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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대통령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지도부가 사퇴하자 민청련은 곧바로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총회 준비에 들어갔다. 민청련은 총회를 앞두고는 각 조직 단위에서 선출된 위원들로 총회준비위를 구성해 그동안의 활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지도부 선출안을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에도 그런 관례에 따라 총준위가 구성되고 활동에 들어갔다.

민청련 제10차 총회에서 선출된 지도부. 1.의장 김성환 2.부의장 김재승 3.부의장 남승호 4.사무국장 김두일
 민청련 제10차 총회에서 선출된 지도부. 1.의장 김성환 2.부의장 김재승 3.부의장 남승호 4.사무국장 김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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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갈 길은 지역지부 건설"

총준위에는 우선 지난 9차총회에서 신설된 지역조직인 북민청, 동민청, 남민청의 위원장인 김재승, 김성환, 남근우가 참여하고 조직에서 열성 활동가들을 추천하여 구성됐다. 따라서 총준위의 논의는 주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지역조직을 어떻게 하면 성장시켜 제자리를 잡게 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그에 반해 지난 대선 대의 방침인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아래 '김대중 비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었다. 이는 이미 당시 지도부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사퇴의 변'을 통해 과오를 인정하고 자숙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사실 거기에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대선 당시 민청련이 주장한 '김대중 비지'는 전술적 방침이었다. 전략적 지향은 민중운동의 성장과 그를 토대로 한 군사독재체제의 완전한 타도와 변혁에 있었다. 따라서 전략적 지향을 무시한 채 전술 방침에 대해 과도하게 책임론을 펴는 데 대한 거부감이 회원들 사이에 있었다.

아마도 더욱 중요한 요인은 당시 운동 세력의 판도였을 것이다. 김대중 비지, 후보 단일화, 독자후보의 세 갈래로 분열한 운동권의 판도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김대중 비지 측의 반성은 그것이 운동세력을 통일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분열시켰다는 것이 요지였다. 실제로 10차 총회에서 채택된 '메시지'에는 이런 내용이 그대로 담겼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후단이나 독후에도 분열의 책임이 있다'는 의식이 짙게 갈려 있었다. 이러한 상호에 대한 불신과 심지어 증오의 감정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상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준위는 이 문제를 붙잡고 논의를 계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총준위 논의의 실질적 핵심은 차기 지도부 구성이었다. 이번 총회가 지도부의 인책 사퇴로 인해 열리는 만큼 차기지도부를 선정하는 조건은 지난 대선에서의 '김대중에 대한 비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인물이어야 했다. 그 중 가장 적합한 인물은 김병곤이었으나 그는 구로구청 투표함 사건으로 투옥돼 있었으므로 제외됐다.   

다른 한편으로 9차 총회에서 좆기 방침으로 지역지부의 건설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 역할에 합당한 이들이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지역지부 사업은 70년대 후반 이후 세대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다.

민청련 10차총회 결의문은 ‘청년대중조직사업’에 매진할 것을 천명했다.
 민청련 10차총회 결의문은 ‘청년대중조직사업’에 매진할 것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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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의 세대교체

총준위의 차기지도부 논의에서는 우선 조직구성상으로 변화를 도모했다. 이전까지 지도부 체계는 의장단과 중앙집행위원회로 나뉘어 있었다. 이는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즉 의장단은 외부에 공개되어 민청련을 대표하는 활동을 하고, 중앙집행위원회는 내부 조직체계를 대표하는 대외 비공개 성원들이 의장단을 보좌하며 조직을 이끈다. 만약 전면적인 탄압이 와서 의장단이 구속될 경우 중앙집행위가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6월항쟁과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 측면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됐고 따라서 운동조직도 거기에 맞추어 변화를 주어야 했다.

그래서 의장단과 중앙집행위를 통합해 '중앙위원회'로 하기로 했다. 그 구성은 의장, 부의장, 각 지역위원장, 사무국장, 정책실장으로 한다. 총준위의 가장 중요한 일은 물론 중앙위 의장을 선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커다란 고민이나 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곧바로 김성환 동민청위원장으로 결정됐다.

김성환은 78학번으로 1983년 민청련 창립 당시 가장 연배가 어린 막내 세대로서 세대교체를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한 대선 시기에 비록 조직의 '비지'결정에 승복했지만, '열렬한 비지'의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9차 총회에서 지역지부 건설 사업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스스로 동민청을 조직해내는 일을 수행해냈다. 이는 대선 이후 민청련의 조직 방향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부의장은 북민청위원장을 맡았던 김재승과 남민청 활동가 남승호가 선출됐다. 님승호는 '비지'에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로서 그를 의장단에 선출한 것은 대선 당시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사무국장에는 김두일이 선임됐다.

3월 17일 총회를 열어 의장단을 선출하고 그 자리에서 장문의  '제10차 총회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지난 대선 시기의 '비지'에 대해 재차 반성하고 앞로는 그런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단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별도로 발표한 '결의문'은 제목이 "청년운동의 신시대를 창출하자"는 것으로 지역지부를 민청련의 주력 사업으로 삼아 각계각층의 청년대중을 회원으로 조직하자고 호소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총회가 끝난 뒤 곧바로 안양민청련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분열된 채로 맞은 13대 총선

민청련 출신으로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평민당에 입당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 (왼쪽부터)
 민청련 출신으로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평민당에 입당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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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이후 민청련의 활동은 4개의 지역지부에서 자기 지역에서 일어나는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 회원들을 조직해내는 데 맞춰졌다. 그러나 민청련 앞에는 지역 차원이 아닌 전국적 규모의 정치 일정이 다가왔다. 4월 26일 치러질 제13대 총선이었다.
이미 4년 전 12대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구름떼처럼 유세장으로 몰려들고 그것이 신민당 압승의 돌풍을 일으킨 것을 민청련 회원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바였다. 그리고 87년 대선에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됐으므로 시민들의 집권 민정당에 대한 거부와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의장단의 주요 임무는 다가올 총선에 대한 투쟁방침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선 투쟁방침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집권 민정당에 대항할 야당이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김종필이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의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것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라는 뚜렷한 지역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3당이었다.

