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무장지대 내 지하 벙커에서 미국 불법체류자 신분의 용병들과 북한 엘리트의 사투. 설정만으로 영화 < PMC: 더 벙커 >(아래 < PMC>)는 충분히 강렬한 액션과 박진감을 기대해볼 수 있다. 게다가 배우 하정우와 이선균이 처음 만났다. 전쟁 액션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조합, 여기에 <더 테러 라이브> 김병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니 작품적으로 여러 재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충분하다.

개봉을 앞두고 만난 하정우는 영화적 재미에 앞서 지난 5년간 이 작품을 개발하고 진행해 온 것에 대한 소회부터 전했다. 영화 <싱글라이더>에 이어 제작자로도 참여한 그다. "5년간 고통받으며 보낸 시간을 온전히 목격했기에 다른 영화들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며 하정우가 운을 뗐다.

"젊은 관객들 반응 가장 궁금해"

애정이 깊은 만큼 아쉬움도 물론 있었다. 영화에서 미국 불법체류자 용병 에이헵 역을 맡은 하정우는 "인물의 트라우마가 밝혀지고 그걸 이겨내면서 나름 성장하는 데 집중한 작품인데 일부에선 <다이하드> 같은 우당탕 액션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라며 "캐릭터가 오락가락 하는 묘사가 있지만, 후반부 고공 낙하 장면으로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그것의 극복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건보다는 인물, 상황 전개보다는 감정 묘사에 충실하다는 게 하정우의 해석이었다. 다만 마치 슈팅 게임을 하듯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일부 장면에 대해 그는 "김병우 감독 자체가 게임도 많이 하고 관심이 많기에 이 작품을 본 젊은 관객들 반응이 참 궁금하다"며 "< PMC >가 아마 '바로미터'가 되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개인적으로 액션보다는 에이헵의 영어 연기가 가장 어려웠다. 발버둥 쳤지(웃음). 흑인, 히스패닉이 많은 동네에서 배운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지인 같은 발음은 불가능하겠지만 대사에 감정을 실으며 자유롭게 소화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연습했다.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에이헵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로, 공수부대를 이끄는 고참이기도 하다. 그러다 사고로 부하와 자신의 다리를 잃는데 공교롭게도 그 작전이 부대에선 꽤 크고 중요했던 거다.  

그 일로 불명예제대 했던 것이고 배신감과 다리 잃은 상처를 안고 한국을 떠나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에 자릴 잡는다. 반드시 필라델피아여야 했다. 이주 노동자들이 많은 곳이다. 거기서 싸구려 의족을 차고 살다가 특기가 소문났고, 벼룩시장 같은 걸 통해 민간군사기업에 들어간 거지. 거기서 승승장구하다 팀의 리더로 승진한 것이다."
 
뿌리 없이, 영주권도 없이 생활하는 에이헵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하정우는 중학교 동창을 떠올렸다고 전했다. 지금은 뉴욕에서 셰프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과거를 떠올리며 하정우는 "14년 만에 영주권을 땄다는데 그 과정에서 친구가 겪은 비극이 많이 생각나더라"고 말했다.
   
아이디어의 원천

알려진 대로 < PMC >의 처음 시작은 하정우의 간단한 제안에서였다. 제한된 공간 활용을 잘하는 김병우 감독에게 비무장지대 지하 30미터 벙커에서 벌어지는 설정을 하정우가 전한 것. 초기 아이디어에 대해 하정우는 "땅굴들이 꽤 발견됐잖나. 분명 그 공간을 파놓고 활용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며 "남북이 만나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답했다.

막상 촬영에선 고생의 연속이었다. "에이헵이 앉아 있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기어 다니잖나"라며 그는 "비좁은 공간에서 카메라 스태프 세 명이 따라오는데 그들끼리도 엉켜서 부딪히고 제 발을 밟기도 하고 난장이었다"며 "또 여름이라 다들 엄청 고생했다"라고 당시 일화를 전했다. 무엇보다 극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북한 엘리트 의사 윤지의(이선균)와 신뢰감을 쌓는 과정이 설득력 있어야 했음을 하정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처음 호흡을 맞춘 이선균과 거리감을 좁히는 과정 역시 필요했다. 

