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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사범학교 항일 학생 의거 순절동지 추모비'(1973년 11월 3일 건립)
 '대구사범학교 항일 학생 의거 순절동지 추모비'(1973년 11월 3일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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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대구사범학교는 1929년에 개교했다. 이 학교 학생들은 개교 초기부터 짙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방의 그날까지 끝없는 항일 투쟁>의 필자 김종규는 '(이 학교 학생들은) 역사와 조선어 강의를 담당했던 김영기 교사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던 현준혁 교사의 영향으로 항일 조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라고 평가한다.

개교 초기부터 항일 운동을 시작한 대구사범 학생들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학생들은 1기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서 모임인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 1929년부터 1934년까지 활동했다. 하지만 단순한 독서회가 아니었다. 비밀 결사였다. 당시 대구사범학교 항일 투쟁에 동참했던 문덕길 지사는 '다혁당의 조직과 활동'이라는 글을 통해 '민족 해방과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표로 단체를 세웠고,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준비하려고 계획하였다'면서 사회과학연구회는 '대구사범 심상과 민족운동의 시초로서 그 이후의 다혁당과 조선어연구회로 끝맺는 큰 뿌리'였다고 회고했다.

사회과학연구회의 조직과 활동 이외에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항일 운동에 열성을 다했다. 개교 이듬해인 1930년 3월 31일에는 항일 비밀 결사 '주먹대'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32년 1월 26일에는 현준혁 교사가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한 일이 드러나 37명이 검거되었다.

 1939년 7월 26일 밤, 철도 보수 공사에 동원되어 왜관국민학교에 머물고 있던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5학년(졸업반) 학생들은 민족차별 등 평소 가장 악질적 행태를 보여온 일본인 교사 3명을 골라 낙동강 물가 모래사장에서 집단 폭행했다. 한 명은 도망갔고, 두 명은 모기장에 덮어씌워진 채 무참하게 얻어맞았다. 이 '왜관 학생 항일 의거'로 고승석, 김재수, 김중정, 김희원, 박영섭, 정기현, 정인용 등 7명이 퇴학당하고 11명이 정학 처분을 받았다. 1984년 11월 5일 당시 심상과 학생들이 모여 왜관초등학교 교정에 '왜관 학생 사건 기념비'를 세웠다.
 1939년 7월 26일 밤, 철도 보수 공사에 동원되어 왜관국민학교에 머물고 있던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5학년(졸업반) 학생들은 민족차별 등 평소 가장 악질적 행태를 보여온 일본인 교사 3명을 골라 낙동강 물가 모래사장에서 집단 폭행했다. 한 명은 도망갔고, 두 명은 모기장에 덮어씌워진 채 무참하게 얻어맞았다. 이 '왜관 학생 항일 의거'로 고승석, 김재수, 김중정, 김희원, 박영섭, 정기현, 정인용 등 7명이 퇴학당하고 11명이 정학 처분을 받았다. 1984년 11월 5일 당시 심상과 학생들이 모여 왜관초등학교 교정에 '왜관 학생 사건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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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에는 왜관 철도 보수 공사에 200여 명 동원되었던 심상과 4∼5학년 학생들이 의거를 일으켰다. 이때 연습과 학생 200여 명도 함께 출동했다. 연습과는 중학교 5학년 졸업 후 입학하는 1종 훈도(교사) 양성 제도로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덕길은 '거기에 입학하는 학생은 대학 진학이나 취업에 낙오한 자들로서 학력이나 지능이 낮은 학생들이었다'라고 증언한다.

7월 26일 밤에 의거가 일어났다. 며칠 전 양국  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빚어졌을 때 일본인 교유(교사)들이 불공평하게 처리한 적이 있었다. 심상과 5학년(7기생)들은 일본인 교유들 중 가장 악질적인 세 사람을 힘으로 규탄할 것을 결의했다.

- 왜관 학생 항일 의거 기념비
1984년 11월 5일 당시 심상과 학생이었던 고령의 졸업생들이 모여 왜관 초등학교 교정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에는 '이 자리는 1939년 7월 당시 대구사범 심상과 5학년들이 의거를 일으킨 이른바 왜관 학생 항일 의거 현장이다. 일본의 혹독한 억눌림에 시달리고 있던 때인지라 광주 학생 시간의 10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되새기면서 일치단결하여 그들에게 우리 민족의 분노를 터뜨린 지 이제 45년이 지나갔다. 돌이켜 보니 그때의 감개가 새로워져 여기 자그마한 돌이나마 하나 세워 기념하는 뜻을 나타내어 본다. 1984년 11월 5일 대구사범 심상과 7기생이 세우고 후배 동애 소호영은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밤에 일본인 교사 둘을 집단 폭행

학생들은 밤 10시 30분쯤 강본(岡本) 교유와 좌구간(佐久間) 교유를 모기장으로 덮어씌워놓고 집단 구타했다.

