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봉중근이 은퇴 소식을 알렸다.

LG 봉중근이 은퇴 소식을 알렸다. ⓒ 연합뉴스

 
2000년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활약했던 봉중근(38, LG 트윈스)이 은퇴를 선언했다. LG는 19일 공식 발표를 통하여 봉중근의 은퇴를 알렸다. 오는 28일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KIA 타이거즈전에서 봉중근의 은퇴식과 사인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봉중근은 1997년 신일고 시절 아마추어 자유계약으로 메이저리그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빅리그에는 2002년에 데뷔했고 이후 신시내티 레즈를 거치며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48경기 7승4패, 평균자책점 5.17에 그쳤다. 이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다가 2005년 팔꿈치 부상으로 한 해를 날리고 2007년 결국 국내 유턴을 결정하여 1차 지명을 통하여 LG 트윈스에 입단한다.
 
돌아온 LG 프랜차이즈 스타였지만... 불운의 에이스

봉중근은 KBO리그에서는 오직 LG의 유니폼만을 입고 활약하며 12시즌 동안 321경기에 출장해 통산 55승 46패 2홀드 109세이브 899.1이닝간 평균자책점 3.41의 기록을 남겼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선발로 나서서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야생마' 이상훈 이후 LG 특급 좌완의 계보를 잇는 에이스로 활약했다.팔꿈치 수술을 받고 한해를 쉰 2012년부터는 마무리 투수로 전환하여 100세이브를 넘길만큼 최고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하지만 봉중근의 전성기는 LG가 가을야구와 오랫동안 멀어지며 끝이 없는 암흑기를 보내던 시절과 겹쳤다. 봉중근의 활약은 뛰어났지만 타선이나 불펜 지원을 받지못하여 승리를 날리는 경우가 많았다. 봉중근은 2013년에야 LG가 10년의 저주를 끊어내고 플레이오프에 직행하면서 겨우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당시 봉중근은 LG 구단 역대 기록인 38세이브를 올리는 맹활약으로 팀의 가을야구 진출에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하지만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한국시리즈 무대는 끝내 밟지못했다.
 
많은 야구팬들에게 LG의 외로운 에이스 시절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상이었다. 봉중근은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4강)을 시작으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금메달), 2009년 WBC(준우승),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금메달),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금메달) 등에 중요한 대회마다 빠짐없이 출전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봉중근이 참여한 대회마다 대표팀의 성적이 대부분 좋았던데다, 봉중근 개인의 활약상도 뛰어나 지금까지도 박찬호-이승엽 등과 함께 '태극마크만 달면 더 강해지는' 대표적인 선수로 기억된다.
 
특히 국가대표팀은 물론 봉중근의 야구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명장면은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의 활약상이었다. 당시 류현진-김광현 등 대표팀 주력 투수들이 컨디션 난조에 시달리며 선발진이 무너진 상황에서 봉중근이 일본전 선발등판을 자원했고 봉중근은 대회 내내 일본전 전담 선발로 등판하여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51을 기록하는 눈부신 호투로 한국의 결승진출을 이끌었다. 일본 최고의 선수였던 스즈키 이치로에게 잇달아 '페이크 견제구'를 던지며 마치 상대를 조련하는듯한 모습은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우여곡절 많았던 선수생활 담긴, 봉중근의 다양한 별명들
 
 2009년 3월 18일 오후(한국시간)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 선발 봉중근이 4회초 일본 타선을 병살로 요구한 뒤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2009.3.18

2009년 3월 18일 오후(한국시간)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 선발 봉중근이 4회초 일본 타선을 병살로 요구한 뒤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2009.3.18 ⓒ 연합뉴스

 
봉중근은 다사다난했던 야구인생과 본인의 강렬한 캐릭터가 겹쳐져서 선수생활 내내 유독 다양한 별명이 많았던 선수이기도 했다. 소년가장으로 활약하던 LG의 선발 시절에는 잘 던지고도 승리를 따내지못하는 경우가 많아 '봉타나' '봉크라이'로 불린 것을 비롯해, 국가대표 한일전에서의 활약상 이후에는 이름이 같은 안중근 의사를 빗댄 '봉의사' 혹은 '봉열사'로 불렸다. 마무리로 다소 부진하며 롤러코스터같은 활약을 펼쳤던 2015년 한정으로 '봉작가' 혹은 '봉포영화'라는 별명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빅리그에서는 그리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을 담은 '봉미미'라는 짓궂은 별명이 붙기도 했다.
 
희소성이 있는 성씨와 결합되어 어떤 별명도 '봉OO'으로 입에 착착 참기는 소화력이 발군이었다. 얼핏 장난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지금와서 돌아보면 봉중근의 별명 하나하나가 바로 그가 걸어온 야구인생을 함축하는 단어들이기도 했다.

수많은 스타 선수들이 그러했듯 봉중근도 세월의 흐름은 피할수 없었다. 봉중근은 2016년부터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급속하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마무리에서 다시 선발로 전환을 시도했지만 계속된 어깨수술과 재활로 1군 무대에 거의 오르지 못했다.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리그에서 손꼽히는 투수였기에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봉중근의 몰락은 LG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줬다. 결국 봉중근은 LG에서 10년 이상 활약하며 은퇴한 레전드 중 이병규(2016년 은퇴)에 이어 또 다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아보지 못하고 떠나는 선수가 됐다.
 
봉중근은 사실 실력에 비하면 운이 없었던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 진출붐을 타고 어린 나이에 해외무대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으나 빅리그의 높은 벽을 넘지못하고 20대 중반을 넘긴 늦은 나이에 KBO무대로 돌아와야했고 이는 후일 FA 자격 취득 면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봉중근은 선수생활 막바지에 전성기가 지난 2016년에야 LG와 2년 15억에 계약했던 것이 유일한 FA 계약이었다. 대표팀에 비해 소속팀에서의 성적 복이 별로 없었고, 팀 사정상 선발과 불펜을 여러 번 전환했던 것이나 비시즌 잦은 대표팀 차출 등도 부상 전력이 많았던 봉중근 개인으로서는 그리 큰 득이 되지 못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봉중근은 해외에서 방황하다가 국내로 유턴한 선수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남았으며 , 남들보다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LG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정받았다는 명예는 돈이나 기록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LG는 물론 한국야구에서 봉중근이 남간 발자취는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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