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의 포스터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의 포스터 ⓒ 넷플릭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리보 마마'라 불렀던 보모 리보리아 로드리게즈와의 추억을 바탕으로 1970년대 유년기를 보낸 멕시코 시티의 가정과 사회를 그린다. 최근 보도된 바에 따르면 쿠아론의 실제 고향 동네에서 촬영이 진행됐고, 어린 시절 저택과 가장 흡사한 위치에 세트장을 지어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물품들로 공간을 채웠다.

스태프, 배우들도 모두 멕시코인이다. 모국어인 스페인어와 멕시코 원주민어에는 자막이 나오지만 영어 대사는 번역되지 않는 점 또한 이 영화의 자전적 성격을 강화한다. 

쿠아론의 기억은 흑백 스크린과 정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재현된다. 치밀한 롱테이크와 역동적 연출로 명성을 날린 그조차도 본인을 회상함에 있어 차분하고 고요한 시선을 택한다. 카메라는 패닝 숏의 수평적 이동으로 인물을 따라가거나 아예 고정되어 있고, 때때로 카메라의 움직임은 삶과 죽음의 중요한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이 보인다.

영화 속 화면은 흑백이지만 65mm 디지털로 촬영돼 매끈한 현대성을 품고 있기에 부드럽다. 오래 전 옛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듯, 드문드문 생략되는 서사 속에도 그 장면을 담아내는 롱테이크의 카메라 움직임은 고요하다.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 시티에서 보모로 일하는 인디오 클레오(알리챠 아파라시오 분)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 시티에서 보모로 일하는 인디오 클레오(알리챠 아파라시오 분)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 넷플릭스

 
그러나 쿠아론은 <로마>를 '본인의 영화'로 한정 짓지 않는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시선은 소년의 것이 아니라 그를 돌보는 중산층 가정의 보모 클레오(얄리차 아파라시오 분)의 것이다.

백인 중산층 가정의 엄마 소피아(마리아 데 타비라 분)와 네 아이들, 할머니를 돌보며 가사를 담당하는 클레오의 시선이 영화의 중심이다. 극 중 클레오는 가치 판단이나 정치성,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방인이다. '내부의 외부인'인 그의 경험과 관찰은 1970년대 멕시코 사회를 투영함과 더불어 삶과 죽음, 연대와 사랑이라는 인간 보편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간다. 

인디오의 후손인 클레오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급의 틀 속에 산다. 영화 속 인디오들은 고향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클레오의 어머니) 열악한 빈민촌에서 시간을 죽이고 (클레오의 남자 친구) 도시에서 보모 등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간다. 영화에 인종차별적인 표현은 없지만 차별적 프레임의 사회 속 클레오의 행동은 상당 부분 제한되어 있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반려견 보라스와 새장에 갇힌 새들은 클레오를 은유하는 기표가 된다.

여성의 연대 담은 <로마>, 바탕에는 '비뚤어진 남성성'이 있다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의 사회상을 그리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흑백 영상으로 담고 있다.

<로마>는 1970년대 멕시코의 사회상을 그리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흑백 영상으로 담고 있다. ⓒ 넷플릭스

 
<로마>가 아름다운 영화인 이유는 이 작은 존재를 혼자로 내버려두지 않음에 있다. 클레오를 고용한 소피아는 남편 안토니오의 외도를 알면서도 자녀들에게 사실을 숨기지만, 클레오에게는 그 상처와 아픔을 일정 부분 공유한다. 클레오를 병원에 데려가는 장면에서 애써 콧노래를 부르며 침착한 모습을 보이지만, 타고 있는 차의 옆면이 갈려 나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소피아의 감정 상태는 불안하다. 소피아와 클로에가 고용주와 가사 노동자의 수직적 관계로부터 카메라 워킹처럼 수평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이 영화의 주된 줄기가 된다. 

그 연대의 바탕에는 비뚤어진 남성들이 있다. <로마>는 권위적인 남성성을 비틀고 꼬집는다. 클레오의 남자 친구 페르민은 무술에 심취해 있지만, 극 중 무술의 대가가 말하듯 '정신에서부터 육체가 움직이는 것'이라는 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체적 단련에만 힘쓴다. 때문에 그는 여자 친구의 임신 소식을 듣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며, 향후 재회 장면에선 폭력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는 캐나다로 장기 출장을 떠난다는 거짓말을 남기고 시내에서 방종한 데이트를 즐긴다. 

알폰소 쿠아론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보모의 손에서 길러졌다고 한다. <로마>의 연대하는 여성상이 생명의 탄생, 양육의 과정을 통해 모성(母性)의 위대함을 은연중 각인시키는 것은 감독 개인의 철학이 보편의 감성으로 전유되는 과정이다. <칠드런 오브 맨>의 디스토피아는 생명을 품고 탄생시키는 여성을 지키기 위한 희생으로 파괴되었으며 <그래비티>의 표류자는 생명의 근원 바다로부터 기어 올라오는 여성의 강인함을 찬미했다. 

극 중 클로에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비범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도시 저택에서도 시골 농장에서도 강아지들이 클로에에게 먼저 다가와 손을 핥는다. 임신해 무거운 배를 이끌고도 네 아이들을 위해 달리고 또 안아준다. 운동장에 모인 수많은 남자들이 무술의 대가가 선보이는 간단한 동작을 따라 하지 못해 애먹을 때 유일하게 그 동작을 해내는 것도 클로에다. 극 중 대가의 말에 따르면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고도의 동작'이다. 

1970년, 민주주의가 탄압받던 시절의 멕시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중 한 장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중 한 장면 ⓒ 넷플릭스

 
소피아와 아이들, 클로에가 한데 부둥켜안고 있는 <로마>의 포스터 속 장면은 삶의 역경을 이겨내는 거대한 사랑의 상징이다. 그 사랑은 권위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며 허세와 거리가 멀다. 알폰소 쿠아론은 1970년대 민주주의가 탄압받고 보이지 않는 인종 간의 계급 차이가 존재하던 멕시코에서 아이들을 길러낸 보모와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 찬사는 모든 여성, 모든 어머니들에 대한 아낌없는 감사와 사랑의 위대함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단절과 죽음, 고통 속에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방법은 서로를 끌어안고 단단히 손을 맞잡는 사랑의 길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길러내고 영혼에 심어놓는 과정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우리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저명한 의제처럼, 멕시코시티의 작은 동네 로마는 쿠아론의 어린 기억으로부터 보편의 인류애를 이끌어내는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은 자유를 위해 투쟁한 젊음이 피를 흘림과 동시에 한 생명이 태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치열한 투쟁의 장소이기도, 평온한 일상 속 새로운 도전을 통해 미래를 그려 나가고자 했던 아름다운 계획의 장소이기도 했다. 

<로마>는 숭고한 삶, 위대한 사랑에 바치는 뜨거운 헌사다. 21세기 가장 '개인적인' 플랫폼 넷플릭스를 배급사로 결정한 것조차 의미 있는 결정으로 느껴질 정도로 작은 부분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걸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도헌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https://brunch.co.kr/@zenerkrepresent/284)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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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 (2013-2021)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편집장 (2019-2021) 메일 : zener1218@gmail.com 더 많은 글 : brunch.co.kr/@zenerkre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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