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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비너스의 팔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18세기 미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림이 <퐁파두르 부인>이라면 고대 미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조각상은 역시 <밀로의 비너스>다. 아빠와 나는 책자에 나와 있는 대로 쉴리관 1층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조각상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으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밀로의 비너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으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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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로 아프로디테라 부르는 높이 202㎝의 비너스상은 1820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Milos) 섬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에 <밀로의 비너스(Vénus de Milo)>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두 팔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이를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 팔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비너스를 더 완벽한 미녀로 만들었다고 역설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두 팔이 떨어져 나가기 전의 원형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아빠는 핸드폰의 갤러리에 저장해 놓았던 사진을 한 장 보여주셨다.

두 팔이 복원된 비너스상
 두 팔이 복원된 비너스상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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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고고학자 아돌프 프루트뱅글러가 복원한 비너스상이다. 오른손은 옷깃을 잡고 왼손도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대체 무엇이었을까?"
"글쎄요."

아빠는 다른 사진을 보여주셨다.

반데르 헬스트의 <파리스의 사과를 들고 있는 비너스>, 1664년작
 반데르 헬스트의 <파리스의 사과를 들고 있는 비너스>, 1664년작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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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이 그림을 보면?"
"사과네요."
"그렇지, 그리스 신화 '파리스의 심판'에 나오는 황금사과지."


그리스 신화엔 여신이 다수 등장한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 초대명단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이름이 누락되었다. 이에 화가 난 에리스는 연회장에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겨진 황금사과를 던진다. 그러자 사과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올림포스 최고의 여신 헤라,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는 각각 자기가 가장 아름답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이에 골치가 아파진 제우스는 그 심판을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떠넘긴다. 세 여신은 저마다 공약을 내걸었다. 그중 파리스의 마음을 움직인 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는 비너스의 공약이었다. 이에 파리스는 비너스에게 황금사과를 건넸고, 비너스는 파리스에게 그리스의 절세미녀 헬레네를 얻게 해준다. 하지만 헬레네로 인해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파리스는 이 전쟁에서 죽는다. 트로이 전쟁의 발발원인을 설명한 신화다.

조각상을 한참 바라보고 계시던 아빠는 <밀로의 비너스>를 보고 있자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드신다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또 다른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그건 <백제관음상>이었다.

백제관음상
 백제관음상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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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일본에 있는 것 아녜요?"
"그렇지."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목상이기는 하지만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미술품이거나 아니면 백제에서 건너간 사람의 작품이 분명하다면서 아빠는 <밀로의 비너스>는 서양 것이라 그렇다 쳐도 <백제관음상>의 8등신은 어찌 된 일이냐고 반문하신다.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 일본 여인이라야 6, 7등신쯤 될 거고 백제 여인도 그 언저리였을 텐데 <백제관음상>의 8등신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헬레니즘 영향이 아니었을까? 가령 간다라 미술은 헬레니즘 문명이 파키스탄까지 영향을 미친 사례다.

"하지만 파키스탄과 백제는 거리가 멀잖아요?"
"멀지. 그러나 문명 교류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실크로드가 있었잖아? 가령 신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리병은 그리스 유리병과 같거든."
"그러네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미술품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아빠의 이야기] 두 종류의 <나폴레옹 대관식>


딸이 관심을 보인 건 <퐁파두르 부인>과 <밀로의 비너스>였지만 내 눈길을 끈 그림은 높이 610cm, 폭 931cm의 거대한 <나폴레옹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이었다.

"대관식이 어디서 치러졌는지는 알고 있지?"

내가 묻자 딸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본 노트르담사원이잖아요?"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1807년작.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1807년작.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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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그림에 보면 가운데 무릎 꿇고 앉은 여인이 조제핀이고, 그녀에게 씌워주기 위해 관을 높이 든 남자가 나폴레옹이다. 오른쪽에 홀을 짚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이 교황 비오 7세다. 얼핏 보면 대관식을 축복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다시 보면 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지적에 딸은 "글쎄요. 아빠 느낌이 그러신 것 아녜요? 전 잘 모르겠어요" 하고 웃는다.

단지 느낌일까? 하지만 저 장면 바로 전 단계가 더 황당하다. 교황은 나폴레옹에게 씌워주기 위해 황금 월계관을 들고 있었는데, 자줏빛 대례복을 입은 나폴레옹이 달라 하더니 그 관을 높이 쳐들었다가 스스로 자기 머리에 썼다. 노트르담사원을 메운 축하객들이 웅성거렸다. 관례를 벗어난 행동이었던 것이다.그리곤 황당해하는 교황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신은 로마 교황이지만 나는 로마 황제요."


