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 the guest >의 박홍주(김혜은 분).

< 손 the guest >의 박홍주(김혜은 분). ⓒ OCN

  
OCN 수목 드라마 < 손 the guest >에는 유력 정치인인 박홍주(김혜은 분)가 유령의 도움을 받는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그를 후원하는 유령은 보통 귀신이 아닌 박일도 귀신이다. 이 드라마에서 박일도는 호환마마보다 훨씬 무서운 1급의 큰 귀신으로 등장한다.
 
박일도는 살아생전에 박홍주의 작은할아버지였다. 이상 성격의 소유자였던 박일도는 성격적으로 자신을 닮은 박홍주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죽어 귀신이 돼서도 박홍주를 돕는다는 것이다. 그런 박일도 유령의 보이지 않는 지원 하에, 박홍주는 자원봉사 등으로 쌓인 선한 이미지나 부모가 물려준 재정적 기초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기독교 교인 중에 "하나님, 저를 지켜주세요"라는 탄원 기도는 많이 해도 "하나님,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기도는 잘 안 하는 이들이 있다. 박홍주는 박일도 귀신한테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감사 기도까지 한다. 박일도에 대한 신앙이 보통 수준을 넘은 것이다.

박홍주는 유권자나 카메라 앞에서는 겸손하고 친절해도, 측근들한테는 무척 난폭한 위선자다. 그런 인물이 박일도 귀신 앞에서는 한없이 순한 양이 되어 감사기도까지 한다. 자신의 사회적 성공에서 박일도 귀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된다면, 그런 행동이 나올 만도 할 것이다.
 
 박일도.

박일도. ⓒ OCN

  
사회적으로 유력한 지도자가 귀신의 조력을 받는 일이 있다는 관념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일례로,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안사의 난(755~763년)이라는 유명한 반란을 일으켜 잠깐 동안 황제 생활을 했던 안녹산이 신병(神兵)으로 불리는 귀신 병사들의 조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유사한 이야기가 조선시대 신숙주와 관련해서도 있었다. 숙주나물로 유명한 배신의 대명사, 신숙주한테 귀신이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신숙주는 대단히 유능했다. 머리가 특별히 비상했다. 세종 때인 1438년(당시 21세) 한 해 동안에 과거시험 소과의 2대 부문인 진사시험(작문력 테스트)과 생원시험(경전 이해력 테스트)에 모두 합격했을 정도다. 둘 중 하나만 붙으면, 다음 단계인 대과 응시자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불필요하게' 두 개 다 응시해서 다른 수험생 눈에 눈물이 나게 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439년에는 22세 나이로, 세종 임금이 직접 주관한 대과 시험에서 3등으로 급제했다. 조선왕조 전 시기의 대과급제 평균 연령이 36.7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빨리 급제한 편이다.
 
그렇게 해서 관직을 받고 근무하다가 10년 뒤인 1449년, 또 한번 눈물나게 하는 일을 벌였다. 이번에도 눈물은 자기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 눈에서 났다. 이 해에 그는 32세 나이로 또다시 대과에 응시해 한번 더 급제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굳이 했던 것이다. 힘이 넘쳐서 몸을 주체하기 힘든 사람처럼, 공부 쪽으로 에너지가 넘쳐 시험이라도 안 치고는 못 배겼던 모양이다.
 
시험만 잘 쳤던 게 아니다. 실무 능력도 탁월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등극한 뒤에는 이 정권의 외교분야 실세가 되어 대외관계를 설계하고 지휘했다. 그는 기존 전통을 이어받아 여진족한테는 군사적 '채찍'을 쓰고 일본과 대마도(1869년까지는 독립정권)에는 경제적 '당근'을 제시하는 외교적 틀을 공고하게 굳혔다. 그가 공고화한 외교관계는, 조선의 태평성대가 그 후로도 약 150년간 연장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그가 구축해놓은 외교관계의 틀이 태평성대를 뒷받침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신숙주묘.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신숙주묘. ⓒ 김종성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인지, 그와 관련해서도 < 손 the guest >의 박홍주와 유사한 풍문이 퍼졌다. 귀신이 그를 돕는 소문이었다.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대학자였던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이 괴담이 소개돼 있다.
 
신숙주가 대과에 응시했을 무렵이라고 한다. 22세 때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밤중에 친구와 함께 성균관 쪽으로 걸어가다가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 괴물체가 길을 가로막았다. "윗입술은 하늘에 붙고 아랫입술은 땅에 붙어" 있는 거대한 물체였다. 엄청나게 큰 물체를 봤던 모양이다.
 
함께 걷던 친구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친구가 사라진 뒤에도 신숙주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앞을 향해 달려들어 그 거대한 입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푸른 옷차림의 청의동자가 갑자기 출현하더니,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선비님을 따라다니며, 지시하시고 시키는 대로 하고자 합니다"라고 청의동자는 말했다. 신숙주의 담력을 시험해봤던 모양이다. 청의동자의 청을 듣고 신숙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동자귀신의 보좌를 받게된 직후에 신숙주가 대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동자귀신이 없더라도 무난히 합격했을 사람이니, 이런 소문은 신숙주의 명성에 누가 될 뿐이었다.
 
그 뒤로 신숙주 곁에는 항상 청의동자가 항상 있었다고 한다. 길흉이 닥치기 전에 미리 알려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구체적인 방략도 알려줬다고 한다. 동자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일이 풀려나갔다고 한다.
 
35세 때인 1442년, 신숙주는 사신단 서열 3위인 서장관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에는 해상으로 사신 길을 떠나면, 죽어서 돌아올 확률이 매우 높았다. 선박 제조술이나 항해술이 그만큼 열악했다. 하지만 신숙주는 무사히 다녀왔다. 이때도 청의동자의 도움이 있었다고 <어우야담>은 말한다. 신숙주의 능력과 행운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반세기 넘게 신숙주의 곁을 지켜주던 청의동자가 하루는 뜻밖의 행동을 했다. 갑자기 울면서 하직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청의동자가 그렇게 떠나버린 지 얼마 뒤, 신숙주는 5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녹산에게 신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류가 아니겠는가?"라며 <어우야담>은 신숙주와 안녹산의 사례를 연결지으며 괴담을 끝맺는다.
 
오늘날의 정치인한테는 '귀신이 돕고 있다'는 소문이 악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숙주 시대에는 조금 달랐다. 귀신과 무속을 배척하는 유교이념이 백성들 생활 속에 파고든 것은 혁신 정치인 조광조가 등장한 16세기 초중반부터였다.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규·환난상휼이라는 4대 강목을 내용으로 하는 향약이 지방 곳곳에 확산된 것도 그 시기였다.
 
신숙주가 생존한 15세기 초중반만 해도 아직은 무속이 일상생활을 좌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문자 그대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후대 사람들보다는 귀신 이야기에 훨씬 더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숙주가 동자귀신의 도움을 받는다는 풍문이 돌아도, 그의 정치적 운신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 THE GUEST 신숙주 안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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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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