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틈 없이 일하는 5년차 배우가 매 작품마다 새로운 얼굴과 캐릭터를 보여준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류준열은 영화 <독전> 속에서 선과 악이 모호한 캐릭터 '락'을 연기해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긴다. 락에게서 류준열이 연기했던 그 어떤 역할도 찾아보기 어렵다. 류준열은 이런 평가에 대해 "친구들이 내 얼굴을 보고 김밥천국이라 한다. 메뉴가 다양하다는 뜻인 것 같다"며 티없이 밝게 웃었다.

<독전>을 통해 류준열을 만난 관객들은 <응답하라 1988>(2016) 속 '정환'이나 <택시운전사> 속 '재식'이 아닌 류준열의 또 다른 매력과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8일 서울 삼청동 인근에서 배우 류준열을 만났다.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버려진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 NEW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버려진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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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 똑바로 못 쳐다보겠다"

- <독전>이 개봉하고 나서 류준열의 눈빛이나 표정에도 관심이 쏠렸다. 관객들에게도 잘 어울리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나는 늘 내 영화를 볼 때 내가 나오는 게 부끄럽고 창피해서 똑바로 못 쳐다보겠다.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이해영 감독님이 어떻게 봤냐고 묻길래 '그럭저럭 봤다'고 했더니 서운해 하시더라. (웃음) <독전>은 범죄 오락액션 스릴러고, 감독의 연출 안에서 관객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몰입한다는 게 좋았다."

- 특별히 <독전>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늘 영화를 선택할 때 시나리오를 첫 번째로 둔다. '이런 영화가 개봉한다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선택한다. 사실 연기하는 동안 애드리브를 한다든가 대사의 어미 등을 바꾸는 일을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독전>은 대사를 바꾼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소위 '대사발'이 좋은 건 물론이고 돌이켜 보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들이 많았던 것 같다."

- '락'이라는 캐릭터가 <독전>의 원작인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 속 캐릭터와는 다르다는데.
"아마 원작은 감독님만 보셨을 거다. 전작인 <리틀 포레스트>도 그렇고 <마약 전쟁>도 그렇고 원작을 다들 재밌게 보셨다고 하셔서 영화 촬영을 마치고 볼 생각이 있었는데 쉽게 손이 안 가더라. 아직 보지 못했다."

- <독전>의 락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대사도 많이 없고, 인물을 표현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 같다.
"고민이 많았다. 내가 그간 했던 작품들이 대사가 많고 감정 표현도 솔직한 편이어서, 락을 연기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좀 있었다. <응답하라 1988>의 '정환'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시긴 했는데 내겐 다른 느낌이었다. (정환이는) 뒤에서는 다 보여주지 않나. 락은 아니었고."

- '락'은 선과 악의 얼굴을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인데, 이를 잘 표현했다고 보나?
"주변에서 '네 얼굴은 김밥천국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 메뉴가 많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웃음) 실제로 일본에 가면 '일본 사람 같다'하고 중국 가면 '중국 사람 같다'고 그러더라. 적응을 빨리 하고 잘 묻어가는 편이기도 하다. 락은 전사(前史)가 전혀 없는 인물이고, 그 상태에서 배우가 배역을 분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난 누구인가'로 질문을 던지면서 영화를 시작하고 끝냈다. 락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평생 숙제처럼 남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부모도 잘 모르는 한 인간이 이 세상에 그냥 뚝 떨어진 케이스. 그러던 중에 원호(조진웅 분)을 만난 거고, 원호도 락처럼 전사가 없는 캐릭터다. 확실한 건, 원호는 이선생을 수년간 미친듯이 쫓고 있는 형사란 거다. 원호랑 만나면서 락은 원호가 자신의 자아를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 것 같다. 나는 락과 원호가 서로 마음과 애정을 나누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만났을 땐 첫사랑을 만나는 느낌 같은? (웃음) 물론 감독님께서 그렇게 찍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로운 현장... 연기하는데 도움되지 않았을까"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버려진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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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버려진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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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리오를 받고 나면 어떤 절차로 캐릭터 해석을 하는 편인가?
"(내가 연기해야 하는) 인물과 만났을 때, 나와 가장 닮은 부분을 찾고 이를 확장하려 한다. 부모님 앞에서든 친구들 앞에서든 사람에게는 여러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락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참 재밌었다. 난 개인적으로 외로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혼자 이것저것 잘 하는 편이다. 쉬는 날에 누굴 꼭 만나야 한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고, 혼자서도 '오늘 재밌는 거 해야지'하면서 논다. (웃음) 그런데 <독전>을 촬영하면서 외롭고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를 하면서 감정적으로 동화가 됐다고 해야 할까?  솔직해지려 애쓰고, 외로움을 많이 탔다. 물론 현장은 즐겁게 돌아갔지만, 그 농담과 웃음들 사이에서도 씁쓸하거나 허전함을 느꼈다. 그런 감정이 오히려 락을 연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새로운 재미였다."

- 결말이 마음에 들었나.
"나는 감독님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 감독님에게 의지를 많이 한다.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감독의 예술이고 감독의 의견이 많이 들어간다. 결말도 결말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 <독전> 스틸 사진

영화 <독전> 스틸 사진 ⓒ 뉴


- '비주얼버스터'라는 이름답게 <독전>의 촬영 장소들이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노르웨이도 그렇고, 염전이나 용산역도.
"사실 시나리오 속에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노르웨이)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당시 촬영 여건상 동남아시아에서 여름 배경으로 찍을 수 있겠다는 말을 들었고 극구 반대했다. 얼어붙은 차가운 날씨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서 나누는 감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두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났으면 전혀 다른 느낌이지 않았을까! (웃음) 날씨가 중요하다. 비용이 좀 더 들더라도 설원에서 찍은 게 좋은 선택이지 않았나?"