구타 대상으로 지목했던 셋 중 전원(前園) 교유는 도망을 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이 일로 조선인 학생 고승석, 김재수, 김중정, 김희원, 박영섭, 정기현, 정인용 7명이 퇴학당하고, 그 외에 11명이 정학 처분을 받았다. 나머지 학생들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일제는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쉬쉬'하였다. 그 결과 대구사범학교 학생들 중에도 모르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1∼3학년이 4∼5학년에 이어 같은 왜관국민학교(초등학교) 근로 봉사대로 차출되어 오면서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됐다.

학생들 사이에 민족적 의분이 고조되었다. 8월 16일 밤, 권쾌복, 배학보(대구 신암선열공원 안장), 최태석(대구 신암선열공원 안장), 김성권, 조강제, 최영백, 문덕길 등 20여 명이 왜관국민학교 앞 낙동강 백사장에 모였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들에게 집단 폭행을 가했던 왜관초등학교 앞 낙동강 물가. 멀리 왜관철교가 보이는 이곳 낙동강 일대는 1939년 7월 26일 당시 넓은 백사장이었지만 지금은 인위적으로 둑을 쌓고 흙으로 메운 탓에 하얀 모래는 찾아볼 길 없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들에게 집단 폭행을 가했던 왜관초등학교 앞 낙동강 물가. 멀리 왜관철교가 보이는 이곳 낙동강 일대는 1939년 7월 26일 당시 넓은 백사장이었지만 지금은 인위적으로 둑을 쌓고 흙으로 메운 탓에 하얀 모래는 찾아볼 길 없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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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7기 선배들의 일본인 악질 교사 구타와 그 후 퇴학 등 처분을 받은 일의 진상을 알아볼 것과, 향후 대책 강구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9기(3학년) 학생들은 '백의단(白衣團)'이라는 이름의 비밀 결사체를 조직했다. 이들은 '비밀을 엄수한다. 명령에 복종한다. 자기 책임을 끝까지 완수한다. 친목과 단결을 도모한다.' 등 백의단의 강령을 채택하고 다음날 새벽 4시쯤 해산했다.

백의단은 1년 6개월 동안 활동을 이어오다가 '다혁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다혁당 출범에는 이미 결성되어 활동해온 '문예부'와 '연구회'가 큰 힘이 되었다. 문예부는 이전부터 우리나라 역사와 문학 작품 등을 윤독하는 모임을 유지해오던 학생들이 결성했다. 1940년 11월 23일 봉산정 127번지 이태길의 하숙방에 모인 5학년 박효준, 이태길, 박찬웅, 강두안, 4학년 류흥수, 이동우, 문홍의, 3학년 김근배 등 8명이 창립 총회를 가졌다. 이후 4학년 박호준, 이주호, 조강제도 가입했다.

다혁당의 뿌리가 된 문예부와 연구회

대전지방법원 1943년 2월 8일 '예심 종결서' (일부)


피고인 박효준은 대구사범학교 재학시 8명과 모임을 갖고 각기 마음속에 품고 있던 포부를 토로한 다음, 모인 동지들에게 '표면에는 조선 문예 연구를 표방하고 이면으로는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을 양성하고 단결하여 민족 독립 운동을 펼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조선이 일본 제국의 기반에서 이탈하여 독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였고, 참석자 일동이 이에 동의한 후 여러 가지를 협의하였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라고 모임의 이름을 정하고 발족을 한 후 자신이 책임자가 되겠음을 선언하였다. 그 운동 방침으로는 (1)부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2)부원은 매주 토요일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참석하여 각기 이것을 감상 비판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기관지 <학생>까지 발간하며 활동하던 문예부는 1941년 2월 중순 5학년(8기생)의 졸업을 앞두고 향후 활동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졸업생들은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는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아동과 학부모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활동 상황을 매월 1회 박효준 동지에게 보고하며, 각자의 작품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9기생들은 조직을 계승,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 무렵 8기생 사이에는 문예부보다 두 달 뒤인 1941년 1월 23일 동인동 소재 이무영의 하숙집에 모인 임병찬, 장세파, 안진강, 김영복, 최낙철, 윤덕섭, 이태길, 강두안 등 9명이 창립하고, 며칠 뒤 오용수, 이원호, 윤영석, 박제민, 양명복 등이 가입한 '연구회'도 활동하고 있었다(이태길과 강두안은 이때 문예부에도 가입해 있었다).

