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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남부의 케랄라주, 주(state) 내를 이동하는 로컬트레인을 탔다. 나는 큰 가방을 두 개나 든 여성 여행객이었기에,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 기차의 가장 끝부분에 있다는 'ladies only(레이디스 온니)', 즉 여성전용칸에 몸을 실었다.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여성전용칸에서 서서 가는 게 차라리 편해요"

'다른 칸(남녀공용)엔 자리가 많이 남던데, 그냥 다른 칸으로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초짜 배낭여행객으로서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 여성전용칸에 남기로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여성들이 계속해서 이 만석 차량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관광 시즌이 아니었기에 여행객은 나뿐이었고, 모두가 인도 여성들이었다.
 
 인도 뭄바이의 지하철 여성전용칸. 인도는 2010년부터 지하철 및 로컬기차에 대해 여성전용칸을 운영하고 있다.
 인도 뭄바이의 지하철 여성전용칸. 인도는 2010년부터 지하철 및 로컬기차에 대해 여성전용칸을 운영하고 있다.
ⓒ 네이버 카페 "인도여행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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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출발하고 조금 후 운이 좋게도 사람들이 여행객이라며 자리를 배려해줬다. (물론 걸터앉았단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자리에 앉은 나는 맞은편과 옆에 앉은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며 여성전용칸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타기 전에 보니 다른 칸에는 자리가 꽤 있던데, 굳이 여성전용칸에 타는 이유가 뭔가요? 게다가 지금 다들 못 앉아서 바닥에 앉기도 하고 구석에 겨우 서 있기도 한데 너무 불편할 것 같아서요."

햇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앉아 있던 내 옆의 한 중년 여성이 툭 내뱉었다.

"서서 가든 더러운 바닥에 앉아서 가든 그게 차라리 (마음이) 편해."
"가슴을 만지고 달아나거나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품평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거든요. 아래위로 훑는 눈빛도 많고요."
"여성전용칸이 있는데 일반칸에 탔다가 무슨 일이 나면 경찰에 신고해도 뭐 (잘 안 받아줘요) … 물론 신고하는 여자도 잘 없지만요."


맞은 편에 앉은 여대생들이 말을 이어받았다. 성추행이 빈번할 뿐더러, 혹시 불쾌한 일을 당할까봐 내내 마음을 졸이는 것보단 여성전용칸에서 낑긴 채로 가는 것이 낫다는 거다. 콩나물 시루마냥 빽빽하게 꽉찬 여성 전용칸의 풍경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한국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 정도(이렇게까지 성범죄를 두려워할 정도)는 아닐 것도 같은데…'

여성전용칸의 필요를 인정하기

인도 남부에 있었던 지난 3월, 한국은 한창 '버닝썬', '정준영 몰카' 등으로 시끄러웠다. 약물강간, 불법촬영이 이미 폭로된 상황에서 여성을 품평하는 저속한 대화로 가득찬 유명 연예인들의 카카오톡방은 참담할지언정 놀랍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이 정도는 아닐 거다'라는 나의 일말의 기대는 그 근거를 잃은 지 오래였다.

2016년 전국 성폭력실태조사에 따르면 불법촬영 피해 장소 1위는 지하철, 버스 등의 대중교통시설(33.9%)이다. 또한 2016년부터 2018년 8월까지 2년 8개월 동안 서울 지하철 1~8호선에서 발생한 6천84건의 범죄 중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3천33건이 성범죄였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배려칸, 몰래카메라 집중 단속 구간 따위의 여성정책을 '역차별'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우대' 정책은 여성의 지위나 권리를 남성보다 높게 만든단 것이 아니라 남성보다 낮고 취약한 여성의 현실을 동등한 선까지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서울 지하철엔 여성배려칸/전용칸이 없다. 대신 볼 수 있는 '안전구역.' 여성만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그나마 불안감을 덜 수 있는 구역이다.
 서울 지하철엔 여성배려칸/전용칸이 없다. 대신 볼 수 있는 "안전구역." 여성만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그나마 불안감을 덜 수 있는 구역이다.
ⓒ 조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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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여성전용칸'의 존재를, 그 필요성을 사회는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 할 테다. '여성전용칸은 선택'이라 하지만 굳이 기차, 지하철의 끝까지 가서 타는 수고를 하고, 다른 일반 좌석을 두고 굳이 여성전용칸에서 서서 가는 쪽을 택하는 여성들이 많단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임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을 굳이 분리하지 않더라도, 여성의 공간을 울타리 치듯 한정하지 않더라도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우린 여성전용칸도 있다"는 자랑이 아니다.

하지만 더 자랑스럽지 않은 사회가 있다면 이러한 미봉책마저 외면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여성에게 위험한 국가, 여성이란 이유로 성추행, 불법촬영 등의 성범죄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로써 한국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에겐 현실에 대한 인정과 (비록 미봉책일지라도) 그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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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되 날카로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지금은 여행 중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