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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혼잡스러운 곳에서보다 한적한 시골에서 사는 게 어찌 보면 더 나은 삶일 수 있을 것 같아."

자못 멋지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는 와이프의 모습이 보인다. 기분 좋은 웃음이라기보다 조소에 가까운, 그런 비웃음이라는 건 표정에서부터 이미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와 달리 와이프는 '금산'이라는 고장에서 자랐다. 시골 생활이라면 소위 잔뼈가 굵다. 집 안에서 이따금 보이는 개미 몇 마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삼 하면 금산" 마치 지명 이름을 지었을 때부터 '인삼'을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지은 건지는 몰라도 금산과 인삼은 라임이 서로 착착 맞아떨어진다. 전국에 들어가는 90%의 인삼이 금산에서 유통이 된다니 왠지 이곳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껌이나 사탕 대신 인삼 뿌리를 씹고 다니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격조 있는 농담을 와이프 앞에서 내뱉었다간 시골 차별 발언이라고 나를 향해 눈을 흘리겠지.

서울에서 장장 2시간 반 동안 엑셀을 내리밟아야 당도하는 바로 이 금산에서, 1시간가량을 더 차를 타고 내려가면 '산청'이란 곳이 있다고 했다. 건너 건너 아는 지인(남이나 다를 바 없는)이 운영하시는 한옥집에 가보고 싶다고 와이프는 언제부턴가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안 그래도 작년에 가지 못한 여름휴가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크게 내키지 않는 '산청'으로의 1박 2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급작스러운 듯, 혹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듯 자연스럽게 어느 금요일 오후 차를 몰고 산청으로 향했다.
 
딱히 한옥집만 골라 찍으려던 건 아니었다. 이 동네는 온통 한옥집 천지라 굳이 골라 찍을 필요조차 없었다.
▲ 산청 한옥마을 풍경 딱히 한옥집만 골라 찍으려던 건 아니었다. 이 동네는 온통 한옥집 천지라 굳이 골라 찍을 필요조차 없었다.
ⓒ 이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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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난 금산보다 더 시골스러운 풍경은 보지 못했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비웃을 수 있겠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서울 밖의 세상은 이따금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걸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이웃나라 일본, 혹은 중국으로의 여행이 보편화되고 심지어 저 멀리 미국이나 유럽여행마저도 작은 용단만 있다면 가능해진 세상이지만, 난 여전히 구닥다리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하나의 대중적 트렌드가 된 지금, 내색하진 못하지만 여전히 여행이 낯선, 마치 음지에서 활동하는 게슈타포와도 같은 (나 같은) 인간들이 있다고 믿는다.

산청이란 곳은, 종래에 내가 갖고 있는 이미 충분히 '시골스러운' 금산보다 더 시골스러운 곳이었다. 금산이 'better'이라면, 산청은 'best'였고 'worse'라면 'worst'와도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오늘 묵을 곳은 심지어 한옥 집이라 나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난방과 화장실, 청결과 위생에 대한 염려 말이다.
 
우리네 한옥집엔 예외 없이 작은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서 가벼운 산책도 가능했다.
▲ 집 앞 마당에 난 작은 오솔길 우리네 한옥집엔 예외 없이 작은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서 가벼운 산책도 가능했다.
ⓒ 이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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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그덕"

산청에 도착해 최종 목적지인 한옥 앞에까지 이르렀다. 나무 문을 열고 입장하자 드라마에서나 보던 광경이 펼쳐졌다. 작은 마당과 소담한 한옥집이 눈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반갑게 맞아주셨고, 우리를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날이 추워서 따뜻하게 하려고 미리 불을 지펴놓고선 이불까지 깔아놓았어요."

어느 호텔 서비스가 이리도 친절하고 개인 맞춤형일 수가 있을까. 할머니라고 부르기에 살짝 죄송스러울 만큼 정정하신 할머니는 여느 호텔 이상의 서비스를 준비해주셨고, 정정하다고 표현하기에도 역시나 송구스러울 정도로 사실은 여느 젊은이들처럼 쌩쌩하셨다.