연구회는 동인동 251번지 박제민의 하숙방이나 대구 근교 솔밭에 모여 여섯 차례 발표회도 가졌지만 이내 졸업을 맞았다. 회원들은 경북 의성 안평 국민학교(장세파), 충북 황간 남성 국민학교(오용수), 강원도 영월금 국민학교(이태길), 함경북도 나진 약초 국민학교(최낙철) 등에 배치 받아 학부모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 함양에 몰두하다가 그해 7∼8월에 모두 구속되었다.

후배들에게 교내 활동의 계승을 부탁하다

졸업을 앞둔 연구회 회원들은 학교를 떠나기 이전 후배인 9기생 류흥수(문예부 회원)에게 연구회의 계승을 부탁했다. 류흥수는 1941년 2월 10일 같은 학년 문예부 회원들인 이동우와 박호준의 남산정 681-12번지 하숙방에서 문홍의, 이주호, 조강제 등과 모여 이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1941년 2월 15일 오후 7시쯤 류흥수와 이주호의 봉산정 242번지 하숙방에 류흥수, 이주호, 권쾌복, 배학보, 최영백, 김효식, 김성권, 이도혁, 문홍의, 최태석, 이종악, 서진구, 문덕길, 이홍빈, 박호준 등이 모였다. 대부분 백의단과 문예부의 회원이었던 이들은 이날 백의단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문예부의 활동을 이어받는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다혁당이라는 이름은 이홍빈이 제안했는데 '茶'는 영웅은 다색(茶色)을 좋아한다, '革'은 혁명(革命)을 일으킨다는 뜻을 담았다. 당수와 부당수는 백의단의 당수 권쾌복과 부당수 배학보가 그대로 유임했다.

 국립묘지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있는 '백의단' 부단장 배학보 지사의 묘소
 국립묘지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있는 '백의단' 부단장 배학보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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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혁당은 독서 모임을 내부 활동으로 전개했다. 이는 백의단 때부터 해오던 일로 문예부장 이동우가 실무를 맡아 이끌었다. 그들은 회비를 모아 우리글로 된 역사 문화 서적을 구입하여 읽었다. 그때 읽은 책과 회원들이 쓴 감상문 등은 봉산정 108-1번지 배학보의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뒷날 대전 검찰청에 모두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배학보의 집에 보관했던 활동 자료들, 압수돼 소각

다혁당은 공휴일과 일요일에 앞산 정상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방학이면 고향으로 돌아가 야학을 열었다. 일제는 1939년부터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야학을 금지했다. 다혁당은 일본인이 다니는 대구중학 학생들이나 대구사범학교 연습과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을 괴롭히면 '구타를 가하고' '교내 박물 교실 뒤편 플라타너스 숲으로 불러 철퇴를 가하며 꼼짝 못하게 하였다.(문덕길의 증언)'

 대구사범학교 비밀 결사 다혁당은 공휴일과 일요일이면 앞산 정상에 올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사진은 정상으로 가는 길목의 눈 내린 날 안일사 풍경이다.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대구의 청년 지사들은 1915년 2월 28일 이곳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 국권회복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서약했다.
 대구사범학교 비밀 결사 다혁당은 공휴일과 일요일이면 앞산 정상에 올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사진은 정상으로 가는 길목의 눈 내린 날 안일사 풍경이다.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대구의 청년 지사들은 1915년 2월 28일 이곳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 국권회복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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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전국 각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대구사범학교 8기 다혁당 당원들이 일제히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다혁당이 발간하던 기관지 <반딧불>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면서 활동 전모와 조직이 드러난 때문이었다.

교사들만이 아니라 재학 중이던 5학년 9기, 4학년 10기 당원들도 체포되기 시작했다. 이때 일제는 김영기 교사도 구속했고, 해외에 유학 중이던 당원까지 잡아왔다. 일제 경찰은 다혁당 당원 교사들과 친하게 지냈던 학부모들도 주목하여 전국적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속했다.

체포된 다혁당 당원들은 충청남도 경찰국 고등계에서 조사를 받았고, 1941년 12월 7∼8일 김영기 교사를 포함해 35인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됐다. 지사들이 충청도로 잡혀가 조사를 받고 대전 형무소에 투옥된 것은 기관지 <반딧불>이 처음 일제 경찰에 들어간 곳이 충청남도 홍성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대구 아닌 대전 형무소에 갇힌 까닭