오스트리아와의 결전에서 승리한 그는 자신이 영토를 확장시킨 프랑스가 이제는 로마제국과 맞먹고, 이 같은 성과를 달성한 자신은 로마황제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화가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스스로 관을 쓰는 불경스러운 모습이 아닌, 관을 집어 조제핀에 씌워주고 황후로 임명하는 장면을 그려 나폴레옹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그림 상단에 앉아 있는 세 여자 중 가운데 여자가 나폴레옹 어머니다. 며느리 조제핀을 반대해 대관식엔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림을 그린 화가가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에서 일부러 집어넣었다. 그 말을 들은 딸이 말했다.

"고부간 갈등은 그때도 있었군요."

있었다. 나폴레옹 어머니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대관식 때의 아들 나이는 35세인데 며느리 나이는 41세였다. 거기다 며느리에겐 사별한 먼저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 또 낭비벽이 심해 빚을 많이 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어머니는 조제핀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조제핀은 이혼을 당한다. 애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하지만 실제론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재혼한 그는 루이즈에게서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그게 바로 나폴레옹 2세였다.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기 직전 나폴레옹은 아들을 황제로 임명했으나 보름 만에 루이 18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21세에 요절하고 만다. 손이 끊긴 것이다.

그에 반해 아이 못 낳는다고 쫓겨난 조제핀이 전 남편과 낳은 아들은 바이에른 왕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 그들이 낳은 후손이 현재의 그리스를 비롯한 벨기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왕이나 왕비의 선조가 되었다. 대반전이다. 인생의 앞날을 뉘 알겠는가?

그림을 보면 왼쪽에 다섯 여자가 나란히 서 있는데, 왼쪽에서부터 세 여자는 나폴레옹의 여동생들이고, 네 번째는 조제핀의 딸, 다섯 번째는 나폴레옹 형의 아내다. 그림을 그린 궁중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중에 이와 똑같은 그림을 하나 더 그렸다. 필시 밑그림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 세밀해서 마치 칼러 사진을 보는 것 같아요."
"그렇지? 저 그림에 많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작품 안에 슬쩍 집어넣었다는 거야."
"어디요?"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의 2층 왼쪽 구석 커튼이 쳐진 쪽에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남자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다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의 2층 왼쪽 구석 커튼이 쳐진 쪽에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남자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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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어머니가 앉아 있는 자리의 2층 왼쪽 구석에 보면 커튼이 드리운 곳에 스케치북을 들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그 남자가 바로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린 화가 자신이었다. 당초 대관식 그림을 화가 다비드에게 주문한 건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

"노트르담 대관식을 대형 그림으로 남겨라. 그래야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즉위한 날을 후세가 기억할 것 아니냐?"

나폴레옹 실각 후 벨기에로 망명한 화가 다비드가 그곳에서 그렸다는 나중 그림은 베르사유 궁전에 걸려 있다.

"베르사유궁은 파리 시내에 있는 게 아니죠?"
"서쪽 근교지. 그곳에 가볼 이유가 많지만 지금 여기 루브르궁에 걸린 그림과 베르사유궁에 걸린 그림에 차이점이 있어. 내일 그 점을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람 포인트가 될 거야."
"어떤 차이죠?"


왼쪽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 여자 가운데 두 번째 여자 곧 나폴레옹 여동생 중의 하나인 폴린의 옷 색깔이 다르다. 루브르박물관의 것은 옅은 청회색인데, 베르사유의 것은 옅은 핑크빛이다
▲ 베르사유 궁전에 걸려 있는 <나폴레옹 대관식> 왼쪽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 여자 가운데 두 번째 여자 곧 나폴레옹 여동생 중의 하나인 폴린의 옷 색깔이 다르다. 루브르박물관의 것은 옅은 청회색인데, 베르사유의 것은 옅은 핑크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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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그림인 것 같지만 왼쪽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 여자 가운데 두 번째 여자 곧 나폴레옹 여동생 중의 하나인 폴린의 옷 색깔이 다르다. 루브르박물관 것은 옅은 청회색인데, 베르사유 것은 옅은 핑크빛이다. 왜 폴린의 옷만 핑크빛으로 그렸을까? 이에 대해선 화가 다비드가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그림을 매개로 나폴레옹에게 접근하여 나중엔 예술을 총괄하는 장관에 임명되기도 하는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내일이 기대돼요. 파리 밖은 처음이니까."
"샌드위치라도 좀 싸가야겠지?"
"아뇨. 베르사유궁 안에 안젤리나라는 유명 식당이 있대요."


베르사유궁에서의 점심. 딸과의 얇은 공통 추억에 한 페이지가 보태질 것 같은 예감에 나도 은근히 내일이 기대되었다.


태그:#나폴레옹 대관식, #밀로의 비너스, #루브르박물관, #파리여행,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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