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쌍수리 학살 현장 청주시 남일면 쌍수리 현장
▲ 쌍수리 학살 현장 청주시 남일면 쌍수리 현장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초저녁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간 쌍수리 야산과 밭에는 약 20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들은 한여름이었지만 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이들 앞에 저승사자처럼 나타난 이는 군인이었다. "똑바로 줄 서"라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군에서 제식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이들로서는 군인의 명령에 당황했다.

군 장교가 병사들에게 "야! 앞줄부터 쏴"라고 재촉했다. 쪼그려 있던 이들이 '드디어 죽는구나'라고 생각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울음소리는 이내 총소리에 묻혔다.

총소리와 울음소리 와중에 남편 정세영(당시 27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이렇게 같이 죽는 것도 천생연분이오. 그러니 너무 원통해 하지 마시오" 하며 손을 잡았다. 아내 강영애(당시 26세)는 죽음 직전의 상황이었지만 남편의 그 말이 그렇게 따듯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는 이어졌다.

강영애 눈이 힘겹게 떠졌다. 하늘에 북두칠성이 보였다. '아! 저승에도 북두칠성이 있는가보 네'라고 생각했다. "아 그리로 가면 질(길)이 아녀" 아줌마 둘이 산비탈을 올라오며 이야기를 했다. 올라오던 아줌마들과 강영애의 눈이 마주쳤다. 아줌마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몸이 굳었다. 잠시 후 아줌마들이 "악"하면서 뛰어 내려갔다. 강영애는 '귀신도 말을 하네. 귀신도 사람과 똑같구나'라고 생각했다.

정작 아줌마들이 기겁을 한 것은 강영애의 모습을 보고서였다. 긴 머리는 흩어져 내려 산발을 한 상태였고, 옷은 전부 피 칠갑을 한 상태였다. 귀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영애는 자신의 이런 모습은 생각지도 않고, 상대방을 귀신으로 잘못 본 것이다.

잠시 후 전신에 고통이 몰려왔다. 뼈가 부서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몸을 아래로 굴렸다. 송충이처럼 꾸물꾸물 기었다. 그녀가 총을 맞은 장소는 산비탈 아래 밭이었는데, 경사가 심했다. 아래로 구르면서 까무륵 정신을 잃었다.

산 사람은 묻는 게 아녀

아침 반찬에 쓰려고 호박을 따러 밭에 가려다가 강영애와 마주친 아줌마들이 지서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여보시쇼. 시상에나 저 산에 귀신이 있소" 지서에 있던 순사는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여인들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인들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하기는 누가 지서에 와서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겠는가? 이야기를 듣던 지서장은 "보도연맹원 중 살아난 놈이 있는가 보다"며 현장으로 가자고 했다.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남일지서장은 순사들을 데리고 쌍수리 현장으로 갔다. 가면서 주변 마을의 청·장년들을 모았다.

현재 공군사관학교 주변인 남일면 쌍수리 학살현장은 목불인견이었다. 수백 명의 시신들이 나뒹굴어 있고, 몸에서는 아직도 피가 쿨럭쿨럭 쏟아지기도 했다. 일행들이 코를 막고 눈을 찡그리면서 여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처음 강영애를 마주친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여인들이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애초의 장소에서 아래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아까의 그 여성'이 나부라진 채 있었다.

지서장과 일행이 그곳으로 몰려갔다. 강영애는 쓰러져 있기는 했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지서장은 잔뜩 인상을 쓰면서 "산 사람이 사람을 놀래키네. 이 여자를 묻어버려"라고 지시했다. 옆에 서 있던 경찰이 "아직 살아있는데요"라며 멈칫거리자, "시끄러워 자식아! 묻어버려"하며 고함을 질렀다.

움찔한 경찰은 동원된 마을 사람들에게 눈짓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삽으로 땅을 약간 파고 그곳에 강영애를 눕혔다. 강영애는 아직도 혼수상태였다. 지서장이 경찰들을 데리고 가며 "여기 죽어있는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수습하시오"라고 했다.

지서장 뒤통수가 안 보일쯤 해서 구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산 사람은 묻는 게 아녀. 이 여자는 살려주세"라고 했다. 청년 한 명과 함께 구장은 강영애의 팔과 다리를 들고 산비탈 나무숲으로 갔다. 몇 시간에 걸쳐 시신 수습을 마무리한 구장이 강영애가 있는 곳으로 갔다.

"새댁은 어디서 온 사람이오?"라고 물었다. 강영애는 그제야 '내가 살아 있는 거구나'라며, "남일면 가산리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구장 눈은 화등잔처럼 커졌다. "남편은 누구요" "정세영입니다. 근데 좀 전에 저기서 죽었어요" "아이고! 아까운 인물이 죽었구나"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정세영은 구장 아들과 친구여서, 구장도 잘 아는 이였다. 특히나 구장은 정세영의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관계여서 남다른 감회가 솟아올랐다.

