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진실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 탤런트 최진실. 사진은 2008년 5월의 모습.

2008년 10월 2일 사망한 배우 최진실 ⓒ 연합뉴스


당대의 톱스타였던 배우 최진실이 떠난 지 올해로 딱 10년이 됐다. 최진실의 10주기 추도식에는 모친인 정옥숙씨를 비롯해 두 자녀, 끈끈한 우정을 나눴던 이영자, 정선희 등이 참석해 그녀를 추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각이 난다"던 이영자의 회고처럼, 세상을 등진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최진실은 여전히 대중의 깊은 곳에서 숨쉬고 있다. 우리에게 최진실은 어떤 배우였나.
 
TV와 영화, 모두 사로잡았던 전무후무한 톱스타
 
최진실은 대한민국 연예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스타이자 배우였다. 뛰어난 외모, 빵빵한 학력은 없었지만 싱그러운 미소와 친근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던 그녀는 빛나는 톱스타였고, 시청률을 보증하는 흥행배우였으며, 온 몸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훌륭한 연기자였다.
 
1988년,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혜성같이 등장한 이래 그는 <두 권의 일기><우리들의 천국><질투><폭풍의 계절><사랑의 향기><아스팔트 사나이><아파트><별은 내 가슴에><그대 그리고 나><장미와 콩나물><장밋빛 인생><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과 같이 주옥같은 명작들을 쏟아내며 TV 브라운관을 점령했다.
 
90년대 초반 채시라-김희애와 함께 MBC 트로이카 시대를 열며 치열한 연기 경쟁을 펼쳤고 그 결과, 1992년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 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여자 인기상, 1993년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 연기상, 1994~1995년 <S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였으며 1997년에는 <MBC 연기대상> 대상을 비롯해 한국방송대상 탤런트상 등을 받으며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TV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최진실의 흥행력은 막강했다. <남부군><나의사랑 나의신부><수잔 브링크의 아리랑><미스터 맘마><마누라 죽이기><고스트 맘마><편지><마요네즈> 등의 영화를 통해 강수연-심혜진과 함께 90년대 영화계를 삼등분했던 그는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 등 주요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연기력 또한 인정받았다. 특히 청룡영화상에서는 1990년을 시작으로 무려 7번에 걸쳐 인기스타상을 수상해 그야말로 '넘사벽'급 인기를 과시했다.
 
이 같은 인기에 대해 정치평론가이자 사회과학자인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최진실 신드롬>이라는 글에서 최진실을 당대에 대체 불가능한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진실의 얼굴과 동작은 철저하게 '쿨'하거니와 그 어떤 클로즈업에서도 일그러지지 않는 오밀조밀한 단단함을 자랑한다. 만약 다른 미녀 탤렌트가 '요플레'를 선전하며 '엄마 딱 한 개만 더, 응?'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죠'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흉내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는다면 모를까, 그건 최진실씨가 아니고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만용이 될 것이다."

대중과 가장 가까웠던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 
 
 4일 오전 서울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을 마친 탤런트 故 최진실의 운구차량이 경기도 성남시 갈현동 영생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서울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을 마친 탤런트 고 최진실의 운구차량이 경기도 성남시 갈현동 영생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 유성호

 
이렇듯 20년 넘게 톱스타의 자리를 지켰던 최진실은 대중과 가장 가까웠던 인간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신비주의'가 연예계에 광풍처럼 몰아닥쳤을 때도 그는 끝까지 대중 곁에서 친근한 미소를 보여주었고, 서민적인 말투와 소박한 미소로 여느 톱스타답지 않게 언제나 살가운 며느리이자 귀여운 막내딸 같은 이미지를 자랑했다.
 
돌이켜보면 최진실은 이미지 메이킹에 있어서 타고난 승부사였다. 20대에 귀엽고 상큼한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그는 30대에 이르러서는 똑소리 나고 현명한 맏며느리 이미지로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으며, 온갖 풍파를 겪고 홀로서기에 나선 40대에는 다소 억척스러우면서도 소녀 감성을 간직한 엄마이자 아줌마로 자연스럽게 변신했다.
 
여러 위기 상황과 굴곡 속에서도 최진실이 여전히 최진실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진실은 대중과 함께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이에 맞는 역할과 작품을 적절히 소화해 내는 동시에 여전히 젊고 귀여운 감성을 은근히 드러낼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2000년대 들어 고 조성민과의 결혼과 이혼, 가정폭력 등으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곧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최진실 특유의 '친 대중적' 성향이 큰 몫을 차지했다. 대중에게 최진실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었다. 언제든 TV를 틀면 나와야 했고, 옆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웃고 떠들 수 있을 것 같은 가족과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실제로 최진실은 주변 사람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한 배우였다. 힘든 촬영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별명이 '삼자대면'일 정도로 친구들의 일에 앞장서며 나설 줄 알았으며, 어떤 어려운 부탁에도 "그렇게 쉬운 이야기를 뭐 그렇게 어렵게 하니?"하며 선뜻 나섰던 사람이었다.
  
시대의 아이콘, 영원히 잠들다
 
그녀는 80-90년대 대중문화계를 관통하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큰 사랑을 받은 '마지막 신데렐라'였다. 뛰어난 미모도, 신들린 듯한 연기력도 가지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수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최진실이었지만 2008년 10월 2일을 끝으로 영원히 볼 수 없는 별이 되었다.
 
문화 평론가 조지영의 말처럼,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한 여자. 쉽게 사랑 받았고, 쉽게 버림도 받았던 여자. 눈물도 웃음도 많았던 그 여자가 떠났다. 우리는 요정으로 나타나 연인이었다가 누이이자 언니였고, 아내 혹은 며느리이자 엄마가 되어 주던 사람, 언제나 돌아보면 거기 있어줄 것 같았던, 대체 불가능한 시대의 아이콘을 그토록 허망하게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최진실이 떠난 지 10년, 그녀는 가고 추억만 남았다.
최진실 질투 이영자 그대 그리고 나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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