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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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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딸과 함께 연극을 보러갔는데 딸에게 전화가 오더군요. 저하고도 친한 딸의 친구지요. 짐작컨데 대화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디야?"
"응, 남자랑 대학로 연극보러 왔어."
"얼렐레! 너 연애하냐? 언제부터야?"
"응, 아주 옛날부터 있던 남잔데 사람은 착해."
"지지배, 너 아빠랑 연극보러 갔구나? 그치?"
"그래 이 지지배야, 히히."

안 사도 좋을 시집을 딸 덕분에 다시 사기도 하고, 아무튼 도착한 시집을 펼쳐놓고 '시?'라며 짧게 생각하다가 역시 짧게 결론을 내렸지요.

"우리 아빠가 아끼는 시집인데 아빠 몰래 가져다 주는 거야. 시집에 쓰인 시 대로만 살아라."

아버지 시집을 가져다가 아버지가 아끼는 만년필로 사인을 해서 친구에게 선물하는 딸,

"그래, 그래 네가 시인이다."

작은딸 하는 짓이 대개 이렇습니다. 이렇게 살가운 딸과 딸의 친구 결혼식 피로연에서 맛난 음식을 앞에 놓고 쌈박질을 했는데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와 내가 쓴 '수미(秀美)칩 한 봉지'라는 시가 문제가 되었지요.

딸의 말은 '저 혼자 맛있어질 리가 없다지만'이라는 부분이 장석주 시인의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라는 대목을 차용한 것이 아니냐 이거지요. 시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대추 한 알'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는 게 딸의 말인데,

"그래 좋다. 그러면 너는 장석주의 대추 한알 시를 어떻게 해석하냐?"
"대추 한 알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 즉 세상 모든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는 연기법을 시인은 얘기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아주 잘 알고 있구먼. 언제 그렇게 공부는 했댜?"
"헐!"

"그러면 아버지 글 어디에 연기법이 들어가 있더냐? 도대체 어느 부분이 대추 한 알을 흉내냈더냐"
"저 혼자 맛있어질 리가 없다지만..."
"또?"
"남들은 저게 혼자서, 단지 감자 하나로 맛있어질 리가 없다지만..."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의미전달은 둘째 치고 뉘앙스가 비슷하다는 말이겠지.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지지배야!"
"욕하지 말구 얘기하슈. 욕하면 대화가 안 되지."

"좋아, 대추 한 알이 불교의 연기법을 얘기했다면 내가 말하는 수미칩의 '저 혼자'라는 의미체계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즉 스스로 나타내고자 하는 존재감이여 지지배야."
"욕하지 말라니까?"
"알았어. 내가 말하는 수미칩의 '저 혼자'라는 의미체계는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맛으로서 수미라는 감자칩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그러니까 대추 한 알하고는 정반대의 의미라는 거지. 이해가 가냐? 아주 숭악한 딸일세! 지 애비 글을 표절로 매도를 하다니..."

"…."
"그리구 제일 중요한 거, 나는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몰라!"

딸이 표절이라며 문제를 삼은 부분인데 장석주 시인의 모든 시집이 책꽃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꽃혀있는데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모른다는 게 말도 안 될뿐더러 사실 흉내를 내기는 했습니다. 딸에게 지기 싫어서 억지를 부리기는 했지만 억지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제가 지은 시를 공개하고 싶어도 마음에 찔리는 구석이 있어 차마 공개를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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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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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아버지와 딸, #시집,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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