"그런데 새댁 홀몸이 아닌가?" "뱃속에 아기가 있어요"하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녀는 임신 7개월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장이 강영애를 다시 보니 온몸이 피로 얼룩졌다. 그녀의 온 몸에는 총 자국이 있었다. 전 날 군인들의 총격에 여덟 발이나 맞은 것이다. 총 여덟 발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더군다나 임신 7개월의 몸으로...

구장은 부리나케 마을로 내려가 강영애의 시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시아버지와 가족들은 그녀를 담가에 싣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임신 7개월의 강영애가 저승까지 갔다가 살아오고 남편 정세영을 포함한 20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청주시 남일면 쌍수리에서 학살당한 때는 1950년 7월 10일 경이었다.

총상  흔적 총상 흔적이 남아있는 강영애
▲ 총상 흔적 총상 흔적이 남아있는 강영애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전기고문을 당한 임산부

청주경찰서 유치장은 숨도 쉴 수 없는 상태였다. 비좁은 유치장에 수많은 이들을 구금해 놓으니, 밤에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칼잠을 자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발이 상대편의 코앞에 놓여 있었다. 잠을 뒤척이는데 경찰이 "강영애 나와"라고 했다.

강영애는 몸을 뒤뚱거리며 취조실로 갔다. 희미한 전등 밑에서 우락부락하게 생긴 형사가 "당신 언제부터 남로당 가입했어?" "당신 남로당에서의 역할이 뭐야"라며 연속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답할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로당은 고사하고 마을 사람들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해 본 적 없는 그녀였다.

남편 정세영은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직장생활 하다가 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고무다리를 끼운 그는 해방 후 귀향했지만 농사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목수 일을 배운 그는 농을 제작하기도 하고 부지런히 일을 했다.

어느 날 집안에 할아버지뻘 되는 이가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해 도장을 찍은 것이 화근이었다. 남편이 몇 차례 보도연맹 모임에 참여하는 것 같았지만, 아내 강영애가 남편에게 그 모임에 대해 한 번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해괴한 것은 강영애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강영애 부부는 예비검속되어 청주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것이다. 남·여를 구별해 구금해 놓았기에 그때부터 남편 얼굴은 구경도 못했다. 사정이 이런데, 강영애가 형사에게 답변할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형사는 강영애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자 몸에 감은 전깃줄의 전압을 올렸다. "악"하는 비명소리와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찬 물이 쏟아졌다. 까무룩히 의식이 되돌아 왔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간신히 의식을 수습하자 형사는 이내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임산부인 그녀가 전기고문과 몽둥이찜질을 견디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라도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몇 시간의 고문 후 형사는 "야 이X 다시 유치장에 집어넣어" 했다. 몸이 걸레가 된 그녀는 고문을 당하고도 유치장에서 10일이나 구금되었다.

평생을 병치레... 국가의 보상은 없었다

트럭에 보도연맹원들을 실었다. 손이 광목천과 노끈으로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는데도, 군인들은 빨리 안 움직인다며 고함을 질렀다. 트럭에 태워진 보도연맹원들은 쥐 죽은 듯 조용했지만 공간이 너무 비좁아 허둥거렸다. 군인들이 "이 XX들이 뒈질라고 지랄들 하는구만"하며 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보도연맹원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트럭은 청주 남쪽으로 30분간 달렸다. 남일면 쌍수리에서 멈춘 트럭은 짐짝 내리듯이 보도연맹원들을 내려놓았다. 이때부터 군인들은 보도연맹원들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 취급했다. 그리고 잠시 후부터 '피의 살육전'이 시작되었다. 200명이 죽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임산부 강영애가 기적처럼 살아났다.

살아난 강영애에게 1950년 겨울 난리는 그야말로 '난리'였다. 여름 난리에 뱃속에 있던 아기가 세상 빛을 보았지만 마냥 골골 앓았다. 그런데 겨울 난리에 피난을 가려니, 아기를 항상 업고 다녀야 했다. 피난길에서 돌아오자마자 아기는 백일을 갓 넘기고 생을 달리했다. 아기 이름은 그때까지 짓지도 못했다.

강영애 학살 현장을 바라보는 강영애
▲ 강영애 학살 현장을 바라보는 강영애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이제 고인이 된 강영애는 평생을 병치레했다. 임산부로서 총을 여덟 발이나 맞았던 것의 후유증이었다. 80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녀의 배와 등, 그리고 엉덩이에는 당시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깨, 척추, 손등, 허리에 총을 맞았어요. 평생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그녀의 증언은 2002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죽은 사람만 보상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강영애는 총 여덟 발을 맞고도 살아났기에 보상 대상에서 빠진 것이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평생 병치레를 해 온 그녀에게 대한민국은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라고 하면 모두 끝나는 가? 국가가 답변할 때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