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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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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네 핸드백에 매달린 노란 리본을 보며 아버지는 많은 생각을 했다. 멀쩡하게 잘 있는 딸도 괜히 안타까워 '딸에게 부치는 편지'를 써가며 유난을 떠는 아버진데 만약 아버지가 세월호 사고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당했다면 아마 아버지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라는 뜻이다.

원칙은 있으나 지켜지지 않은 지 오래됐고 분명 죄(因果)는 있으나 유전무죄라는 말이 상식처럼 돼버려,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應報)은 사람에 따라 차별이 생겼다. 우물가 물 긷던 아낙도 수긍할 수 있는 우리네 삶의 보편적 정의와 상식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우울하던 아버지는 네 핸드백에 매달린 세월호 노란 리본을 보며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꿔 가는 중이다.

'정의란?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피해를 당한 사람과 똑같이 분노하고 행동할 때 실현된다.'

아버지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솔론'의 이 말을 신념으로 삼는다. 아버지 또래의 사람 중에 분노는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았으니 내 일이 아니라며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다. 특히 자신도 돈과 권력이 있으면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들처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준칙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최소한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라면 나 자신을 위해서 같은 인간을 제물로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칸트가 말하는 윤리관이지만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상식적인 말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의 불행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의 말 한마디는 아버지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기에 충분했다. 이런 아버지에게 너의 핸드백에서 아직도 슬프게 흔들리고 있는 세월호 노란 리본은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타인의 불행에 똑같이 분노하고 행동할 줄 아는 딸이 아버지는 자랑스럽다. 지금 시각이 자정을 가리키는구나.

엊그저께 입사한 여직원에게 생일을 축하하는 꽃 상자가 인편으로 배달이 오는 늦은 밤. 그리고 스무층 빌딩 중간쯤 마지막 불이 꺼지고 이제 막 결혼한 젊은 여직원의 퇴근하는 뒷모습이 안타까운 이 밤. 지하철이 끊겨 택시를 잡아주며 슬쩍 차 번호를 적는 척, 걱정하지 말고 어여 가라는 눈짓에 환한 낯빛으로 바라보는 스무살을 이제 막 넘긴 병아리 직원.

아버지는 이런 밤이 좋다. 아버지가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엄마와 두 딸이 아버지 걱정을 하다가 잠이 드는, 때로는 누군가의 생명을 재촉하는 구급차의 삐뽀삐뽀 소리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지만 내가 걱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네가 사준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쓸 수 있는 조용한 이 밤이 아버지는 참 좋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쉽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밖에 없구나. 시 한 편 감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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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사랑

조동례

벼랑 앞에 서면
목숨 걸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마이산 탑사 앞
암벽을 끌어안은 능소화 또한
아무도 받아 줄 이 없는 절박함이
벼랑을 끌어안을 힘이 된 것이리라

매달리는 사랑은 언제나 불안하여
자칫 숨통을 조이기도 하지만
실낱같은 뿌리마저 내밀어
지나간 상처를 바아들여야
벌어진 사이가 붙는 거라며

칠월 염천 등줄기에
죽음을 무릅쓴 사랑꽃 피었다.
노을빛 조등 줄줄이 내걸고

제 상 치르듯
젖뗀 잎들은 바닥으로 보내며
생의 절개지에 벽화를 그리는 그녀

목숨 걸고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서 유서 쓰는 일이다

애지시선 025 '어처구니 사랑'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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