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스틸컷. 왼쪽부터 종수(유아인),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의 모습.

<버닝> 스틸컷. 왼쪽부터 종수(유아인),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의 모습. ⓒ CGV 아트하우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버닝>에서는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사회 계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극 중 종수(유아인 분)는 빈곤층이자 어머니가 집을 나간 상황이고, 20대 초반 청년으로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먹고 사는 '흙수저'이다. 반대로, 벤(스티브 연 분)은 부유층에 심지어 화목한 가정 출신이고, 20대 후반 청년으로 부유한 '금수저'이다.

이렇듯 각자의 평행선을 달리던, '너무 못 가진' 종수와 '너무 가진' 벤은 어느 날 갑자기 해미(전종서 분)라는 교집합으로 엮이게 되면서 서로의 계층 안을 엿보게 된다. 그런데 무료한 천국에서 살던 벤에게 종수의 파주 집은 특이하고 재미있는 짧은 체험으로 끝난 반면, 벤의 고급 빌라와 포르셰는 종수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만 줄 뿐이다. 거기에다, 자신의 '그레이트 헝거(존재의 의미를 찾는 이)'가 될 줄 알았던 해미가 벤의 포르셰를 타고 떠나버린 상실은 종수에게 상처가 된다. 결국, 해미의 사라짐은 종수가 어릴 적부터 쌓아온 분노를 터뜨리게 되는 '트리거'가 되고, 그 분노는 벤을 향한다.

사실, 종수는 성장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아온 인물이다. 전 재산을 투자한 양계장 사업에 실패한 후 무기력하고 폭력적이 된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현재도 자신의 실패와 좌절을 사회 탓으로 돌리며 공무원을 폭행하여 재판을 받는 중이다. 한편 종수가 7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16년 동안 연락 한번 없다가 사채 빚을 갚을 500만 원이 필요해 종수를 찾을 뿐이다. 또 집을 나간 아내에 분노해, 어린 종수를 시켜 어머니의 모든 옷을 태우게 한 아버지의 분노는 어린 종수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영화 <버닝>의 스틸컷.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나는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버닝>이 '여자를 죽여 비닐하우스에 넣고 태우는(버닝, burning)' 부자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스릴러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것은 이창동 감독이 관객에게 내준 정답 없는 수수께끼였을 뿐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모호한 매타포들 사이에서 정작 내가 마주한 것은, 온 힘을 다해 그 안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모든 분노를 게워내어 '버닝'해 버리고 나서는 알몸으로 벌벌 떠는 나약하고 상처받은 이 시대 청년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벤을 잔인하게 죽이고 포르셰에 집어넣고 불을 지르는 살인자일 때의 모습마저도 안쓰럽고 안타까울 정도였다.  

종수의 분노가 '익숙한' 이유

포르셰에 불을 지르는 종수의 분노가 나는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25년 전 '지존파' 조직원들이 부유층을 상대로 표출했던 분노가 떠올랐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지존파 사건'은 1993부터 1994년까지, 20대 초반의 불우한 가정 출신 사회빈곤층 청년 6명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함과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부유층에게 적개심을 드러낸 범죄 사건인데, 엽기적인 범죄 행각으로 당시 전국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 당시 지존파 조직원들은 자신들의 실패와 좌절을 사회 탓으로 돌리며 '부유층의 부조리'를 '단죄'하려 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부유층의 상징은 바로 '그랜저'였다. 실제로, 그랜저를 타던 부유층들이 범죄의 목표가 되었다.

25년 전의 그랜저가 영화 <버닝>에서는 포르셰로 바뀌기는 했지만, 종수도 사실은 자신의 불행을 벤의 탓으로 돌리고 '재수 없도록' 부유한 벤을 '단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종수는 실제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는 분노하지 못하면서도, 고작 흔하디 흔한 '분홍색 전자시계'가 마치 스모킹건이라도 되는 것 마냥 확신에 차서, 합리적의심이들지 않는 증거는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벤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으로 확신한 듯이 '단죄'(아마도 해미의 원룸에서 그가 쓰는 소설 안에서만)한다.

 영화 <버닝>의 스틸컷. 해미(전종서)는 남성 인물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될 뿐 아니라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감성적인 면이 있는, 이창동 감독 영화 속의 전형적인 여성상이다.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아트하우스


우리가 20대에 '버닝'한 것은?

종수를 지켜보면서 나의 20대를 기억해보았다. 나의그 시절도 역시나 모호했고 불안정했으며, 마치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시절이었다. 종수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도 성장기에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끊임없이 다른 이에게 나의 분노를 투사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해미처럼 그레이트 헝거(존재의 의미를 찾는 이)를 신봉하며 '나'를 찾으러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더랬다.

그 시절을 다 거치고, 30대 후반이 된 지금은 모호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더 이상 수수께끼에는 관심이 없다. 상처는 거의 아물었고 분노는 주로 수다로 풀며,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 존재의 의미는 찾은 것 같다.

20대를 지난 종수의 모습은 어떨까? 어쩌면 소설을 쓰다 영화감독이 된 이창동 감독처럼 영화감독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종수의 엄마처럼, 해미도 갑자기 종수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까?

 영화 <버닝>의 포스터

영화 <버닝>의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덧붙이는 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하였습니다.
버닝 이창동 감독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