- 반대로 염전신에서는 더워서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염전을 처음 가봤는데 아름답지만 고된 곳이다. 태양의 열기로 물을 말려 소금을 만드는 곳이라 일하시는 분들도 낮에는 물이 마르길 기다리고 새벽녘에 일을 하시더라. 밤에는 시원한 편이었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 이해영 감독이 류준열의 피부 표현에도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의상도 그렇고 피부도 그렇고 감독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양복 기장이나 넥타이 종류, 설원에서 입은 조끼도 적당한 타협이 없으셨다. 그래서 영상도 재밌게 나온 것 같다. 축구를 좋아하는 탓에 얼굴이 흰 편은 아닌데, 이 작품을 찍으면서 축구도 못 했다. 당시 <독전>과 <리틀 포레스트>를 같이 찍을 때였는데 농촌에서 사과 따고 오면 얼굴이 타니까 감독님이 전화로 '얼굴 얼마나 탔는지 사진 찍어 보내라'고 하시기도 했다. 락이 가무잡잡한 얼굴을 한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라! 락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고 밖에서 하는 취미생활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뱀파이어 같아 보이기도 하고."

- 류준열의 수화 연기도 <독전>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청각장애인 남매로 나왔던) 동영씨와 주영씨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특히 주영씨가 찍었던 <몸값>이라는 단편 영화를 보고 '좋은 배우다' 싶었는데 <독전>에서 만나 좋았다. 또 수화 선생님도 굉장히 열정적으로 수화를 알려주셨다. 사실 수어라는 게 표정을 많이 보여줘야 의사소통이 원활하다고 한다. 청각장애인들도 가면을 쓰고 수화를 하면 같은 말도 엉뚱한 뜻이 될 수 있다더라. 그런데 락은 표정을 많이 사용할 수 없는 인물이라 여기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셨다. (류준열은 취재진 앞에서 간단한 수화 시범을 보였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문장을 그대로 수화로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좀 더 간단하게 말할 때가 많다. 영화에서는 수화를 모르는 사람도 그 맛을 느낄 수 있게 조금 더 과장해서 표현했다."

"난 운 좋은 배우... 제일 좋은 운은 '인복'"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버려진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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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버려진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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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 새 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운이 좋아서다. 지치지 않느냐는 질문도 받곤 하는데, 사실 배우들도 똑같이 쉰다. 물론 직장인들처럼 빨간날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지만 작품 사이에 쉬면서 충전할 수도 있고, 또 작품을 하면서도 즐겁고 얻는 게 많아 계속 해야할 이유가 생긴다. 사실 영화 찍는 게 무슨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고 커다란 명예도 아니다. 그냥 찍으니까 찍는 것일 수도 있다. 배우 선배들이랑 관계자 분들이랑 밥을 먹는 자리에서 '오늘 촬영 어땠고,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한다'라든지 '영화 끝나면 재밌는 거 같이 하자'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그 대화가 너무 좋더라. 영화 찍는 거 사실 별 거 없고 좋은 사람들 만나서 찍고, 잘 안 돼도 재밌는 거 찍으면서 좋은 추억 만들고! 그런 맛에 영화를 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 배우 조진웅이랑은 현장에서 어땠나.
"처음에는 나 혼자 벽을 쌓고 선배님들을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 했던 것 같다. 작품을 하나둘씩 하면서 벽을 허물어갔다. 특히 조진웅 선배님 같은 경우는 선배임에도 후배인 내가 질문이나 제안을 하면 쿨하고 따뜻하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의견을 내주시고 공유해주셨다. 짜릿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나' 싶은 말도 너그럽고 여유있게 이해해주시고 답을 주셔서 감사했다. '나도 이런 선배가 돼야 겠다'는 걸 느꼈다."

- (조진웅이) 연기적인 칭찬을 하기도 했나.
"'네 감정 잘 받았어. 나도 줄게' 눈으로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좋았고, 실제로 '이런 감정이 왔다'고 답해주실 때도 다행이었다. 그런 순간은 오래 간다. <택시운전사>를 찍으면서도 송강호 선배님이 내가 하는 연기를 보시더니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이렇게 가야 할 것 같아'라고 말씀하신 날은 참... 잠 못 자는 날이다! 물론 툭 던지신 말이겠지만, 너무 좋다."

- <응답하라 1988> 이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내가 잘해서라기 보다는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그 중 가장 좋은 운은 '인복'이 아닐까 싶다. 재능은 별로 없다고 보는데,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응답하라 1988> 신원호 감독님도 그렇고,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인 기자님들도 응원을 많이 해주셔서, <독전> 언론 시사회가 끝나고 잠도 편하게 잘 잤다."

- 기자간담회에서 "배우를 계속할 것"이라고 당연한듯 이야기했던 게 인상 깊었다.
"사실 많은 고민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 거창한 목표도 없고 다음 역할로 어떤 걸 해내야 하고 그런 것도 없다. 그냥 계속 배우를 할 건데, 크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즐겁게 하자는 생각이 든다. 배우 선배님들이랑 대화를 하다가도 10~20년 전 일을 그대로 기억해 이야기를 하신다. 나도 언젠가 저 틈바구니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다 보면 배우를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독전>에서 마약 조직의 버려진 조직원 '락' 역할을 맡은 배우 류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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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준열 독전 조진웅 마약전쟁 응답하라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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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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