"에이헵 입장에선 한국을 떠나 생활하다가 정말 오랜만에 한국말을 들은 거잖나. 그 난장판에서 들린 한국말에 마음 한쪽에서 반가움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핀란드 북부 어떤 동네에 갔었는데 음식도 안 맞고 정말 미칠 것 같을 때 중국식당을 발견한 적이 있다. 너무 기뻤고 반가웠다.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전혜진 누나(배우이자 이선균의 아내) 덕에 선균 형을 만나게 됐다. 현장에서 정말 뚝심 있더라. 뭔가 혼란스러운 상황일 때 전 계속 물어보곤 하는데 형은 묵묵히 기다리더라. 사실 물어보나 기다리나 결과는 별 차이 없었다. 바위 같은 느낌이 있다. 자녀를 둔 아빠라서 그런가(웃음). 영화 촬영 중에 같이 농구도 좀 했고, 끝나고는 같이 2주간 하와이 여행도 다녀왔다. 마라톤 대회도 참여했고. 앞으로 형과의 관계가 더 기대된다." 

에이헵과 윤지의를 통해 영화는 남북 관계에 영향을 주는 미국, 중국 등의 요소도 설명한다. 실제로 남북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묻자 하정우는 "미국 정치놀음으로 에이헵 팀이 파견된 것이고 중간에 중국이 끼면서 난장판이 된 건데 남북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잘 해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한반도를 둘러싼 다른 나라의 이권 다툼에서 우리 스스로가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이라 본다"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밝혔다.
   
이면을 생각하다

최근 걷기에 대한 책을 낼 정도로 운동을 일상화한 그다. 작품 활동을 마라톤에 비유해 '사점'(경기 중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지 물었다. 하정우는 "아마 사람마다 상대적일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각자의 통점에 따라 힘들고 퍼지는 때가 다를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마라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제가 배우라서 특별할 것도 없다. 직업이 배우일 뿐이고 영화 하는 게 저의 재능이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다들 어떤 날은 이상하게 피곤할 때가 있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잖나. 그렇게 움직이다 보면 힘이 생기기도 하고. 지금까지 제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있는 만큼 보여주고 아는 만큼 표현하려 해서인가?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걱정되면 걱정된다고 말한다. 

놀랍고 무서운 건 스크린 속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뭔가 이상하거나 어색한 건 다들 알거든. 신인 땐 없는 것도 있어 보이려 했고, 뭔가 그럴싸하게 하려 했다. 선배들에게도 좋은 연기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있는 만큼만 표현하라 하시더라. 감정 연기를 할 때도 정말 눈물을 펑펑 쏟아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뼈저리게 느끼고 경험해야 표현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싶다. 진실은 통한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를 거치며 하정우는 자신의 연기관을 정립해왔다. "왜 요즘엔 그런 영화를 안 하냐는 질문을 많이들 하신다"며 그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제작사를 만든 이유도 직접 출연할 수 없을지언정 누군가는 그런 (독립, 저예산) 작품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서다"라고 전했다.

"배우로선 어렵겠지만 제작자나 감독으로선 그런 작품을 만들 기회가 남아 있다고 본다. 가장 무서운 건 관성 같다. 저도 관성적으로 연기한다고 느껴질 때 공포감이 확 든다. 어떡하면 깨어 있을 수 있을까. 겨울엔 따뜻하기만 하고, 여름엔 시원함을 찾기만 해선 안 될 것 같다. 제가 많이 걷는 이유도 어쩌면 마지막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사람의 이면을 보려고 한다. TV에서 국회의원 등이 심각하게 말할 때 저 사람은 집에서도 그러려나 생각한다. 친한 친구를 만나도 사석에선 허당이고 되게 웃기지만 겉으로 보면 되게 냉정한 경우가 있잖나. 제가 흥미를 느끼는 건 보이는 모습보단 그런 이면의 모습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도 늘 다른 면을 보일 캐릭터를 생각하는 것 같다. < PMC >는 전개가 빨라서 그런 걸 보일 여유가 없었지만 <터널> 땐 개가 케이크를 먹는 걸 보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화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시련을 기꺼워하며 고통에서 성장하는 사람. 하정우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당장 2019년에도 차기작 두 편을 찍으며 달려야 한다. "새로운 작품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시간 보내는 게 내년 목표"라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또한 그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