  반딧불의 표지
 반딧불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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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은 5∼8년의 실형을 구형받았고, 최종적으로 2년6개월∼5년을 언도받았다. 그 중 서진구, 박제민, 강두안, 박찬웅, 장세파 다섯 당원은 끝내 옥사하였고, 12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이후 순국하였다. 다섯 분 옥사자 외  29명의 당원 명단은, 앞에서 모두 거명된 분들이지만 다시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5∼7년 언도 : 박효준(문예부 책임자)
5년 언도 : 류흥수, 문홍의, 이동우, 임병찬
3년 6개월 언도 : 권쾌복
3년 언도 : 김근배, 박호준
2년 6개월 언도 : 김성권, 김영복, 김효식, 문덕길, 배학보, 안진강, 양명복, 오용수, 윤덕섭, 윤영석, 이도혁, 이무영, 이원호, 이종악, 이주호, 이태길, 이홍빈, 조강제, 최낙철, 최영백, 최태석  

당시 문예부 회원과 다혁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이주호는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가 1993년에 펴낸 <대구사범 학생 독립운동>에 게재한 '3개 결사의 상호 관계와 그 학생 독립운동사적 의의'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이 운동의 한국 학생 항일운동사적 의의'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이주호의 정리를 통해 대구사범학교 학생 항일 의거의 의의를 짚어본다.

 위의 사진은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가 펴낸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에 실려 있는 것을 재촬영한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이도혁, 박호준, 최영백, 이동우, 이주호, 배학보, 고인옥, 앞줄 왼쪽부터 김효식, 김성권, 문덕길, 문홍의, 이홍빈. 1946년 2월 1일 사진으로, 다혁당 활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던 대구사범학교 9기생들의 면면이다.
 위의 사진은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가 펴낸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에 실려 있는 것을 재촬영한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이도혁, 박호준, 최영백, 이동우, 이주호, 배학보, 고인옥, 앞줄 왼쪽부터 김효식, 김성권, 문덕길, 문홍의, 이홍빈. 1946년 2월 1일 사진으로, 다혁당 활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던 대구사범학교 9기생들의 면면이다.
ⓒ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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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뿌리 깊은 전통 속에서 양성된 전통성과 맥락을 이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학생 운동이다. '권(주먹)대 사건', '사회과학연구회'의 민족혼을 이어받아 기별마다 독서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7기생의 왜관 봉기가 기폭제가 되어 8, 9, 10, 11기생의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조선어연구회의 결사로 그 전통을 맥맥히 이었다. -전통성을 지닌 학생운동-

둘째, 우연적, 일시적, 돌발적인 일과성을 띤 저항 운동과는 달리 의도적이며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민족운동이었다. -조직성과 체계성을 갖춘 학생 운동-

셋째, 독립운동가인 김영기 선생의 지도 원칙 아래 사제일체감으로 이루어진 학생운동인 만큼 치밀한 계획과 활력성을 띠었다. '사제일체가 되어 일으킨 사제동행의 학생운동-

넷째, 재학생으로서의 학생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재학생의 학생운동과 발맞추어 졸업생으로서의 사회 ‧ 민중운동으로 폭넓게 병행한 운동으로 확산해 나갔다. -학생운동과 사회 ‧ 민중운동을 병행한 2인3각식의 2원적인 학생운동-

다섯째, 교육문화 활동을 통한 계몽운동으로 민족의식 고취를 효율적으로 폭넓게 확산할 수 있었다. -문화적 ‧ 교화적 계몽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

여섯째, 형사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2년 4개월이란 장기 예심 독방에서, 장독과 영양실조로 35명 중 5명의 옥사자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2년 6개월∼5년 실형 복역, 빈사 상태로 출옥한 후에도 독립의 굳은 신념 아래 끝까지 그 지조를 굽히지 않아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에 의해 가택 구금, 군수 공장 등에서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한 사람의 전향자도 없었다. -지속적이며 일관된 학생운동-'

 
국립묘지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모셔진 최태석 지사의 묘소
 국립묘지 '대구 신암선열공원'에 모셔진 최태석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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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학교 건물은 대구 중심부를 관통하는 달구벌대로 도로변에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다른 학교 건물들, 즉 계성학교와 대구상업학교 교사들이 도로변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 달리 이 학교 건물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시민들의 눈에 곧바로 들어온다. 그만큼 접근성이 뛰어나다.

따라서 대구사범학교 건물은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눈여겨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순절한 동지들을 기려 1973년 11월 3일에 세워진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 동지비'도 도로와 건물 사이에 있어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기념비의 위치를 아주 잘 선정한 '생존' 지사들의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이곳 기념비를 보고나면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의 항일 의거를 말해주는 '태극단' 유허를 찾아갈 차례이다. 대구사범학교 뒤편, 엄청난 고층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제는 본관밖에 남아 있지 않은 대구상업학교의 건물은 현재 대구문화재단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동지회가 펴낸 《대구사범 학생 독립운동》(19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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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 <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도 10회 이상 열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