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아이' 배우 김여진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배우 김여진이 27일 오후 서울 사당동의 한 개봉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살아남은 아이' 배우 김여진 영화 <살아남은 아이>에서 김여진은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 미숙 역을 맡았다. ⓒ 이정민


작품 속 캐릭터로서 김여진은 네 번째로 겪는 상실감이었다. 오래 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2000)과 <아이들...>(2011), 그리고 연극 <리차드 3세>(2018)와 곧 개봉할 영화 <살아남은 아이>에서 그는 누군가에게 버림받거나, 자식을 잃은 부모가 되어 관객들에게 깊은 감정의 전달자로 섰다.

<살아남은 아이> 속 미숙(김여진)이 다른 캐릭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가늠할 수 없는 슬픔 안에서도 생동하고 있고 끊임없이 어떤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희생하면서 대신 살린 기현(성유빈)을 원망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마음을 여는 미숙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여러 화두를 각자 던지게 될 것이다. 김여진 스스로에게도 그랬다.

슬픔에 대한 두려움

첫 만남은 늘 그랬듯 제본된 한 권의 시나리오였다. "제목만 보고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며 김여진은 며칠 동안 읽기를 미뤘다.

"보통의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슬픔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슬픔을 겪는 것도, 보는 것도 싫은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라고 했을 때... 어른도 아닌 아이기도 했고, 산 아이가 있다면 못 살아남은 아이도 있을 것 같아 좀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 영화의 제목을 처음 접한 분들도 아마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막상 읽어봤을 때 마음을 툭 놓고 들어가니 슬플지언정 공감할 수 있더라.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불행에 대해 가졌던 제 태도도 반성하게 됐다. 감정의 이야기라서 제가 아닌 어떤 배우라도 읽었다면 욕심이 났을 거다. 감독님이 누군가를 아주 오래 관찰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직접 만난 감독님은 역시나 자신에 대해서도 주변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바라보는 분이었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관련 사진.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한 장면. ⓒ 아토


배우는 물었고 감독은 답했다. 영화계에서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는 신동석 감독은 본인이 겪은, 그리고 죽음과 애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밀도 높게 영화로 표현해냈다. 소재와 등장인물의 특성상 부산영화제에서 영화가 공개된 후 세월호 참사와의 관련된 질문이 나왔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김여진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우려가 있었다. 그의 걱정은 두 가지. '안 그래도 어려울 수 있는 영화인데 너무 독립영화 같지 않을까', 그리고 '슬픔이 그저 전시되고 끝나진 않을까'였다. 그 자리에서 감독은 분명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 무엇도) 대상화시키지 않겠습니다."

"더 좋은 제목이 있었다면 저도 제안했겠지만, 참여하고 보니 이 영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제목이더라. 보신 분들이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아픔을 겪은 사람, 그 주변과 개인에 대한 이야기였지. 아픔을 겪은 많은 이들 중 몇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전 작가나 연출자가 아니기에 미숙이 겪는 모든 감정에 집중하려 했다. 나머진 감독님의 몫이었지."

진실한 위로할 수 없다면... 

미숙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곧 '남겨진 어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부인 미숙과 성철(최무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현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거나 삼키고, 각자만의 시간표대로 그것을 승화시켜 나간다. 그 덕에 관객은 미숙과 성철, 기현에게 고르게 감정이입 할 여지가 크다. 이 중 미숙은 가장 본인의 감정과 마음의 소리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미숙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감정의 선을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경우 연기하기 편하다. 이해가 되니까. 사람들은 힘들지 않았는지 묻지만, 연기자 입장에선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질문하신 대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 (아이를 잃은) 엄마 역할이 이번이 세 번째다. 세 사람의 크기는 서로 비교할 순 없지만, 표현 방식은 다 달랐다. 다른 사람의 슬픔이라 생각하고 연기했다." 

'살아남은 아이' 배우 김여진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배우 김여진이 27일 오후 서울 사당동의 한 개봉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어른도 아닌 아이기도 했고, 산 아이가 있다면 못 살아남은 아이도 있을 것 같아 제목을 봤을 땐 좀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봤을 때 마음을 툭 놓고 들어가니 슬플지언정 공감할 수 있더라." ⓒ 이정민


앞서 지난 언론시사회에서 김여진은 <박하사탕> 때 역할로 한동안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만삭의 홍자(김여진) 캐릭터가 당시 그에게 큰 우울감을 남겼던 것. 18년 전 홍자였던 배우가 미숙이 되었고, 두 캐릭터가 배우 내면에서 뜻밖의 만남을 가지게 됐다.

