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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건물의 총 길이가 680m... 베르사유궁의 압도적 규모

베르사유궁(Château de Versailles)은 파리 외곽에 있기 때문에 옷차림을 가벼이 하고 숙소를 나섰다. 인근 역에서 메트로를 타고 생미셸-노트르담(St-Michel Notre-Dame)역까지 갔다. 거기서 RER로 갈아타려는데 불어, 영어, 일어의 세 가지 말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역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역은 상당히 붐볐다. 나는 소매치기 예방을 위해 핸드백과 카메라를 몸 앞쪽으로 걸치고 탔다. 2층으로 된 RER 열차는 흔들림과 소음이 없고 승차감이 좋았다. 도심을 빠져나가면서부터는 지상으로 달리기 때문에 차창으로 흐르는 파리 교외의 풍경을 편안히 구경할 수 있었다. 베르사유까지의 승차시간은 52분이라고 구글맵이 표시하고 있었으나 마지막 역이 어디인지 헷갈렸다. 그러자 아빠가 웃으셨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는 데가 종착역이다."

과연 종착역에 오니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출구에 갑자기 긴 줄이 생겼고, 역사를 빠져나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 베르사유궁으로 가는 관광객들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어제와 달리 흐린 날씨에 기온도 여간 쌀쌀한 것이 아니었다. 구글맵을 보면 역에서 베르사유궁까지는 도보로 14분 거리였다. 아빠가 걱정이다. 여행길에 감기라도 드시면 큰일이다 싶어 도로변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서 'PARIS'라는 글자가 수 놓인 후드재킷을 사드리고 나도 하나 사 입었더니 커플룩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베르사유궁 앞이었다. 궁전 건축물들이 좌우대칭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물의 총 길이가 680m에 이른다는 베르사유궁은 정문으로 다가갈수록 황금빛의 화려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베르사유궁 입구에 세워진 루이 14세 기마상
 베르사유궁 입구에 세워진 루이 14세 기마상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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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 루브르궁과는 사뭇 달라요."
"그래? 루브르궁은 정교한 공이 많이 들어가고 첫 인상도 아주 진중한 느낌인데 반해 베르사유궁은 화려하지만 어쩐지 날림 같은 느낌도 드는구나." 


하지만 아빠의 느낌일 뿐이었다. 다가가면서 보니 베르사유궁도 벽면 곳곳과 모서리와 지붕에 정교한 조각품이 새겨져 있는 등 나름대로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돌을 깐 궁전 마당엔 이미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찍 온다고 왔는데도 행렬은 피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지루한 보안검색.

한참 만에 입장하게 되었다. 입구에는 베르사유궁 내부를 설명해주는 한국어 버전의 오디오 가이드와 한국어 버전의 지도가 있었다. 아빠와 나는 수신기를 하나씩 집어 들고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베르사유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가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면 한국어 해설이 자동으로 나온다.

베르사유궁의 볼거리는 화려한 궁전 그 자체였다. 비록 개방된 곳이 2300개의 방 가운데 일부이고, 개방된 궁실들에서 볼 수 있는 가구 등의 실내 진열품은 후대에 보완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궁전의 호화로움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왕비의 방
 화려한 왕비의 방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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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된 1층과 2층의 수많은 방을 지나 본관 2층에 있는 '거울의 회랑(La Galerie des Glaces)'에 오자 아빠와 나는 그 화려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폭 10.5m의 휘황찬란한 회랑이 73m나 전개되고 있었다. 높이 12.3m의 천장은 웅장한 그림들과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고, 회랑을 따라 놓인 금박 입힌 사람 모양의 대형 촛대들과 벽에 설치한 거대한 거울들이 어우러진 그곳은 절대권력의 호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게 해준다.

거울의 회랑 전장이 73m나 이어지는 휘황찬란한 이곳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 거울의 회랑 전장이 73m나 이어지는 휘황찬란한 이곳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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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랑은 말이다. 1차대전 후 세계열강과 독일 간에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서명된 곳이기도 하다. 그때 파리엔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김규식 등 신한청년당 대표단이 와 있었다."
"신한청년당이요? 보통은 상해임시정부 대표단이었다고 알려져 있던데요?"
"나라를 빼앗겨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온 것이었지만, 와 있는 동안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외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으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지."

