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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이 다 그렇겠지만 시를 짓는다는 건 함께 읽고 싶다는 뜻이다. 그 함께 하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내가 SNS에 시를 자주 소개하는 이유다. 자랑이라면 자랑이겠으나 시집만 2천여 권 넘게 가지고 있다. 하루도 안 빠지고 SNS에 <내가 읽은 시>라며 시를 소개하지만 내게 없는 시집의 시는 소개하지 않는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시철경 시인이 <당신의 정의>를 낭독하고 있다.
▲ 이철경 시인 시철경 시인이 <당신의 정의>를 낭독하고 있다.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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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노원구 소재 <책방, 봄>에서 시회(詩會)가 있었다. 시를 짓기보다는 함께 읽으며 즐기자는 모임이었다. 모임의 정식 이름은 <2022 책방 봄 문학축제>였지만 한시를 좋아하고 옛 선비들의 풍류를 좋아하는 나는 시회(詩會)라고 부르는게 정서에 맞아 앞으로도 이런 모임을 문학축제나 북콘서트보다 시회(詩會)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문학소녀
▲ 고한별 예비 시인 초등학교 5학년 문학소녀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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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시인 몇 분이 참석했지만 시인들의 이야기는 들으나 안 들으나 대충 짐작이 가는 바, 이번 시회의 백미는 초등학교5학년 학생 고한별양의 자작시 낭송이었다. 책방, 봄에서 나눠준 소책자의 <과부하>라는 시를 읽으며 속으로 "시 참 좋구나"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에 정신이 팔려 시 아래 설명을 못 읽어본 게 실수였다. 초등학생의 자작시였던 것이다.
 
과부하

머리에 과부하가 왔다
똑똑 귀를 열고 들어왔다
하얀 페인트와 붓을 들고 들어와서

머릿속에 부어버린다

아, 시 써야하는데…

사회자가 고한별 시인에게 물었다. "시가 놀라운데 앞으로도 시를 계속 쓸 거예요?" 어린 시인은 단호했다. "아니요. 머리아파서 시 안 쓸 거예요."
 
진지하게 시낭독을 경청하는 문학소녀
▲ 시회에 참석한 문학소녀 진지하게 시낭독을 경청하는 문학소녀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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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 차례다. 이가 상해서 임플란트를 하느라 이 여덟 대를 한꺼번에 빼고 뿌리를 심었다. 시회에 가기 전에 몇 번 읽어보았지만 빠진 이의 빈자리에서 말이 자꾸만 새어나갔다. 웃을 일은 아닌데 왜 그렇게 웃긴지, 아무튼 차례가 되어 낭송을 하기는 했는데…
 
치자꽃 설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각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꾹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섦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ㅡ 창비 <이 환장할 봄날에> 24면

시를 읊다가 행간 하나를 놓쳤다. 되돌아가 읽기도 뭐해서 그냥 건너뛰었다. 평소 애송하는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였다. 사회자가 물었다. 

"박규리 시인의 시를 고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젊은 날 사랑 때문에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서, 아아 사내가 여자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했던 몹쓸 기억이 있어서골랐습니다."


여기서 킥킥 저기서 킥킥 웃음소리가 들렸다.
 
감성이 아주 여린 분이다.
▲ 박상순 시인의 <너 혼자> 시를 낭독하다 말고 울음이…… 감성이 아주 여린 분이다.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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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

너 혼자 내려갈 수 있겠니
너 혼자 눈물 닦을 수 있겠니
너 혼자 이 자욱한 안개 나무의 둘레를 재어볼 수 있겠니

박상순 시인의 <너 혼자>라는 시의 부분이다. 가녀린 여대생이 낭독을 하다 말고 눈물을 훔친다. "아아 뭔가 사연이 있구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가며 겨우 낭송을 마쳤다. 정적이 흐르고 사회자가 어렵게 물었다.

"사실 당황했는데 시를 낭송하며 눈물을 흘리신 사연을 들을 수 있을까요?"
"함께 문학을 공부하던 친구가……"
"……"
"너 혼자라는 시처럼 혼자라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내가 마이크를 쥘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아 위로의 말은 못 전했지만 그에게 이 글을 통해서라도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임동확 시인의 <부분은 전체보다 크다>라는 시에 '한 개의 조사助詞, 한 구절의 문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신이 지금 흘린 눈물 한 방울이 한 개의 조사助詞가 되고 또 한 방울의 눈물이 한 구절의 문장이 되어 당신의 꿈은 꼭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문학에 대한 꿈은 여럿보다는 혼자 있을 때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혼자 있음을 외롭다 여기지 마시고 고독으로 전환시키면 어떨까요? 문학은 철저한 고독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여깁니다만."
 
당신의 정의 (定義)

(이철경)

그대는 나의 봄이다
우리가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대는
나에게
다가올 봄이다
추운 흔적 다 지우려
애쓰기 전,
남쪽으로부터
끊임없이 꽃을 피우며
다가오는

그대는 나의 봄이다

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다양한 연령층이 모였지만 형님 같고 누이 같았다. 낭송 도중 행간 하나를 빼먹어도 흉이 되지 않았고 눈물을 보이면 그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로가 서로에게 시나브로스며들었다.

오늘 시회에서 이철경 시인의 <당신의 정의 定義>라는 시가 단연 돋보였던 이유다. 시회에 모인 사람 서로가 서로에게봄이였다. 처음 참석한 시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자리를 마련해준 <책방, 봄>에게 고맙다.

태그:#책방봄, #시낭송, #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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