맑은 공기의 힘인 건가. 맛 없는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장사가 된다던 뽀빠이 만화처럼 마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면 노화 속도가 더디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청군청에서 내걸어볼 만한 슬로건은 혹시 아닐까 하고.

화장실은 상상 이상으로 최신식이었다. 심지어 휴대용 온풍기가 있어서 우리 집 화장실보다 더 온기가 느껴질 정도였으니 가히 상상 이상이라고 할 수밖에. 부엌 역시 여느 게스트하우스 이상으로 물품들이 잘 구비가 되어 있었다. 방 앞에 펼쳐진 앞마당은 하물며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작은 정원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 작은 텃밭이 일궈져 있었고 장독대도 정갈히 놓여 있었다. 가히 이상적인 시골 풍경이랄까.

도착하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어스름이 밀려왔다. 시골이라 해가 금방 진다시던 할머니는 주문하지도 않은 닭백숙이 얹어진 상을 들고 방으로 친히 배달을 오셨다.

"이거 한번 잡숴봐요."

무심하면서도 친절하게 말이다. 게다가 닭백숙을 다 먹고 난 뒤에 군고구마까지 주신 이후에야 비로소 할머니의 발길이 뜸해졌다.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한 적막, 따뜻한 아랫목과 시원한 공기. 모든 게 안성맞춤이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군고구마와 분명 다른 맛이었다.
▲ 따뜻한 온돌방에서 먹던 군고구마 편의점에서 파는 군고구마와 분명 다른 맛이었다.
ⓒ 이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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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의 삶은 어떠할까, 단지 상상만 해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일천한 경험 때문인지 사실 잘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남들 다 있는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이따금씩 부러운 적 있었다. "명절에 시골 내려가면 차만 막히지 뭐." 조소 속에 감춰진 부러움이 한편에 숨어있었다.

단지 하룻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이 내겐 또렷하다. 아이러니하지만 엄청나게 기억에 남을 만한, 그런 강렬한 무언가를 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아랫목, 영롱한 색깔의 군고구마, 얇디얇은 창호지 문 사이로 들어오던 바람소리까지. 칠흑 같던 밤, 가만히 방문을 열어 밖을 우두커니 본 적 있었다.

풀벌레 소리만 울릴 분, 그야말로 새카만 어둠과 적막. 무서움도 잠시 고요한 평화가 실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시간 운전의 피로는 이미 아랫목에 녹은 지 오래다. 서울 집에선 춥다며 질색하던 베란다 밖 찬 공기가 이 곳에선 시원하게 느껴졌다. 호사스러운 침대도 아닌, 단지 아랫목과 얇디 얇은 요였건만 그 날의 꿀잠 역시 잊지 못한다.
 
이런 풍경을 서울 어디서 볼 수 있을까
▲ 마당 한켠에 놓여 있던 장독대 이런 풍경을 서울 어디서 볼 수 있을까
ⓒ 이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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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혹은 우리는 넘치는 풍요 속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사함'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드넓은 호텔방과 훌륭한 서비스, 미슐랭 가이드에서 추천할 법한 식사에서만이 행복과 만족감이 나오는 건 아닐 테다.

호텔 같은 환경은 아닐지라도 따끈한 아랫목에 몸을 지지며 먹는 귤 한 조각, 창 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백화점에 가면 들을 수 있는 인위적인 새소리가 아닌, 진짜 시골집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행복의 조각들은 이렇게 도처에 깔려있지 않을까.

어느 연휴 때마다 사상 최대 인파가 공항으로 몰리곤 한다는 기사나 뉴스를 심심찮게 본다. 힐링과 휴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가 가는 그 어디고 사람 북적이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밖으로 나가려는 건,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서 느끼는 영감과 에너지가 아닐까.

그러나 새로운 공간이 주는 신묘함은 비단 '새로움'에서만 비롯되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잊힌 것, 혹은 오래된 것에서도 우린 새로운 영감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게 되었다. 바로 이곳 산청으로의 짧은 여행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산청을 아시느냐고. 당신만의 산청은 어디였냐고 말이다.

태그:#산청, #한옥집, #시골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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