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허비 행콕 : 무한한 가능성 > 포스터

영화 < 허비 행콕 : 무한한 가능성 > 포스터 ⓒ (주)에스와이코마드

 
재즈의 전설 마일즈 데이비스(1926~1991)는 생전 자신의 밴드를 통해 수많은 신예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훗날 거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인물이었다. 빌 에반스, 레드 갈란드, 조 자비눌 (이상 건반), 존 맥러플린, 마이크 스턴(이상 기타), 웨인 쇼터 (색소폰), 토니 윌리엄스 (드럼), 폴 체임버스, 론 카터, 마커스 밀러 (베이스) 등 그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마일즈와 인연을 맺은 재즈 음악인들은 부지기수였다. 

건반의 귀재 허비 행콕(1940~)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63년 23살의 젊은 나이에 합류해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마일즈 데이비스의 두 번째 퀸텟 멤버로 활약하면서 마일즈의 수많은 걸작과 더불어 자신의 솔로 명반 < Speak Like A Child >(1968년) 등을 발표, 신예 스타 연주자의 등장을 알렸다.

마일즈의 품에서 벗어난 후론 펑크 재즈로의 변신을 꾀하며 < Head Hunters >(1973년), < V.S.O.P >(1977년) 등 퓨전 재즈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시대를 거치며 힙합, 댄스, 애시드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그가 발표한 연주곡 'Chameleon'처럼 허비는 단 한 순간도 변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08년 < River : The Joni Letter >로 재즈 음반으론 보기 드물게 그래미 역사상 두 번째 올해의 음반(Album Of The Year) 수상작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노장 음악인에 대한 예우 차원이 아닌, 여전히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이기도 했다.
 
2005년 < Possibilities > 녹음 과정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 허비 행콕: 무한한 가능성 > 지난 2005년 음반 < Possibilities > 녹음 과정을 영상에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동명 음반 표지)

영화 < 허비 행콕: 무한한 가능성 > 지난 2005년 음반 < Possibilities > 녹음 과정을 영상에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동명 음반 표지) ⓒ 워너뮤직코리아

 
최근 소리 소문없이 국내 소규모 예술관 등을 통해 개봉된 2006년작 <허비 행콕: 무한한 가능성>(원제 Herbie Hancock : Possibilities)은 천재 키보디스트 허비의 새로운 음악 도전을 차분히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지난 2005년 당시 동일한 제목의 음반 < Possibilities >을 녹음하는 1년 여의 여정을 과장되거나 극적인 장치 없이 그려낸다.

앞서 너바나, 샤데이 등의 음악을 스탠다드 재즈로 재해석한 < The New Standard >(1996), 지난 1983년 'Rockit'에 이어 다시 한번 비보잉 + 힙합 + 디제잉 음악의 결합을 시도한 < Future 2 Future >로 여전히 예측 불허의 음악을 만들던 허비 행콕은 당시 산타나의 화려한 재기로 상징되던 유명 팝 가수들을 총동원한 '올스타' 성격의 작품 제작에 돌입한다. 그 결과 < Possibilities >는 그의 작품 중에선 보기 드물게 초대 손님에 기댄 보컬곡 위주도 빼곡히 채워졌다. 편의상 재즈 음반으로 분류되지만 포크, 팝, 블루스, 아방가르드 전자 음악 등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들이 틀에 얽메이지 않는 유연함을 발휘한다.

자칫 안이한 기획물이 될 수 있었지만, 영화 속 허비는 신곡 + 리메이크곡의 적절한 안배와 더불어 자신의 음반이지만 내가 중심이 되기보단 초대 가수들도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시키는 개방적인 방식의 작업을 선택한다. 일일히 악보를 그려가며 녹음 도중 멜로디와 곡의 내용을 수정하는가 하면 가사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궁금해 하는 가수의 의문을 해소하고자 국제전화로 원 작곡자와 통화해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등 요즘 음반 작업에선 보기 드문 모습을 연출한다.

또한 이미 디지털 녹음이 보편화된 시기였지만 릴 테이프 녹음이라는 고전적 방식을 택하는가 하면 상황에 따라선 LA와 뉴욕으로 나눠진 현장을 인터넷 전화 등으로 연결해 진행하는 등 임기응변이 돋보이는 작업도 목격할 수 있다. 영화 중간 1960년대 자료 화면과 함께 마일즈의 밴드 시절 일화를 소개하는 장면은 그 무렵 터득한 마일즈 특유의 창작 기법이 40여 년이 지난 2005년 당시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고백하는 대목처럼 비친다.

스팅, 폴 사이먼 등 팝스타들과의 멋진 협업 + 편집의 묘미 돋보여  
 
 녹음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허비 행콕, 스팅 (허비 행콕 공식 유튜브 계정 영상 화면 캡쳐)  https://www.youtube.com/watch?v=dxYisWVPPVY

녹음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허비 행콕, 스팅 (허비 행콕 공식 유튜브 계정 영상 화면 캡쳐) https://www.youtube.com/watch?v=dxYisWVPPVY ⓒ Herbie Hancock

 
<허비 행콕:무한한 가능성>은 한 곡을 녹음하는 과정을 영상에 담더라도 실제 원곡과 스튜디오 리허설, 공연실황, 참여 음악인의 인터뷰 등을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 편집으로 영상에 옮겨 담는다. 이를 토대로 제각기 다른 환경임에도 마치 하나의 노래처럼 들리게끔 하는 등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음악 영화다운 묘미를 잘 살려낸다.

폴 사이먼, 카를로스 산타나, 스팅, 존 메이어, 데미안 라이스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팝스타들은 본인이 지닌 기량을 맘껏 발휘하며 음반의 가치를 드높여준다. 'A Song For You'(레온 러셀 원곡)을 열창한 크리스티나 아귈레나를 비롯해서 U2 + 비비 킹의 듀엣 명곡을 맛깔나게 재현한 조니 랭 + 조시 스톤의 'When Love Comes To Town', 에이즈로 생을 마감한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린 애니 레녹스 'Hush Hush Hush' 등은 영화와 음반에서 가장 핵심적인 몫을 담당하는 트랙들이다.

허비 행콕을 모르는 관객에겐 분명 불친절한 작품이긴 하지만 90분에 걸친 상영시간 동안 극장 안에서 울려퍼지는 명연주의 향연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만끽할 만하다. 단, 영화의 막판 10여 분 정도를 허비의 종교관, 일본 원폭 피해자 참배 및 공연 장면으로 할애한 대목은 다소 불필요한 사족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영화 <허비 행콕:무한한 가능성>은 전체 관람가로 21일 개봉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필자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jazzkid)에도 수록되는 글입니다.
허비행콕 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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