"20대의 마지막에 찍은 영화였다. 그때는 제게 <박하사탕>이 너무나 큰 비극으로 다가왔다. 홍자가 너무 안 됐더라. 마지막 장면이 어릴 적 모습으로 끝나잖나. 그 소녀가 결국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남편도 잃잖나. 너무 슬퍼서 미치겠더라. 그 캐릭터에서 나오기가 많이 힘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박하사탕> 재개봉 때 영화를 다시 봤는데 다른 느낌이 들더라. <살아남은 아이>를 찍은 뒤였고, 40대가 됐잖나. 아이를 잃은 큰 슬픔을 연기한 뒤 생각해보니 홍자는 왠지 그 슬픔에서 걸어 나와서 자신의 삶을 살아냈을 것 같더라. 교회도 잘 다니고, 연애도 다시 할 것이고,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 같았다. 미숙도 비극을 겪었지만 살아남았듯이.

<박하사탕> 속 영호의 선택은 불행으로 끝났지만, 남은 사람들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생이 붙어있는 한 우린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서 재개봉 관객과의 대화에서 제가 그 얘길 했다. '살면서 죽을 만큼 힘든 순간이 올 때가 있는데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마치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고... 그 생각이 지금까지 강하다."


'살아남은 아이' 배우 김여진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배우 김여진이 27일 오후 서울 사당동의 한 개봉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생이 붙어있는 한 우린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서 재개봉 관객과의 대화에서 제가 그 얘길 했다. ‘살면서 죽을 만큼 힘든 순간이 올 때가 있는데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 이정민


진짜 어른의 삶은?

신동석 감독은 <살아남은 아이>를 두고 "진정한 애도를 묻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김여진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위로할 방법이 없을 땐 침묵해야 한다"며 "피해자에게 '툭'하고 뱉는 말을 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픔을 겪은 사람이 당장 어떻게 보이든 그가 어떤 강도로 슬퍼하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피해자답지 않은 모습이라며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우리 모두에게 하루하루 일상을 산다는 건 큰일이다. 어떤 슬픔을 겪을 수 있겠지만 늘 그 이후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영화 이후 스스로 견디는 힘이 강해진 면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쉽게 판단하거나 말을 보태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슬픔에서 나올 수 있을 때까지 세심하게 대하고 기다려야 한다."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우린 우리 사회 어딘가에 존재할 좋은 어른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약해 보이지만 결국 이겨낸 미숙과 성철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꼭 확인해 보길 권한다.

"누군가는 어떻게 미숙과 성철이 저리 관대하지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특히 미숙은 자신의 감정대로 왔다갔다 하는 인물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약 그 두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들 역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른이라고 감정을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누군가를 정말 용서할 수 없을 때 우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건 영화와는 상관없는 개인적 바람인데 사회가 아이들에게는 관대했으면 좋겠다. 어른과 똑같은 잣대로 대하질 않길... 아이가 아이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살아남은 아이' 배우 김여진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배우 김여진이 27일 오후 서울 사당동의 한 개봉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쉽게 판단하거나 말을 보태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슬픔에서 나올 수 있을 때까지 세심하게 대하고 기다려야 한다.” ⓒ 이정민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 

배우 개인의 간곡한 요청으로 물어보려 했던 몇 가지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알려진 대로 김여진은 지난 보수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자이기도 하다. 국정원은 차마 글로도 표현하기 민망한 사진을 합성해 배포 하기도 했다. 명백한 국가 폭력에 대해 영화 홍보를 위한 인터뷰 자리에서 답하는 게 지금의 영화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다만 기자로서 지금까지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나아가 한 사람으로서 떳떳하고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응원의 말만 전했다. 아래 이어질 말은 그 말에 대한 김여진의 화답이다.

"저의 큰 단점 중 하나가 일단 저지르고 본다는 것이다(웃음). 제 기질이다. 주변에선 '너 왜 그래? 괜찮아?' 말하기도 했는데 돌이켜봤을 때 (제 선택이) 대단하거나 큰 의미가 있던 게 아니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제가 여기 있잖나. 스스로 마음에 든다. 가족과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봤을 때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 잘 선택해 왔다. 주변 분들 생각처럼 겁먹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그때그때 선택할 것 같다. 물론 지금은 더 책임감이 크다. 균형을 잘 맞춰가며 해야지. 끊임없이 뭔가 저지르긴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배우가 최고다. 미숙이가 돼서 연기로 전하는 일이 제겐 최고다. 앞으로도 다양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잘 전달하고 싶다. 연기를 많이 하고 싶다는 얘기다(웃음)."




김여진 살아남은 아이 최무성 성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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