"이 방에도 왔었나요?"
"아니. 일본이 방해하고 열강이 대표단의 청원을 묵살했으니 이 방은커녕 베르사유궁에 들어오지도 못했지. 우리 근대사의 아픔이야." 


1차대전의 5대 승전국으로 의기양양하게 68명의 공식대표단을 파견한 일본과 달리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참석했던 소규모의 우리 대표단은 사실상 문전박대를 당했다. 창으로 정원을 내다보던 아빠는 한숨을 지으셨다. 역사의 아픔이 서린 거울의 회랑엔 아빠와 또 다른 이유에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지난날 화려한 궁중 무도회가 열리던 이 회랑의 북쪽 끝은 '전쟁의 방(Salon de la Guerre)'이고 남쪽 끝은 '평화의 방(Salon de la Paix)'이다.

수없이 많은 방이 있고, 그 방마다 수없이 많은 그림이 걸려 있지만 내가 찾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제복을 입은 궁전 직원은 불어 섞인 영어로 앙투아네트의 방은 내부수리 때문에 폐쇄되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보고 싶었던 방이 폐쇄되다니!

"무얼 좀 먹어야지?" 아빠가 식당 안내판을 보고 제안하셔서 궁전 안의 레스토랑 '안젤리나(Angelina)'를 찾아갔다. 출입구 위쪽에 '1903년에 세워진 집(Maison fondée en 1903)'이란 글자가 보였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안젤리나는 루브르박물관이나 튈르리 정원 앞에도 있는데 사교장소로 명성을 쌓아 현재는 파리의 핫스폿이 된 디저트 전문집이기도 했다.

식당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나는 아빠의 의향을 물어 오니온 수프(Soupe à l'oignon)와 안심(Filet de boeuf), 그리고 대구 등심(Dos de cabillaud)을 주문했다. 음식은 그런대로 맛있었다. 디저트로 주문한 밀푀유(mille-feuilles)와 몽블랑(Mont Blanc) 케이크가 나오자 이를 각각 반으로 잘라 컵에 옮기고 접시에 남은 반은 아빠 쪽으로 밀었다.

 프랑스의 대표적 디저트의 하나인 ‘몽블랑'
 프랑스의 대표적 디저트의 하나인 ‘몽블랑'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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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푀유는 '천개(mille)'의 '잎(feuilles)'처럼 겹겹이 포개진 페이스트리 사이사이로 크림 등의 필링(filling)을 포개 넣어 달콤하면서도 바삭하게 부서지는 식감이 일품인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저트이고, 몽블랑은 밤을 갈아 마론 크림을 국수 모양으로 짜서 진하고 달콤한 밤 맛이 강한 케이크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진한 홍차와 곁들이니 디저트의 단맛이 상쇄되어 조화로웠다. 프랑스 요리는 메인디시보다 디저트가 일품인 것 같다.

[아빠의 이야기] 루이14세가 베르사유궁을 크게 지은 진짜 이유

홍차를 마시던 딸이 물었다.

"베르사유궁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물던 여름 별장이었다면서요?" 

그랬다. 베르사유는 원래 왕실 사냥터로 사냥을 자주 나오던 루이13세가 이곳에 작은 수렵용 숙소를 지었다. 왕이 머무는 곳은 어디나 행궁이다. 작은 행궁 주변에 왕의 행차를 따라 나온 수행원들이 북적거리자 이들을 상대로 술집과 가게가 들어섰고, 그에 따라 작은 거리가 생겨났다. 이것이 베르사유라는 작은 도시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루이 13세라면 구체적으로 어느 때 왕이에요?"
"17세기 초반." 


그 아들이 바로 '태양왕(Le Roi-Soleil)' 루이14세였다. 왕위에 오른 건 17세기 중반인데, 이때 나이는 겨우 다섯 살. 어린애였다. 그러니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거쳐 재상 리슐리외(Richelieu)나 마자렝(Mazarin)의 섭정을 겪으며 주변 권력에 휘둘렸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태양처럼 강력한 왕이 되고 싶었던 루이14세는 아버지가 설치했던 수렵용 숙소 자리에 대규모 별궁을 짓기 시작했다.

