지 파고 들어 중국 골문 앞으로 얼리 크로스를 찔러주었고 크로스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빠져 들어간 응우옌 띠엔 린이 왼발로 가볍게 밀어넣었다. 

베트남의 역습이 이루어진 방향이나 패턴, 그리고 도움-득점 선수가 그대로 일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 팀 필드 플레이어들의 전술 이해도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난 게임이었다.

한국 U-22 대표팀 평가전은?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 2016년 9월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에서 시민들을 만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거스 히딩크 중국 축구대표팀 감독(자료사진) ⓒ 연합뉴스

 
이에 홈 팀의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선수 교체를 통해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지만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베트남의 수비 조직력 앞에서 제대로 위협할 만한 유효 슛조차 거의 기록하지 못하고 패했다.

이 게임은 거스 히딩크 감독과 박항서 감독의 첫 만남이라는 이슈 말고도 한국 축구계에 던지는 질문도 남겨주었다. 

2020년 1월 태국에서 열리는 AFC(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에서 한국의 김학범호와 한 번쯤 만날 수 있는 팀들의 조직력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 패배를 곱씹으며 23세 이하 챔피언십에서 더 간절하게 달려들 것이고, 베트남은 지금의 게임 운용 능력만으로도 3위까지 본선 진출을 노리는 팀들을 충분히 괴롭힐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시리아와의 두 차례 평가전이 무산된 한국 U-22 대표팀은 태풍에 날아간 지붕 있던 자리만 바라보는 호랑이 꼴이 됐다. 큰 대회를 앞두고 평가전만 능사는 아니지만 실제 게임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중국과 베트남 선수들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보여줬다.

박항서 감독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와 스태프들을 전폭 지원하며 아시아 축구의 진정한 다크 호스로 떠오르고 있는 베트남 축구를 보면서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이 곱씹어야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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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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