운동 세력의 판도 또한 비지, 후단, 독후의 3색 그대로였다. 말로는 각자 반성을 표명했고, 단결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 역시 모두 품고 있었다. 결국 3 세력은 각자의 방식으로 총선에 임하게 된다.

제일 먼저 '비지' 세력이 움직였다. 2월 초, 대선 때 '비지'에 속했던 인물들인 박영숙, 문동환, 이길재, 이해찬 등이 주축이 돼 평민당 입당을 선언했다. 민청련 활동가 출신으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가 함께 했다. 그들의 입장은 대선 때 '비지'를 내세웠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이 김영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므로 운동 세력이 정치권에 진입하려면 당연히 김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청련 출신으로 당시 민통련 간부로 활동하던 이해찬은 오히려 지역성을 강조했다. 광주 항쟁에 대한 상처, 그리고 피해의식이 깊은 호남인들의 정치적 한을 제도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여 정치력으로 승화시킬 세력은 김대중의 평민당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김대중의 처지에서도 대선 패배의 비난과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터라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운동 세력으로부터의 '젊은 피'를 수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재야 '비지' 세력과 이익이 맞아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독후 세력은 3월 초에 '민중의 당'을 창당했다. 대선 당시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본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됐는데, 총재엔 서울대 출신의 젊은 노동운동가 정태윤이 선출됐다. 민청련 활동가로는 진영효가 여기에 참여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므로 더는 보수야당에게 의탁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민중 스스로 정치 세력화하여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후단'의 입장을 취했던 일군의 인사들 즉 재야정치인 예춘호 및 학생운동 출신 유인태, 제정구, 원혜영 등이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변화된 정세에서 운동권이 제도권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는 '민중의 당'과 시각이 같았지만, '민중의 직접 진출'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았다. 그들이 중요시한 것은 지역 색으로 갈라진 3개 지역당 구조의 폐해였다. 따라서 지역 색을 거부하는 참신한 운동권이 정계에 들어가 정치판을 쇄신해야 한다고 자임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한 민청련 출신 평민당 소속 이해찬과 민중의 당 소속 진영효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한 민청련 출신 평민당 소속 이해찬과 민중의 당 소속 진영효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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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승리! 민청련의 승리?

민청련 의장단이 보기에 13대 총선은 자칫 대선의 복사판이 될 판이었다. 여기서 또 다시 '비지' 즉, '평민당지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난 대선에 대한 반성을 뒤집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민청련은 13대 총선에서 '반민정당 투쟁'에 집중하여 유권자들이 민정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지는 유권자의 몫으로 돌렸다. 따라서 구호는 "외세와 군사독재의 하수인 민정당을 거부하고 애국민주인사를 국회로!"로 정했다. 민청련은 이 방침을 토대로 여러 단체들을 묶어서 '반민정당총선투쟁민주연합'을 결성해 공동투쟁에 나섰다.

민청련의 각 지역지부 회원들은 자기 지역구 유세장을 휘젓고 다니며 '총선투쟁'을 펼쳤다. 동민청의 경우를 보면, 4월 16일 장안국민학교에서 열린 성동을구 유세장에 수십 명의 회원이"성동주민 단결하여 민정당 독재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유세장이 쩌렁저렁하게 울리도록 구호를 외쳤다. 민정당 후보 유세 순서가 되면 일제히 뒤로 돌아 앉아 "부정부패 민정당 성동에서 몰아내자" "광주학살 구로만행 군부독재 타도하자" 구호를 외쳤다. 이에 대해 상당수 유권자들이 동조하여 유세장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결국 민정당이 동원한 용역강패들과 몸싸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러한 투쟁은 총선 기간 내내 각 지역지부에서 벌어졌다.

1988년 4월 14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민정당총선투쟁민주연합 제1차 국민대회에 참석한 민청련 집행부. 둘째줄 왼쪽부터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민청련 의장 김성환, 민청련 전부의장 권형택
 1988년 4월 14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민정당총선투쟁민주연합 제1차 국민대회에 참석한 민청련 집행부. 둘째줄 왼쪽부터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민청련 의장 김성환, 민청련 전부의장 권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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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치러진 13대 총선은 놀라운 결과를 냈다. 민정당은 과반인 150석에 훨씬 못 미치는 125석을 얻어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헌정사상 최초의 대이변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된 것이었다. 민청련 출신의 이해찬, 광주 항쟁의 상징 인물 정상용, '꼬방동네 사람들'의 작가로 빈민운동가인 이철용, 저항시'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 등이 평민당의 깃발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렇다면 13대 총선은 누구의 승리인가. 김대중의 승리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온 몸을 던져 반민정당 투쟁을 전개했던 민청련의 승리이기도 한가? 민청련은 흔쾌하게 '그렇다'고 자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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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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