 태양왕 루이 14세
 태양왕 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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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이 강력한 왕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예요?"
"있지. 크고 웅장한 궁전은 왕의 위엄과 권위를 높여주는 측면이 있는 거다. 한국이나 중국의 궁전을 생각해 봐라. 위엄과 권위가 확립되면 통치가 쉬워지고 비용도 적게 든다. 또 왕권을 강화하려면 그에 맞먹는 귀족들의 힘을 대폭 약화할 필요가 있지. 루이 14세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르사유궁을 지은 다음 귀족들을 파티에 초대하곤 했어." 


"파티에 초대하면 귀족의 힘이 약화되나요?"
"좋은 지적이다." 


루이 14세는 모든 귀족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누구는 초대하고 누구는 초대하지 않는 방법을 썼다. 경쟁심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또 궁중의 까다로운 매너와 규칙을 마련하고, 신분에 따른 좌석제도를 마련하여 신분이 높을수록 왕과 가까이 앉을 수 있게 했는데 귀족들에겐 이런 게 잘 먹혔다. "나는 보통귀족과 다르다", "다른 귀족들이 부러워한다"는 게 중점 포인트였다. 특히 귀족 부인들에게는.

이렇게 되자 베르사유 궁정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왕의 총애를 찾아 베르사유궁으로 오는 귀족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 경쟁이 심해지면서 왕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자신의 영지를 왕에게 헌납하고 베르사유궁으로부터 연금을 받아 사는 귀족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전략은 보기 좋게 성공했던 것이다.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과 반대로 왕의 부는 늘어나고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 돈과 권력으로 그는 영토확장 전쟁을 벌였고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다. 이런 자신감을 배경으로 '국가, 그건 나다(L'État, c'est moi,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사실 중앙집권화는 재상 리슐리외나 마자렝이 섭정할 때도 진행되었던 사안이지만, 지방에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일소하고 왕의 말 한마디로 전국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든 건 루이 14세였다. 1643년 왕위에 올라 1715년까지 무려 72년 동안 두 세대 반이 지나는 긴 시간을 통치했으니 신하들이 충성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보다 중요한 건 이 기간 동안 확립된 프랑스 문화였다. 사실 루이 14세 이전만 해도 유럽의 중심은 권력 면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문화면에서는 르네상스와 화려한 바로크 문화를 열었던 피렌체 중심의 이탈리아였다. 그 중심이 루이 14세 때부터 프랑스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였던 베르사유궁에 그런 측면이 있었군요." 

바로 그 점이다. 사치와 향락의 부정적 측면도 있지만 이 시기에 궁정문화, 다시 말하면 에티켓, 예절을 비롯하여 예술, 패션, 요리 등 프랑스 현대문화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이후 프랑스가 유럽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베르사유궁을 돌아보면서 프랑스가 미술, 그중에서도 회화의 중심이 된 까닭을 나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자 딸이 반문했다.

"회화요?"
"그림 말이다. 베르사유궁의 수많은 방에 걸린 게 뭐냐? 벽이고 천장이고 그림들로 치장되어 있단 말이지. 어제 본 루브르궁도 그렇고. 그리스·로마 시대는 조각품이 중심이었는데, 프랑스는 그걸 그림으로 대체했다는 생각이 든다." 


 벽과 천장이 온통 그림으로 장식된 베르사이유궁 내부
 벽과 천장이 온통 그림으로 장식된 베르사이유궁 내부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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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도 조각품이 있잖아요?"
"있지. 하지만 대세는 회화다. 왕궁의 그림 수요가 많으면 일반 귀족이나 부르주아 층에도 그 유행이 퍼지기 마련이다. 이래저래 화가들의 일거리는 많아졌을 거고, 바로 그런 흐름이 20세기 초의 피카소까지 이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이태리, 스페인, 네덜란드,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의 화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던 게 아닐까? 이거 맛있구나." 


이야기하느라고 미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몽블랑을 떠먹자 딸이 말했다.

"하나 더 시킬까요?"
"아니다."
"그럼 마저 드시고 정원으로 나가시죠."


딸의 손짓에 웨이터가 나타났다. 프랑스에선 손님의 신용카드를 계산대로 가져가지 않고 반드시 휴대용 단말기를 손님 앞으로 가져와서 계산한다. 식당이든 카페든 예외가 없다. 나는 "나이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지"라며 신용카드를 웨이터에게 건넸다. 딸이 나 대신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는 바람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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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