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2009년 처음으로 유색인종의 대통령이 선출되었을 때만 해도 없어질 줄 알았다. 같은 공화당 당원조차 거리 두던 '오렌지 머리'가 2017년 대통령에 선출되었을 때는 혹시나 했다. 그러다 같은 공화당원 마이크 펜스가 부통령이 되는 순간, 역시나 했다. 딕 체니와 도널드 럼즈페르를 필두로 한 이른바 '네오콘'(neocon)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미국 내부에서 꿈틀대며 영향을 미쳤다.

시간은 이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영화 속 다 죽어가던 딕 체니의 심장이 이식을 받아 다시 생명을 얻은 쇼트는 바로 이 전언이다. 끈덕지고, 질긴 목숨으로 미국이라는 몸 속 곳곳에 들러붙어있는 극우 보수주의의 가슴 아픈 부활.

아담 멕케이가 연출한 영화 <바이스>는 굉장히 날렵하다. 화려한 연출 컷과 시퍼렇게 날 선 풍자, 놓치지 않는 재치와 유머,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활력이 이 영화 전체의 생동감을 지탱한다. 딕 체니 역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과 에이미 아담스는 '여전하다'. (이들의 연기를 '여전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이 표현이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넘나드는 두 장르(다큐멘터리와 극 영화)를 따로 구분해서 영화를 생각해봐도 좋다. 다큐멘터리로서 이 영화가 훌륭한 점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팩트'에 의지하되 (이성을 배제한)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극 영화로서 훌륭한 점은 앞서 밝힌 팩트를 단순 나열하지 않고, 잘 짜인 '플롯'(서사)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영화 <바이스> 스틸컷

영화 <바이스> 스틸컷 ⓒ 콘텐츠판다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단순한 이야기(Story)라면, 플롯(Plot)은 그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탐구하여 재배치한 구성과도 같다. 스토리가 미국 부통령 시절 딕 체니의 만행을 나열하는 것이라면, 플롯은 '그가 왜 그런 악행을 저질렀나'의 인과관계를 탐구한다. 1963년 와이오밍 주 캐스퍼(Casper) 시 도로에서 22살 딕 체니(크리스천 베일)의 음주 운전으로 출발하는 영화의 시작은 필연적이다.

그 뒤 영화는 한 차례 더 거슬러 올라가는데, 딕 체니가 지금의 부인 린 체니(에이미 아담스)를 처음 만났을 때인 14살 때까지 올라간다. 마치 이 모든 비극의 출발이 그녀와의 잘못된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처럼. 결국 이 비판은 표면적이 아니다. 근원적이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들여다보는 의미일 텐데, 영화는 바로 그 작업을 충실히 해낸다. 왜 영화는 어린 딕이 린과 만났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걸까. 그건, 다른 사람을 향해 던진 조롱이었지만, 무의식 중에 스스로의 상태를 드러낸 딕 체니의 대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딕 체니는 조롱조로 조지 W. 부시(샘 록웰)를 향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의 인정에 굶주린 놈" 이 말은, 실상 자기 자신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는 늘 린 체니의 인정에 굶주려 있었다. 1963년, 예일대에서 퇴학당한 뒤, 일용직 노동자로 근근이 생활하던 그에게 린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껏 나는 전 과목 A였고, 지금도 나랑 결혼하기 위해 교수들이 줄을 서 있어. 잘 들어, 당신이 누군가가 될 용기를 내던가. 아니면 그냥 나를 떠나던가." 그녀의 앙칼진 대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 그러나 당신은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야." 그 말을 들은 딕의 눈빛에 무언가 서렸다. "다시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게."

기본적으로 서사의 선은 '욕망의 선'이다. 서사의 직선은 인물이 욕망하는 직선과 같다. 딕은 린으로부터의 인정을 욕망하고, 린은 출세를 욕망한다. 그러므로 딕 역시, (린이 욕망하는) 출세를 욕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결과다.

