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혹은 일본 영화를 즐겨보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언급하는 게 있다. 일본 작품 특유의 '오글거림'이 좋다 혹은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언급하는 '오글거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보기 힘들 정도로 감수성이 넘쳐 감정 이입이 힘든 상황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정확하게는 '일본의 감수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해보도록 하자.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영화 <너의 이름은>의 포스터

영화 <너의 이름은>의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사전적인 정의에서 감수성이란 '외부 자극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정도'를 뜻한다. 쉽게 말해 민감도다. 신체가 민감하지 않으면 병원균이 들어온지도 모른 채 죽어가게 되고, 공감능력이 민감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감수성은 대응 능력과 별개라는 점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응 능력이 좋다고 해서 감지 능력이 좋은 건 아니다.

아마, 우리가 익히 아는 감수성의 의미란 감지 능력일 테다. 분위기를 보아, 안 좋은 일이 있었으니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쯤의 생각일 테다. 이런 부분에서 감수성은 공감능력 혹은 눈치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의 감수성'이란 말은 '일본의 공감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듯, 사람들이 일본의 감수성을 언급할 때 '작품의 감정선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 재밌다'고 말하곤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특유의 '감정선'이 작품으로 진입을 막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감정선이 '분리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이기에 우리가 일본의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해'라는 단어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서로를 알기 위해 배려와 양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감수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일본의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흔히 매체에서 묘사되는 '일본의 감수성'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광범위하여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 두 가지를 지적한다. 속 시원하게 말하면 될 걸 에둘러 말한다든가, 아무런 말도 없이 이미 상대방의 감정을 다 알고 있다든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작중 인물의 행동이 무척 '과잉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데 과잉된 감정은 과잉된 만큼의 반발감을 유발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과잉된 만큼 그 속에 알맹이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고, 둘은 인물 사이에서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는 탓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자신만 모른다는 점에서 관객은 작품에 흥미를 잃게 된다. 특정 집단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관객은 비로소 특정 집단의 '내부인'이 될 수 있다.

일본 매체의 과잉된 감정을 이해하는 단초가 바로 '내부인'이다. 일본은 예로부터 섬 지역이었다. 섬 특성상 외부와 단절되었기에 잘못을 저질러 무리에서 배척받은 사람이 도망갈 곳은 없다. 그래서 크든 작든 타인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집단 외부로 도주하지 못하고 그 내부를 떠돌아야만 한다. 이때 섬 자체가 감옥처럼 기능하므로 언젠간 추격 집단에게 잡힐 수밖에 없다. 결국 애초에 갈등을 빚지 않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다.

현대 일본 사회의 감수성은 이런 부분에서 귀인한다고 볼 수 있다. 속칭 '메이와쿠'라고 불리는 예절 문화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맙시다'라는 메이와쿠의 표어는 국가적 차원에서 예절을 장려할 만큼 문화가 정착했음을 말해준다. 부작용도 크다.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오는 폐해다. 오래 억눌렸던 감정이 한번에 터져 나와 벌어지는 사건과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무감각해지는 인적 네트워크가 대표적이다.

이것을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라는 두 가지 단어로 나눌 수 있다. 각각 속마음과 겉마음을 뜻한다. 쉽게 말해, 타인과 갈등을 빚을 것을 염려해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다. 과거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계급 사회가 원인이었겠지만, 계급 사회가 섬 지역의 '고립' 덕택에 굳건히 유지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결국 지역이 문화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의 감수성이라 불리는 '과잉'이란 본심을 숨기려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넘칠 듯한 수면을 보는 것과 같다. 감정을 넘칠 듯 꽉 눌러 놓으면 약간의 자극에도 금세 흘러내리고, 흘러내린 쪽에 시선이 쏠릴지언정 본 내용물 자체에는 관심이 덜하므로 본심을 숨기기 수월하다.

일본 감수성이 매체에서 표현되는 방식, '세카이계'

우리가 보기에, 일본 매체에서 묘사되는 일본 감수성의 모습은 꽤 정형화되어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처럼 정형화된 패턴인 탓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타자이므로 비교적 인식하기 쉬운 면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착각하는 몇몇 사실이 있다. 일본 감수성이 십대 혹은 이십대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는 게 애니메이션 혹은 드라마인 탓이 크다. 당장 사람들이 잘 아는 몇몇 애니메이션을 꼽아봐도 '사춘기'로 치부될 만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많다. 최근에는 <너의 이름은>이나 <목소리의 형태>, 과거로 가보면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정도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세카이계'다. 이 장르의 특징은 '현실과는 다른, 왜곡되고 오인된 세계'에서 '시청자가 감정 이입할 만한 주인공'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 정의는 무척 포괄적이어서 사실상 어떤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신세계 에반게리온>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모두 '세계'를 바꾸려 '개인'이 노력하려는 양상을 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이 부각된다는 게 '세카이계'의 가장 큰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세카이계' 작품이 인기를 끌었고, 우리는 그것이 일본 매체의 특성이라고 오인해 버렸다. 일종의 확대해석인 셈이다.

'세카이계'로의 감정 이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쯤 되면 '일본의 감수성'이라는 게 왜 '감정이입'하는 사람에게만 재미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일본의 겉마음과 속마음 문화는 개인의 사고와 가치관을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효과가 있고, 그걸 표면으로 드러내는 게 '세카이계' 장르다. 오직 매체의 힘을 빌려서만 비로소 개인의 속마음을 훌훌 털어놓을 수 있다. 그래서 억눌린 만큼 과잉된 감정이 작품 전체에 스며든다. 그건 마치 안개처럼 작용해서 '정말로 공감가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작품을 즐기기 힘든 상황이 된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이 있고, 그걸 모두 포용하는 건 불가하다. 그런데 회사가 '세카이계' 작품을 만들 때는 불특정 다수에게 어필해야 하므로 (돈을 벌어야 하므로) '대중적인' 사고를 내세우게 된다. 이때 그 대중성이 일본 사회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타자인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런 맥락으로 한국에서 흥행했던 세카이계 작품을 돌아보면, 한국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가치관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너의 이름은>의 경우 재난에 대처하는 소시민의 이야기라는 점이 어필했고, <목소리의 형태>의 경우 한국에서도 빈번한 왕따 문제를 부각했다.

반대로, 그런 거시적인 담론이 아니고서야 한국 관객에게 어필하기 힘들다는 말도 된다. 담론이 아니면 오직 인물의 감정이입만이 남는데, 메이와쿠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관객이 태반일 것이므로 그럴 수 있다.

영화 너의이름은 일본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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