그는 노력 끝에 의회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그곳에서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도널드 럼즈펠트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욕망의 직선은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이윽고 그는 백악관 수석 자리까지 단숨에 오른다.
 
 영화 <바이스> 스틸컷

영화 <바이스> 스틸컷 ⓒ 콘텐츠판다


영화는 그의 거침없는 욕망을 세련되게 풍자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방식이다. 딕은 백악관 수석 집무실에서 자랑스럽게 앉아있고, 철없는 어린 자녀들은 백악관 곳곳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누빈다. 급기야, 대통령 집무실까지 뛰어들어갔다가 가드에 의해 나오게 된다. 이 신(Scene)은 다분히 그가 현재 백악관 내에서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 마음속에 꿈틀대는 욕망의 직선이 어디까지 향해있는가를 암시하는 장면이다.

한편, 영화는 재치를 잃지 않는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둔 그에게 딸 메리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털어놓는다. 상대 후보가 이 점을 파고들어 공격하면,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판이다. (보수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 공화당은 동성애/LGBT/성소수자와 같은 진보적인 가치들을 적대시한다)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은 그에게, 영화는 돌연 '행복한 엔딩 크레딧'을 선물한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배경음악이 흐르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는 그곳에서 딕과 린, 그리고 두 명의 딸은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다. 아름다운 가족을 아래에 두고, 엔딩 크레딧이 너울너울 올라간다. 바로 그때, 그 순간에서 딕 체니의 이야기가 끝났어야 하는 간절한 바람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영화에서 총 2번 유예된다. 첫 번째는, 위의 재치 있는 엔딩 크레딧으로 표현한 '정치적 죽음'의 유예고, 둘째는 심장 질환으로 죽어가던 그에게 새로운 심장이 이식되어 실제 죽음에서의 유예가 일어난다.

카메라는 심장이식 수술 중, 이제 버려질 그의 예전 심장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육신에서, 혈관에서 끊겨 핏기 없이 창백한, 군데군데 거뭇한 그 심장을. 그의 악행의 근원이 저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살짝 소름이 돋기도 한다. 그러니까, 저 생명이 애초에... 라고 생각하다가, 더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영화 <바이스> 스틸컷

영화 <바이스> 스틸컷 ⓒ 콘텐츠판다


아직 그는 살아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곧 네오콘(신보수주의)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의미와 같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을 끝낸 뒤, 가까스로 인간 이성과 문명으로 짐승적인 욕망을 통제하는 평화의 시대에 다시 총과 칼을 드는 사람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편을 가르고, 서로를 혐오하고 적대심을 부추기는 사람들. 다른 편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해 내부 결속을 도모하는 무리들. '애국심' 하나의 가치로, 혐오와 증오, 폭력과 정치 무지 등 그 모든 악행에 성스러운 세례를 베푼 사람들. 정권이 교체되어 그 세력은 낡아 없어진 줄 알았지만, 이식된 심장으로 여전히 생존해있는 끈질긴 더러움들. 우리는 저 심장을, 생명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영화의 엔딩이 주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하다. 정계 은퇴한 딕 체니에게 앵커는 묻는다. "부통령 재임 시절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답한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나는 당신들의 가족을 지킨 것을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은 (투표로) 나를 선택했고, 나는 당신들의 요구대로 행한 것일 뿐입니다." 뻔뻔한 대사에서 많은 관객들은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빗대어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 <바이스> 스틸컷

영화 <바이스> 스틸컷 ⓒ 콘텐츠판다

 
그런데, 나는 다른 지점에서 당혹스러워졌다. 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침을 뱉어버리는 저 생은, 고결함을 짓밟아 욕망의 거름으로 쓰는 저 심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저 삶마저도 과연 아름다운 것이냐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 이렇게 믿는다. 아름다운 생은, 끝까지 아름다워야 한다. 이것은 의지다. 노력이고. 심장이 주는 아름답고 고결한 생의 책임감이다.

* 영화 <바이스>는 <빅쇼트>로 유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의 영화로, 오는 1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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